제목-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지은이-윤덕노 2013년 4월 5일 유지호
제목-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지은이-윤덕노 2013년 4월 5일 유지호
찐빵
일본사람들은 오랫동안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7세기 덴무 일왕이 가축 도살을 금지했을 뿐만 아니라 고기도 먹지말라는 육식 금지령을 선포한 이후 1200년동안 일본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이 다시 고리를 먹게 된 것은 1872년 무렵으로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메이지 일왕이 육식 금지 조치를 헤제하면서부터다. 찐빵은 일본에 육식 금지가 착실히 이루어질 무렵인 1341년에 중국인 임정인이 류잔산사를 딸라 일본에 온 때였다. 임정인은 고향에서 먹었던 것처럼 고기 만두를 팔수 없어서 일본사람이 좋아하는 단팥을 넣어 만두를 빚었는데 이것이 지금 일본 찐빵인 나라만주의 원조다.
붕어빵
모 라디오 방송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철에 자주 먹는 간식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결과는 붕어빵을 가장 많이 먹는 것으로 조사 됐고 그 다음이 어묵, 호빵에 순서이다. 붕어빵은 과거 동양에도 없었고 서양에도 없었던 식품이니까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가 아이디어 상품으로 붕어빵을 개발해 팔아서 큰돈을 벌었을 것 같지만 진화론으로 풀어보면 붕어빵은 환경변화에 적응하며 진화한 식품이고 족보가 있다. 많은 논란이 있지만 붕어빵에 원조를 일본에 도미빵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에서는 도미가 가장 좋은 생선으로 쳐주기 때문에 일본 서민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붕어빵도 마찬가지다 예전 서울에서는 붕어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이름도 붕어빵이라고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 붕어빵은 일본 도미빵을 모방해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커다란 차이가 있다. 붕어빵은 기본적으로 풀빵이라 밀가루 반죽을 묽게 풀어서 빵을 굽는다. 그러나 일본 도미빵은 밀가루 반죽에 계란 설탕등 갖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그래서 가격도 비싸서 붕어빵 정도에 가격을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비싸게 느껴진다. 붕어빵과 도미빵은 이렇게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측면이 있다.
쫄면
면발이 잘 끊기지 않을 정도로 질긴 국수를 매콤하고 새콤한 양념에 비벼 먹는 국수가 쫄면이다. 국수가 하도 쫄깃쫄깃해 이름까지 쫄면이라고 지었는데 은근히 중독성마저 있어 분식집이나 대형 식품매장 음식코너의 인기 메뉴 중 하나다. 국어사전에도 등재된 우리 국수지만 쫄면은 사실 잘못 만들어진 국수다. 쉽게 말해 공장에서 실수로 생긴 불량품이다. 쫄면의 고향은 인천인데 냉면을 만들다가 가느다란 사출기가 아닌 두꺼운 사출기를 끼워 냉면 국수 대신 굵은 국수가 나온 것이다. 이 국수들은 전량 폐기 처분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공장 옆에 있던 분식집이 불량 국수를 가져다가 채소와 새콤달콤한 고추장 양념으로 비벼서 쫄면이라고 내놓은 메뉴가 학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입소문이 퍼진 것이다.
엿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게 가장 많이 주는 선물이 엿이다. 엿처럼 철썩 붙으라는 뜻에서 합격을 소원하며 엿을 선물한다. 지금도 수능 시험이 다가오면 엿이 불티나게 팔린다. 옛날 한양으로 과거 보러 떠나는 시골 유생의 괴나리 봇짐 속에는 엿이 필수품으로 들어 있었다. 길가다 요기를 하라는 뜻도 있지만 엿 먹고 과거에 급제하라는 소원도 담았다. 옛날 사람들은 엿에다 다양한 소망을 담았다. 조상들은 설날이나 정월 대보름 아침이면 엿을 먹는 풍속이 있는데 그냥 엿을 먹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빌면서 먹었다. 정월 초하루나 대보름에 먹는 엿을 복엿이라고 했는데 복 엿을 먹으면 살림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느낀점-그냥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 같은 음식들에 역사를 알수 있어서 좋았고 재미있었다.
-
난 찐빵과 붕어빵 좋아하는데~~~그런 역사가 있었구나~!!! 잼난데~~~
제목-폰트의 비밀 지은이-고바야시 아카라 2014년 3월 29일 유지호
제목-폰트의 비밀 지은이-고바야시 아카라 2014년 3월 29일 유지호
유명 브랜드는 브랜드만에 고품격을 갗추고 있습니다. 과연 그것은 어디서 배어나오는 것일까요? 루이비통은 푸투라라는 폰트로 되어있습니다. 이 폰트의 특징은 o가 거의 동그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푸투라 체로 루이비통을 쓰면 어딘가 이상합니다. 안정감도 없으며 고급스럽지도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루이비통에 로고는 글자와 글자 사이에 간격이 넓어서 권위 스럽게 느껴집니다.
르코코 시대 이후의 활자 서체 중에도 동판 인쇄 계열의 스타일을 도입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패션 잡지를 장식하는 것이 대부분 이러한 폰트입니다. 패션 잡지들은 디도체나 보도니 체를 많이 씁니다. 이러한 폰트의 공통적인 특징은 글자 하나하나가 개성적이라기보다는 비교적 표준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는 곳은 매우 가늘게 보이는데 이를 통해 글자의 섬세함이 표현되어 세련된 연출을 돋보이게 합니다.
컴퓨터를 사면 몇종류의 폰트가 운영체제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폰트는 무료일까요? 대체로 os나 소프트 웨어 제조사는 사용자가 자신들의 툴을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 할 수있도록 사전에 폰트를 준비하여 넣어줍니다. 여기서 폰트의 개발 비용은 라이선스 형테로 os제조사에서 폰트 개발자에게 지급합니다. 애플사는 스티브 잡스의 정책 답게 아름다운 폰트를 골라서 탑재하는 방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헤르만 차프씨가 제작한 라이노 타입사의 폰트이자 최근의 베스트셀러인 스크립트체 잡피노가 있습니다.
저는 왜 여러 종류의 폰트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분류하는가에 대한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체를 처음보는 사람들과 저는 폰트를 보고 거의 똑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컴퓨터를 사용할 정도로 어른이 되면, 아니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장면에서는 보통 이럴 것이다 라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디자인 지식이나 경험이 풍부하지 않더라도 외형적인 판단만으로 폰트의 사용법을 알 수있다는 뜻입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옷을 잘모르는 사람이라도 관공서에서 입는 옷과 등산 할 때 입는 옷이 다르다는 것은 알겠지요. 이러한 생각과 절차를 알고 있다면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이나 보고서를 작성할 때 거기에 어울리는 차분한 분위기의 폰트를 고를 수있습니다. 반대로 초등학생의 소풍이나 운동회 안내문 같은 경우는 익살스러운 폰트로 해야겠지요. 친한 사람을 부르는 초대장같은 경우는 손글씨 풍인 폰트를 골라 친밀한 느낌을 주면 좋겠지요. 사람들은 폰트를 어떻게 고르냐고 물어보지만 폰트는 그냥 기능과 외형만 고르면 됩니다.
느낀점-폰트의 종류가 정말 많다는 것을 알았고 폰트의 이름도 멋있는 것이 많았다. 사람들이 글을 쓸 때 진지하니까 궁서체로 쓴다고 많이들 하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어서 좋았다.
-
나도 고백 덕분에 새로운 것을 알게되었네~^*^
제목-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지은이-조세희 2013년 3월 22일 유지호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통장이 이걸 가져 왔어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그것은 철거 계고장이었다. 여동생 영희는 입주권을 팔꺼냐고 물어보았지만 영호가 안판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아파트를 입주 할 돈도 없었다. 우리는 갈때가 없었다. 영희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명희에게 공장에 나가지 않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온 가족이 공장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러자 명희가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마음이 오히려 편했다. 아버지는 서커스 일을 하겠다고 하셨고 우리에게는 학교만 나가라고 하셨다. 입주권 가격이 점점 올랐다. 아침에 십칠만원 했던게 저녁에는 십팔만 오천원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영희는 없어졌다. 주정뱅이는 비행접시가 납치해 갔다고 하였지만 터무니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입주권을 25만원에 팔았다. 우리는 고기를 구워서 마지막 식사를 했다. 그리고 쇠망치를 든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짐을싸서 집을 나왔다.
큰오빠는 우리 집을 짓는데 천년이 걸렸다고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순결을 중요하게 생각하라고 했지만 나는 우리집을 산 사람에 차를 타고 가고 있다. 나는 그의 집에서 알몸으로 잠을 잤다. 매일 우리 가족의 꿈을 꾼다. 엄마는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나는 그럴때마다 이 남자에 있는 금고에 있는 입주권을 가지고 돌아간다고 대답한다. 나는 그의 금고에서 우리의 것을 꺼냈다. 그의 금고 속에는 돈과 권총과 칼이 들어 있었다. 나느 돈과 칼을 꺼내서 택시를 탔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우리 집은 없어졌다.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 사람들이 어떤 아주머니를 찾아가라고 하셨다. 나는 훔친 입주권으로 임대아파트 입주 신청을 했다. 내가 살던 온 동네에 집이 살아졌다. 난장이와 난장이의 부인, 난장이의 두아들, 그리고 난장이의 딸이 살아간 흔적은 거기에 없었다. 넓은 공터만 있었다.
느낀점-책이 이해가 잘 안되었다. 갑자기 주인공이 바뀌는데 바뀌었다고 말도 안해주었다. 여러 가지에 이야기가 있지만 지금 기억나는 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밖에 없다.
제목-세상을 보는 눈1 지은이-정호근 외 2013년 3월 8일 유지호
제목-세상을 보는 눈1 지은이-정호근 외 2013년 3월 8일 유지호
나는 누구일까? 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래, 도대체 내가 누구란 말인가 이질문에 누구라도 속시원하게 답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여기에 답을 하려고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 오늘에 이르렀는가 하는 나의 기억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기억은 도대체 어떤 현상인가? 여기에 대해 심리학자나 의학자, 생물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거듭하고 있지만 그 신비한 현상의 일부만 알아냈을 뿐 전모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사람의 기억은 그렇게 단순하고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만일 인간이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기억의 요소들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계적으로 기억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행의 원천이 된다. 이것이 왜 불행한가는 실제로 엄청난 기억력을 가진 사람들에 사례를 보면 알수 있다. 수학에 나오는 파이의 값을 기억할 것이다. 여러분 같으면 소숫점 이하 몇자리까지 기억할 수 있겠는가? 토모요리라는 일본 사람은 소숫점 이하 4만 자리를 외웠는데 그것을 읊어대는 데에만 17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보다 더 유명한 사람은 러시아의 셰레셰프스키라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칠판 하나 가득히 의미 없는 숫자를 쓴후 그가 한번 휙 둘러보고 그대로 그것을 외워대는 정도는 기본이었다. 문제는 이런 실험을 하고 1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그 칠판 위에 숫자를 외우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 사람들은 정보를 문학 작품보다도 매스 미디어의 영향이 극대화 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역사 드라마를 즐겨 본다. 이런 드라마들은 시대사를 전공하는 역사가의 해석을 곧이곧대로 따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이 드라마 제작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시청률이다. 그래서 의미없는 사건과 인물을 부풀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역사 인식의 소재가 되기 때문에 역사를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반대중들의 역사 인식 형성에는 여러 다양한 매체들이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역사인식을 담당하는 전문가 집단 내에서 가장 심층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다음에 일반 영역으로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 세계를 들여다 보면 이제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역사가들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호방한 필치로 전세계의 역사를 재단하고 그로부터 우리 삶의 의미를 바로 이끌어내는 따위의 일을 하는 역사가들은 거의 없다. 역사가들의 일은 엄청나게 방대함으로 그 어떤 역사가도 모든 시대,모든지역, 모든 사건을 다 다룰수는 없다. 그래서 역사가들도 전문화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일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시대를 중심으로 나누기도하고 연구하는 지역에 따라 나누기도 하고 주제를 중심으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전문 역사가들이야 말로 정말 객관적인 연구를 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들이 그좁은 세계 속에서 작업하는 것은 그 자체가 흥미로워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주장하려는 큰 테제를 구체적인 영역에서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이 쌓은 실증의 힘을 무기로 삼은 역사가들은 논쟁의 장이 마련되면 마치 검투사들처럼 맞대결한다. 그리고 많은 권력의 주체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역사를 꾸미려고 한다. 역사를 놓고 벌어지는 이러한 다툼은 역사학계 대중매체들 교과서 등에서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역사를 위한 투쟁, 즉 우리의 기억을 자기 방식으로 꾸미려는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여러 종류의 강제된 역사 기억들, 즉 신화화된 역사들, 거짓된 역사 인식이 강요되게 마련이다. 그런것들에 휘둘리게 되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만다. 우리는 그런것들을 예리하게 꿰뚫어보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만일 역사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누구인가를 성실하게 묻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삶이 어ᄄᅠᇂ게 해서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묻고, 또 그 질문을 제대로 된 질문인가, 그 질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 것까지 역사학의 몫이다. 역사는 영원한 의심이며 인간에 대한 영원한 물음이다.
느낀점-한 챕터를 읽었는데 마치 한권에 책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이다.
올해 처음으로 보드를 탔습니다
-
와우^*^ 멋지다. 지호의 용감성이 참으로 부럽소이다.
난 가슴이 선들거려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는데~~~
경이롭소이다~^*^ -
짱 멋지다. 지호야 반함 반함 반함 반함 반함 반함 반함 반함이야 ^^
이 멋진 사진은 누가 찍은 거야? 궁금해 궁금해궁금해?????????? -
?
거기 사람이 찍어줬어요 ㅎㅎ
-
거기 사람에게 사진 찍어줘서 고맙다고 고백해야 겠다.ㅎㅎ
-
올ㅋ 멋잇네
-
지호야~ 비상하는 멋진 새같아!
-
여기 보드 진짜 싸서 한개 샀는데 소장용임ㅇㅅㅇ
여행기행문 2/20~2/24
-
역시 지호 멋지다!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 도맡아 앉아 편하게 가는 방법을 터득하고^^ 지호가 빵게임의 필승법을 알려주었네ㅎㅎ
-
볶음밥과 국수를 너무 많이 먹었구나~한국에 돌아보면 한동안 볶음밥과 국수는 안먹고 싶겠다. 밥하고 김치가 마니 그리울것 같네~오면 맛있게 많이 먹자
-
3번만에 깨는 게임 실력자 지호~^*^
여행기행문 2/16~2/19
-
글을 읽으면서 눈에 그림이 그려지는구나 .모두들정말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남은시간 건강하게 재밌게있다오렴.. 나~~누구게
-
터진 해먹에서 놀아보는 건 쉽지 않은 경험.... 해먹 바이킹 재미있었겠다. 지호가 생생한 느낌을 잘 써줘서 재미있다.
-
?
재미있게 지내는 모습에 덩달아 나도 행복하군...잘 지내다 오길 바래.
-
?
찬미이모가 현옥이모인건 전교인이 알지 않을까요?? ㅋㅋㅋ 남은시간 안다치고 재밌게 놀다 돌아갈게요~~~
-
댓글에 댓글까지 달고.. 여유있어 좋네 고백~!^^
제목-학교에서 배웠지만 잘몰랐던 미술 지은이-이명옥 2013년 2월 13일 유지호
제목-학교에서 배웠지만 잘몰랐던 미술 지은이-이명옥 2013년 2월 13일 유지호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이 가짜 복제 품으로 만들어지자 자신만에 서명을 그림에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고야는 서명으로 고백을 하기도 했고 고흐는 반고흐라는 서명을 쓰기 싫어서 마음에 드는 그림에만 빈센트라고 서명을 남겼습니다. 화가들은 손을 이용해 다양하게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특히 다빈치는 검지를 그림에서 많이 썻고 손으로 그림을 해석할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1차 대전 미국에는 일명 샘 아저씨가 검지로 사람들을 가르키며 군사를 모으는 포스터가 있었는데 이 포스터를 보면 알수 있듯이 손은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입을 말하거나 먹는데만 필요한 신체 기관으로 여기지만 입은 인간의 감정이 최초로 들어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격력한 감정을 입을 벌려 표현한 에드바르 뭉크에 절규는 인간에 내면에 깃든 두려움과 공포를 너무나 생생하게 표현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는 미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림에 움직임을 표현한 대표적인 예술가중 한사람입니다. 사람의 표정,방향,몸짓 들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받습니다. 거울은 예술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자화상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유리거울이 평면 거울이 아닌 볼록 거울이었기 때문에 화가들에 자화상이 특이했지요. 그후 평면거울이 나오자 볼록 거울을 제치고 화가들에 애장품이 되었습니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림은 열심히 보지만 액자는 잘보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액자는 예술작품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많은 화가들이 작품을 구상할때부터 액자를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려요. 심지어 액자를 직접 디자인하거나 만들기도 합니다. 그림을 볼 때 액자에도 관심을 가지고 보세요 느낌이 새롭답니다.
제목-조선왕조 실록 14 2014 2/5 유지호
제목-조선왕조 실록 14 2014 2/5 유지호
숙종은 현종에 뒤를 이어 14살의 나이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임근은 남인들에 편을 들어 주었고 점점 남인들은 공세 수위를 높여갔다. 선인들은 빠르게 배제 되었다. 하지만 권력에 집중을 막기 위해 남인들이 배제 되어서 승지와 대간 마저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남인 정권때 결정된 정책들도 되돌려 졌고 조경이출향하고 남인들의 요청으로 지은 정개청의 사당도 허물어졌다. 서인에 가장 높은 권력자는 김석주라는 자였다. 이자는 남인의 복귀를 막기 위해 남인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보고했고 하지만 높은 사람이 걸려들지는 않았다. 그후 그는 임금도 두려워 할정도에 권력을 가지지만 숙종 10년에 죽고 만다. 인경왕후는 숙종 6년에 세상을 떠났고 새로운 후비를 들이니 이가 바로 인형왕후 이다. 인형왕후는 쫒았던 장희빈을 불러 들였고 장희빈은 아들을 낳았다. 그후 원자로 책봉했고 희빈은 국모가 되었다. 인형왕후는 쫒겼다. 그리고 마침내 서인의 대표인 송시열이 죽었다. 그후 숙종은 장씨와 싸우고 인형왕후가 그리워졌다. 그래서 인형을 궁으로 불러들여서 중궁전의 주인으로 삼고 장씨를 희빈으로 갈등 시켰다. 하지만 장씨는 복위하기 위해 자작극을 하기도 하고 신당을 설치해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나 이게 발각 되자 장희빈은 사약을 받는다. 그리고 숙정은 이제 소론을 몰아내고 노론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이에 반박하는 자들로 파직하고 새로운 노론으로 채웠다. 세자는 하루하루가 살얼음 위로 걷는 것 같은 나날이었다. 성격은 소심했고 말수가 적었다. 숙종은 눈이 안좋아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세자는 늘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하는 말이라고 는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하겠다. 이세가지 말로만 답했고 대부분의 사안은 따랐지만 처벌 요구는 불만 세력을 낳을수 있기에 좀처럼은 하지 않았다. 큰 실수도 하진 않아서 세자의 입지는 탄탄해 졌다. 그리고 숙종은 마침내 숙종 46년에 눈을 감았다.
제목-조선왕조실록13 지은이-박시백 2013년 2월 1일 유지호
제목-조선왕조실록13 지은이-박시백 2013년 2월 1일 유지호
광해군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중립 외교라면 효종은 북벌이라고 할 수 있다.그만큼 남자 다웠고 당당했다. 나중에 효중이 죽었을 때 난감한 일이 발생 하기도 했는데 바로 관이 작아 효종이 들어갈수 없었다. 효종이 가장 관심이 있었던 부분은 군사 문제였다. 관심을 가졌을뿐만 아니라 안목도 뛰어났다. 그래서 청에서 조선의 조총수를 계속 요구해 조선에 조청병들은 두루 활약을 보였다. 효종은 송시열이라는 자를 밑고 의지했다. 그래서 같이 북벌을 도모했지만 북벌을 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효종 2년에 충청지역에 대동법이 시행되어서 백성들이 좋아했고 확대를 실시하였으나 효종은 실해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후 화폐법도 실시하였으나 상품경제의 미발달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효종 10년에 한노인이 5월에 거사가 있을것이기 때문에 경복궁 초옥으로 옮기라고 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로 얼굴의 종기가 나서 눈을 뜰수도 없어졌다. 그리고 침을 놓자 피가 멈추지 않아서 효종이 죽었다. 상복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기년복으로 정해졌다. 현종은 강한 이미지인 아버지에 비해 색깔이 없는 이미지로 알려져있다. 아버지가 못다한 대동법 시행을 마침내 했냈고 세수 자원을 확보하고 곤장의 크기와 형태 재질을 바꿔서 형장의 가혹함을 완화시켰다. 그리고 병을 치료하러 온천을 가면 군사 훈련을 병행해서 진법을 훈련했다. 승승장구하던 왕에게 갑자기 헛배가 부르고 설사가 뒤따르며 숨을 거둔다. 서른다섯에 젊은 나이였다.
느낀점-특별한 사건이 없는 것 같아 좀 지루했다.
-
고백 지호양~^*^ 마가퀴즈 꾸준히 올리는 모습이 참 좋아보인다. 너 덕분에 금주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게 되었고, 너로 인해 확실히 마가퀴즈는 이번에 묻어갔네. 고맙다~^*^ 2일에 독후감까지 올리다니~~~뜨끈뜨끈한 최신 글을 읽어서 좋네~!!!
조선왕조실록12 지은이-박시백 2013년 1월 23일 유지호
조선왕조실록12 지은이-박시백 2013년 1월 23일 유지호
반정의 주역들은 공신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이괄이라는자가 또 반란을 일으켜 왕은 호남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이괄은 부하들에 의해 목이잘리고 말았다. 후금은 조선을 치려고 제대로 마음을 먹어서 중간에 있는 성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채 어느새 황주까지 내려왔다. 그래서 조정은 강화도로 몸을 피했다. 후금은 그후에는 천천히 내려오면서 협상을 하려했다. 그래서 화친이 이루어졌으나 후금군사들은 철수를 하지 않고 백성을 죽이며 악탈했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어서 일정량의 예물을 상납받고 교역도 이루어지지만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우선시 해서 후금을 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금은 다시 쳐들어왔고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결국 포위를 당해서 왕은 삼배구고두(세번 절하고 아호번 조아리는)를 하고 세자를 비롯한인질들도 끌려갔다. 세자에게 청나라 사람들은 툭하면 외교적 현안에 대해 따졌지만 세자는 그럴때마다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 능숙하게 답변했다. 하지만 왕은 자기보다 잘난 세자를 싫어하였고 좋아하는 후궁인 조씨도 세자를 헐뜯자 세자에 대한 경계심까지 품었다. 세자는 결국 인조 23년 2월에 돌아왔는데 왕이 위로를 한다거나 연회를 배푼 기록이 없다. 세자는 두어달뒤에 병에 걸렸다. 왕은 자신을 10년 넘게 봐준 주치의를 보내서 침을 놓게 하지만 세자가 사흘 뒤에 죽고 만다. 그후 왕은 며느리를 죽이고 어린친손자를 둘이나 죽게했다.
느낀점-이시대에 백성이 불쌍하다.
-
지호야~^^너 덕분에 퀴즈정답 수정했다. 자세히 읽어보니 3페이지 오른쪽 하단에 정확한 질문이 있네~^^ 고맙다~♬
-
?
네~ 다행이네요 ㅋㅋㅋ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