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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머리잘랐습니다

by 명화 posted May 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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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_161406.jpg

학교에서 하도 자르라고 해서 잘랐습니다

약간 어색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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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실 2014.05.22 17:55
    명화야~ 머리카락 자르니 훨씬 멋지다^^ 얼른 보고 싶은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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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 2014.05.23 13:40
    완전 미남이다. 그동안 머리는 왜 기른거야? ㅋㅋ 멋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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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 2014.05.23 20:08
    멋있다.^^

정우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by 명화 posted May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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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지은이:윤덕노

출판사:청보리

내용:찐빵

찐빵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수증기로 쪄서 익힌 빵이다. 우리말로 빵이라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전통적인 의미의 빵과는 거리가 멀다. 찐빵의 기원은 1341년 원나라에 유학을 갔던 일본 승려 류잔선사가 일본으로 귀국하면서 함깨 일본에 건너 온 임정인 이라는 중국 사람이 만들었다고 한다. 임정인은 일본에 와서 절에서 만두를 빚어 팔면서 살았는데 고기 대신 단팥을 넣어서 새로운 만두를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육식 금지령이 있었는데 임정인은 고기를 먹지 않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돼지고기 대신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단팥을 넣어 만두를 빚은 것이다.

붕어빵

붕어빵의 족보는 서양의 와플과 동양의 만두가 합쳐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 무렵 거리에서 붕어빵을 사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전에도 붕어빵이 있었지만 풀빵이라고 불렀던 국화빵이 대세였다고 증언하는사람이 더 많다. 사실 붕어빵이나 풀빵은 모양새만 다를뿐 만드는 방법은 같다. 사람들 마다 다르지만 붕어빵의 원조를 일본의 도미빵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도미빵은 일본에서 만들어진 도미모양 빵인데 서민들은 비싼 도미를 먹는 것처럼 행복해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붕어빵도 예전 서울에서 비싼 붕어의 모습을 낸 빵이 도미빵하고 비슷하다.

호떡

호떡은 오랑캐라는 뜻의 한자 호와 우리말 떡이 합쳐진 이름이다. 호떡은 옛날에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발달한 빵이다. 옛날식으로 표현하자면 흉노족 돌궐족 선비족이 먹었던 빵이니 오랑캐들이 먹는 빵이라는 뜻에서 호떡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호떡을 간식으로 먹었지만 역사적으로 호떡은 황제나 귀족들이 먹었던 귀한 음식이었다. 호떡은 한나라 때 중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명나라 때 장대가 야한선이라는 책에 중국 떡의 계보를 밝혔는데 호떡은 한나라 때 김일이 전한 것이라고 적어 놓았다. 김일은 흉노족 왕자였는데 한무제 때 중국으로 귀화하면서 호떡을 전했다는 것이다.

단무지

소금에 무를 절인우리나라의 짠지처럼 단무지는 무를 소금과 쌀겨 등에 절여 먹는 반찬으로 일본말로는 다쿠앙 이라고 한다. 단무지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 다쿠앙의 원래 명칭은 다쿠앙츠케 다시 말해서 다쿠앙이 절인 채소라는 말을 줄여 놓은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에도에 다쿠앙 소오호라는 일본에서 유명한 승려가 잇었다. 다쿠앙 스님은 지금도 도쿄에 남아있는 동해사를 창건했다. 어느 날 막부의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동해사를 방문했을 때 주지인 다쿠앙은 평소 스님들이 먹던 소금과 쌀겨에 절여 두었던 무를 꺼내 이에미쓰한태 주었다. 이에미쓰가 이것을 먹고 다쿠앙이 절인 채소라고 불렀다.

마시멜로

마시멜로는 기워넌 2000년 이전부터 이집트 사람들이 먹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들에게 마시멜로를 제물로 바쳤고 파라오들도 먹었다. 하지만 과자라기보단 의약품에 가까웠다. 나시멜로를 처음먹었던 이집트 사람들은 마시멜로 나무 뿌리에서 추출한 수액을 가공해서 먹었는데 소염 진통 성분이 있었다고 하다. 마시멜로는 19세기루반부터 과자로 바뀌게 된다. 프랑스에서 마시멜로를 켄디처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사탕 제조공장에서 마시멜로 뿌리에서 추출한 수액을 솜사탕을 만드는 틀에다가 넣고 솜사탕을 만드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려가며 마시멜로를 만들어서 팔았다.

느낀점:이책을 읽으면 매우매우 배고파진다. 나도 이 독후감을 쓰기 전에 밥을 먹었는데 지금도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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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포탈 앤딩 봤다!!!!

by 명화 posted May 0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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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2 레고이야기

포탈이라는 스팀 게임을 다 했습니다.

앤딩보고 감동...

포탈한번 해보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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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 2014.05.11 04:34
    나도 여기서 했는데 블라도슨가?불라도슨가 더럽게 쎄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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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2014.05.15 22:15
    글라도스

정우

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면 살인죄 일까

by 명화 posted May 0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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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트에 이름을 쓰면 살인죄일까?

지은이:김자룡

출판사:애플부스

내용:법을 어기는 것을 위법이라고 한다. 그러면 법에서 금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 하면 안되는 일 중에서 사회적으로 용납할수 없는 일이 법에서 하지 말라는 위법이다. 위법을 하면 피해자가 생긴다. 법을 어긴 사람은 자신이 한 일로 생긴 피해를 책임져야 한다. 책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것에 대한 책임이고 또하나는 사회에서 하지 말하는 짓을 했을때에 대한 책임이다. 재산에 피해를 입힌 것은 보상 책임이 따르고 사람을 때리거나 물건을 훔친 것 같은 짓에는 처벌이라는 책임이 따른다. 의법한 일에 대한 책임을 두가지로 나누는 것은 다루는 법률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산 피해는 민법이 담당라고 몹쓸 짓은 형법이 담당한다. 민법은 주로 재산에 관한 일을 다루는 법률이다. 어떤 물건이 누구의 것인지 거리에서 주운 물건을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는지 어떤 사람이 죽으면서 남긴 재산은 누구에게 물려줄 것인지를 모두 민법에서 다룬다. 이런 것에 대한 사건을 민사사건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일로 재판을 하는 것은 민사소송이다.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흉기로 해치거나하는 짓은 형법이 담당한다. 형법은 어떤일이 처벌을 받을 몹쓸짓이고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정해놓은 법이다. 이런 일에 사건을 헝사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런 일로 재판을 하는 것도 형사소송이라고 부른다.

형법<로봇은 살인을 해도 죄가 되지 않을까?>

법적으로는 로봇은 동물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로봇의 주인에게 손해 배상을 받거나 로봇의 지인을 처벌하는 일은 가능할 수도 있다. 단 로봇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로봇은 움직임에 따라서 크게 리모컨형 탑승형 자율형으로 나눌 수 있다. 리모컨 형은 로봇은 리모컨으로 로봇을 조종하는 로봇이다. 탑승형 로봇은 로봇에 직접 사람이 올라카서 조종을 하는 타입으로 자동차와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 탑승형 로봇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조종사가 올라타서 집적 움직여서 시작한다. 에반게리온이라 로봇 태권 v건담등이 여기에 속한다. 리모컨 형이든 탐승형이든 로봇은 조종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이런 로봇으로 사람을 해치거나 재산에 손해를 입히면 탑승자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고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 사람이 로봇을 도구로 사용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운전해서 사람을 일부로 치거나 건물을 부수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하지만 자율형 로봇의 경우는 조금 복잡하다. 자율형은 사람이 조종하지 않아도 로봇이 알아서 움직이는 형태를 말한다. 트랜스포머나 터미네이더가 여기에 속한다. 이 자율형 로봇은 두 가지로 나눌서 있다. 하나는 사전에 프로그램된 대로 행동하는 로봇이다. 이런 로봇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전에 입력해둔 명령대로 동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로봇이 사람을 해치는 경우 재산에 손해를 입히면 로봇의 주인이 손해 배상을 해야한다.

민법<근대민법의 제2원칙>

어떤 사람이 천 만원을 줄 테니 피자 한 판을 배달해 달라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돈을 지불한 사람이 너무 많이 준 것 같다면서 돌려달라고 하면 다시 줘야 할까? 이때는 민법의 두 번째 원칙인 사적자치의 원칙 혹은 계약 자유의 원칙에 의해서 나중에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옆의 사람도 간섭을 할 수가 없다. 개인적인일은 지치 즉 알아서 한다라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것이다. 사적자치의 원칙에 의하면 개인의 재산 거래나 경제 활동도 국가가 이유 없이 간 섭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겨야 한다. 전화로 치킨을 주문하는 것도 계약이다. 치킨을 주문할 것인지 말것인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계약 체경의 자유이다. 치킨 집에서 왜 요즘 주문이 뜸하냐고 항의할 수 없다. 어느 가게에서 주문을 할것인지 자유롭게 결정하는 것은 상대방 선택의 자유이다. 치킨집에 전화를 했더니 내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배달을 거절할수도 있다. 치킨집 주인도 손님을 고를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계약 내용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내용 결정의 자유이다. 또 어떤 방식으로도 계약을 할지 서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방식의 자유다 전화로도 주문할수 있고 문자를 보낼수도 있다.

느낀점: 이책은 법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나 동화 같은 겉들을 같이 써서 매우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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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나무

by 명화 posted Apr 2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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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지은이:베르나르제르제르

출판사:열린 책들

내용:<내겐 너무 좋은 세상>

뤽은 아침에 일어 날 때 자명종이 말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났다. 뤽이 일어나자 슬리퍼들은 알아서 뤽에게 신겨 졌고 문은 인사를 하면서 열렸다. 이 모든 일들은 물건들에게 인간의 대화를 흉내 낼 수 있도록 어떤 컴퓨터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물건들은 처음에 나왔을 때는 간단한 말밖에 할수 없었지만 날수록 발전해서 인간과 대화가 가능해 졌다. 뤽은 이런 물건들이 실증이 났다. 뤽은 아침을 먹다가 물건들이 떠드는 소리에 모두 닥치라고 하였고 조용히 아침을 먹었다. 그러다가 어떤 여자가 왔다. 그 여자는 설문조사를 한다고 해서 뤽이 들여 보냈지만 그녀는 강도 였다. 그녀는 뤽에 집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가 가져가 버렸다. 그사이 뤽이 묵겨 있던 의자는 스스로 떨어서 줄을 느슨하게 만들었고 주머니칼은 조용히 다가와서 줄을 끈었지만 그녀는 이미 가 버렸다. 며칠후 뤽은 다시 그녀을 만났다. 그러자 그녀는 뤽의 가슴을 갈라서 인공 심장을 꺼내어 보였다. 지구상에는 이미 살아 있는 유기체가 존재 하지 않았다. 뤽과 뤽을 시끄럽게 한 기게의 차이점은 뤽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녀는 가면서 뤽한태 꿈에서 깨어 나야 한다고 말했다.

<투명피부>

그는 생체를 투명하게 만드는 문제에 관한 연구를 하는 과학자이다. 그는 생체를 투명하게 할려면 일단 식물들로부터 투명성에 관여하는 유전 암호를 풀어내고 색소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 배열을 다른 식물들한태 대입하여서 투명한 장미나 투명한 살구나무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동물을 상대로 연구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열대어들의 투명성 dna의 염기 서열을 알아내서 투명한 개구리나 투명한 쥐를 만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인간을 투명하게 만들려고 자기 자신한태 실험을 했다. 결과는 성공적으로 되었다. 실험을 하고난 그의 몸은 생물학 강의실에 놓여 있는 인체모형과 비슷 했다. 그가 생각에 몰입을 하면 피가 경동맥을 타고 뇌로 쏠렸고 추위나 더위를 느낄때면 살갗의 모세 혈관 쪽으로 피가 쏠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였다. 그는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려고 연구를 하던 중에 아침이 되어서 청소부가 오자 그 청소부는 기절하고 말았다. 그는 외투와 검은 안경을 쓰는 등 자신의 몸을 가리고 다녔다. 그레도 보이는 부분은 청소부의 화장품으로 가렸다. 그는 갈곳이 없이 걸어다니다가 마그놈이라는 서커스단에 들어 갔다. 그는 그 서커스단에 들어가서 라택스로 된 가짜 피부를 입고 마지막에는 그 가짜 피부를 벗는 공연을 하고 다녔다.

<환혼의 반란>

몇 년 전부터 나라에서는 노인들은 배척하는 운동이 점점 노골화 되고 있었다. 정부도 처음에는 노인들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서 한 사회학자가 사회보장의 적자는 대부분 70세 이상의 노인들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을 증명하므로서 정치인들도 노인들을 공격했다. 학자들의 분석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부는 대폭적인 예산 삭감을 했고 인공 심장의 생산을 중단 시켰다. 그 다음에는 피부와 신장과 간의 내용물을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동결 시키는등 노인들을 죽이는 정책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광고나 의료 보험도 제한을 걸어놓았다. 그러자 정부는 cdpd라는 집단을 만들었는데 정부의 관고는 이 집단은 노인들한태 여행을 시켜 준다는 것이였지만 실상은 노인들을 안락사 시키는 집단이였다. 이들이 노인들을 사냥하자 노인들 중 한사람인 프레드는 cdpd의 버스를 훔쳐서 여려명의 노인들과 동굴에서 흰여우들이라는 집단을 만들고 살았다. 이 사건은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는데 그러자 다른 노인들도 cdpd를 탈출하는 일이 벌어지고 흰여우들에 가입하는 노인들이 많아졌다. 흰여우들의 영향이 커지자 정부는 흰여우들이 살고 있는 산에다가 독감 바이러스를 퍼트려서 흰여우들을 없에기 시작했다. 나중에 경찰이 흰여우들중 살아있는 노인들을 체포하로 갈 때 흐레드도 잡히고 말았다. 프레드한태 안락사 주사를 놓는 cdpd대원은 20세 미만의 젊은이 였는데 흐레드는 죽기 직전에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라는 말을 남겼다.

느낀점:나는 이전에도 나무를 포함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을 여러번 읽어봤지만 이 프랑스 빡빡이는 정말 천재인 것 같다. 또 이책은 내가 긴 조선왕조 실록을 끝내고 처음으로 읽은 책이여서 더욱더 재미 있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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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20권

by 명화 posted Apr 1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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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망국]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동학의 확산과 농민의 각성

동학의 1대 교주였던 최제우는 혹세무민 혐의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철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면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교주가 죽었어도 동학은 없어지지 않고 최시형이 2대 교주가 되었다. 최시형은 흩어진 조직을 모으고 정비하면서 확대하였다. 이때 백성들은 동학을 많이 믿었는데 이는 나라에서 금한 일이여서 수령들은 이것을 수탈의 기회로 삼았다. 그래서 동학의 지도자들은 최시형의 승낙에 의해 1892년 에 신도 1000여 명이 공주에서 모여서 집회를 가졌다. 조도부는 충청 감사 조병식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그래서 고통이 크게 줄었으나 며칠 후 삼례에서 더 큰 집회를 가지고 전라 감사에게 허락을 받을려고 했으나 전라 감사는 권한이 없다고 하여서 고종 30년에 40명의 대표가 상소문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서 상소하였다. 그러나 상소는 되지 않았고 도리어 조정의 적극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동학 지도부들은 온 나라에서 교인들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일은 실재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21894 갑오년

이때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으나 전라도 고부도에 있는 군수 조병갑은 백성들을 계속해서 수탈하였다. 이 지역에는 전봉준이라는 동학 신도가 있었는데 전봉준은 조병갑의 수탈에 분노하여 고종 31년 고부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쉽게 관야를 점령했고 무기고를 열어서 무장했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등 사람들을 모아서 농민군 봉기가 시작되었다. 농민군은 태인과 부안을 점령하고 황토재에서 관군과 싸웠는데 대승을 거둔다. 그리고 나서 전주성도 쉽게 점령한다. 전주가 함략되자 조정은 민영준을 시켜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교섭을 한다은 청에 파병을 요청한다. 그리고 탠진 조약에 따라서 일본한태 통보를 했는데 갑자기 일본도 군대를 보내서 서울까지 온다. 청군과 일본군이 온다는 것을 들은 홍계훈은 외국의 힘을 빌리기 전에 전주 화약을 맺어서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나왔다. 그리나 일본군을 철수하지 않고 경복궁을 점령해서 고종을 협박해서 청나라를 조선에서 내보낸다. 그리고 나서 이틀뒤 청나라의 배를 침몰시켜서 청일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나서 농민군들은 일본군과 여러번 싸웠지만 일본군의 강한 화력 때문에 패배하였다. 일본군한태 패배한 농민군을 해산되었고 고종 323월에 전봉준을 사형에 체해진다. 그리고 나서도 고종 35년에 치시형이 체포되어서 사형에 처해진다.

3장 인아거일

고종 32820일에 파성관과 한성 신보사에는 무장을 한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군과 만나서 훈련데 연대장 홍계훈을 죽이고 궁궐에 침투했디. 일본 군대가 외부와의 통로를 봉쇄한 다음 사복무리들이 명성황후를 찾아서 불태워서 죽였다. 명성황후가 죽은다음에는 단발령이 실시 되었다. 먼저 세자와 고종이 머리를 자른다음 전국적으로 단발령이 실시 되었다. 명성황후가 죽은뒤 석 달도 되지 않고 대원군도 죽었다. 4장 대한제구고과 독립협회

고종 3410월에는 황제 즉위식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명성황후의 장례도 차려 졌다. 황제가 된 고종은 미국에 귀화한 서재필을 불러서 중추원 고문을 맏게 하여서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였다. 세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문을 세우는등 많은 일을 이루었다. 또 독립협회를 만들어서 고종의 뜻과는 다르게 러시아 군대를 해산 시켰다. 이일로 고종은 서재필을 멀리하다가 고문 직책에서 해고 하였다.

5장 스러지는 자주국의 꿈

고종은 계속 러시아의 군사적 보호를 받기 원했지만 러시아는 계속 거절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전쟁이 임박해 지자 각 나라의 군사들이 자국 공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서울로 올라 왔다. 그리고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이 거의 다 이겼긴 하지만 일본과 러시아는 예산 문제로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워 지자 미국이 중재에 나서서 전쟁을 끝냈다. 조선 내에서는 친일파인 이완용등 5명의 대신들을 죽일려는 거사가 일어났다.

6장 왕조는 무너졌으나

고종은 헤이그에서 만국 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준과 이상설을 불러서 헤이그에 가서 조약의 부당함을 알릴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일본은 장미 7조약을 받아낸 다음에 일주일 후에 군대 해산령을 내렸지만 시위대 제1연대 대대장인 박승환이 군대 해산에 항의 한다는 뜻으로 자결을 했다. 이에 분노한 병사들은 무장을 하고 일본근과 총격전을 벌였다. 지방의 군사들도 해산령에 반발해 봉기를 하거나 집단 탈영을 해 의병 부대에 대거 합류했다. 이후 고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고종의 아들은 순종이 황제가 되었다.

느낀점: 이재서야 긴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었다는 것이 매우 뿌듯하고 보람 있었다. 그러나 다음 책을 읽을때 힘들까봐 걱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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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실 2014.04.21 20:00
    명화야~ 조선왕조실록 완독을 축하한다. 식탁에서 자주 만나니 더욱 반갑구나^^

정우

조선왕조실록19권

by 명화 posted Apr 1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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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실록[고종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 대원군의 개혁

고종도 나이가 어려서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인 이하응과 같이 계혁을 하려고 했다.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기 전까지 안동 김씨의 눈에 띄지 않을려고 일부러 파락호처럼 살아왔다. 대원군은 당파와 지역을 따지지 않고 고르게 인재를 등용했다. 그러나 대원군 인사의 핵심은 안동 김씨의 유지와 고른 이내 등용이 아니라 종친,선파의 대거 등용에 있었다. 죄가 있는 이들을 사면하고 종친의 과거 응실제도화 시켰으며 종실 관계도 재조정해서 지위를 격상시켰다. 고종 24월에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다시 짓는다. 그리고 고종 310월에는 당백전이라는 100전자리 돈을 만들었다. 백성들은 이 당백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조 도 난무했다. 경복궁은 고종 5년에 완성되었다.

2장 주화매국의 깃발 아래

대원군은 천주교도 탄압헤서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를 믿는 남종삼 등의 중요인물들을 죽이고 사학 책과 그 판각을 불태웠다. 고종 3년에 평양에서 제너럴 셔먼호라는 배가 교역을 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셔먼호가 계속해서 올라오자 순영중군이 작은 배를 타고 가서 막았으나 잡혀갔다. 이에 분노한 평양 백성들이 중선을 공격해서 중군을 돌려 받았다. 그러나 셔먼호는 돌아가지 않고 상선을 약탈하고 7명을 죽였다. 평안 감사 박규수는 화공으로 셔먼호를 불태웠다. 천주교 탄압에 살아남은 프랑스 신부 리델은 프랑스로 탈출하여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을 찼아가서 조선을 공격했다. 조선 정부도 이를 대응 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족 산성 수성장에인 양헌수가 군사들을 이끌고 기습을 하여서 프랑스 군은 철수했다. 그러나 이때 프랑스군이 보물들을 약탈하고 장녕전 외규장각들의 건물들을 모두 불질러버렸다. 이때 가져간 의궤등 외규장각도서들은 1975년 제프랑스 역사학자인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냈다.

3장 대원군의 실각

고종은 대왕대비의 가르침대로 부지런히 배워서 15살이 돼서 대왕대비가 수렴을 거두고 친정을 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모든 의사 결정은 대원군이 하였다. 고종은 진차 친정을 하고 싶었으나 대원군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고종을 중전 민씨가 도와 주었다. 민씨는 영민한 머리를 가졌고 책읽기를 즐겼다. 특히 역사서를 좋아해서 고금의 나라들과 인물들의 흥망성쇠를 알고 있었다. 고종은 민씨의 도움을 받아서 대원군 측근들을 제거 했다. 당시 무리한 토목공사와 서원 철폐로 인해서 사대부와 백성들에게 원망을 받고 있어서 대원군을 힘을 못스게 하는 것은 쉬웠다.

4장 개항

조선은 대원군 정치로 쇄국정책을 이어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미일화친조약이후 빠르게 개화를 하였다.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등과 연이어서 조약을 맺었고. 강무소를 설치해서 서양식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총포 제작소를 세웠으며 서양에 유학생들을 파견했다. 해군 전습소를 열어서 항해와 조선기술 포술,측량술 등을 익혔으며 그 결과 1860년에 일본인들이 목조 증기선을 조종할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려고 했다. 일본은 윤요호를 강화도에 보내 강화도를 공격하고 갔다. 그러나 일본측에서는 강화도에서 먼저 포를 발사했다고 하면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5장 대화에 대한 저항

개화를 하면서 신식무기를 배우는 군인인 별기군이 생겼는데 훈련도감 군사들의 월급이 밀려있어도 별기군은 월급을 주었다. 훈련도감 병사들이 그나마 받는 급료에도 겨와 모래가 석여 있었다. 이에 분노한 군인들은 백성들과 같이 봉기를 일으켜서 일본인들은 닥치는 대로 습격했다. 그 기새로 돈화문을 통과해서 대궐까지 갔다. 이때 대원군도 이 사건에 개입했다. 이들은 궁궐에서 선혜청 제조 민겸호롸 경기 감사 김보현을 죽이고 민씨를 찾아서 전각을 헤집고 있었다. 이때 대원군이 나타나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갑자기 대원군이 청군한태 납치되었다. 그리고 봉기때 숨어있던 민씨는 청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다시 돌아왔다.

느낀점: 재미있었고 20권을 못읽은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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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2014.04.10 21:00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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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4.04.11 13:57
    명화야 이번주에는 미리미리 스케쥴 잘해서 스스로에게 당당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이모가 너무 늦게 답 보냈지? 주 초에 독려했어야 하는데... 그래 늦게라도 올려줘서 고마워

정우

조선왕조실록 18

by 명화 posted Mar 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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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헌종.철종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

1장 안동 김씨의 천하1

새로 즉위한 헌종의 나이는 여덟 살 밖에 되지 않아 대비인 순조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된다. 순원왕후는 자신의 친정에 의지하여서 수렵청정을 한다. 순원왕후는 헌종이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천주교는 신유사옥과 같은 탄압에도 사라지지 않았는데 천주교의 핵심 인물인 정약종의 아들인 정하상은 교황한태 편지를 써서 조선에 서양인 신부를 파견한다. 그들은 김대건 등을 마카오로 유학도 보냈다. 2년후에 프랑스인 스부도 입국했고 조선 교회 제2대 주교도 입국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이 적발되자 헌종 5년에 서양인 신부와 중요인물 여럿을 처형한다. 헌종 11년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김대건은 신부가 되어서 조선의 3대 주교와 같이 입국하지만 5월달에 걸려서 처형된다.

2장 헌종의 노력

헌종 6년에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을 끝낸다. 헌종은 정권을 안동 김씨가 잡고 자신은 이름뿐인 왕이였다는 걸 알았지만 그런 현실에 무릎 끓지 않았다. 헌종은 안동 김씨들이 있던 주요 자리들을 다른 사람들로 배치하고 안동 김씨들을 재어 했다. 마침 안동 김씨의 실력자인 김유근이 중풍에 걸려 안동 김씨들을 몰라낼수 있었다. 그러나 헌종 15년에 갑자기 죽고 만다.

3장 안동 김씨 천하 2

헌종은 죽을때까지 자식이 없어 가지고 보위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개다가 헌종은 3대 독자여서 헌종의 자식은 물론 정조의 피를 이은 종친도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는 이광의 삼남인 이원범을 왕으로 삼았는데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원군의 아들인 상계군의아들이다. 이원범은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인 이원경은 헌종 10년때 민진용의 역모사건때 이름이 거론되어서 죽고 둘째인 이경응은 살아있었지만 세 살 아래인 막내 이원범이 왕이되어서 철종이 된다. 철종을 왕으로 새운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사람을 왕의에 세워서 안동 김씨가 새력을 이어갈려고 했다는 설도 있다. 철종은 이때까지 읽은 책은 거의 없어서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철종 2년 때부터 자신의 의견을 말하더니 순원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둔다. 그러나 친정이 시작되어도 철종이 할일은 별로 없었다. 철종은 백성출신의 왕답게 수시로 삼정의 문란을 지적하고 수령들에게 경고했지만 힘을 갖지 못했다. 철종이 그나마 할 일을 한 것은 좌안이 있는 사람들을 사면 시킨 것이다.

4장 민란시대

삼정이란 전정과 군정,환정이라는 것인데 전정은 예전부터 부과해왔던 토지세이다. 공납의 폐해를 개혁하기 위해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추가된 대동미와 기타 각종 명목의 잡비가 토지세로 추가되었다. 군정은 군역인데 대동법이 실시된 이후로 가장큰 폐단으로 떠올랐다. 대동법 실시와 면세지의 확대로 나라와 관아들은 세수 부족이 왔고 방납의 례지로 수령과 아전들의 치부의 길이 막혀버렸다. 과다한 군포 징수에 따른 페단이 커지자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 했지만 영조 말에 인징과 족징 등의 폐단이 다시 시작했다. 이것에 분노한 백성들은 마을마다 악질 토호의 집을 습격하고 불을 질르던가 아전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적국적인 봉기처럼 보이지만 마을마다 고립적인 봉기였기 때문에 오래 가지 않았다.

5장 격변의 동아시아

중국은 그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아편 전쟁을 벌이고 패배하였다. 일본은 전쟁 없이 그냥 무역을 했다. 그 후로부터 이양선의 출현도 더욱 많아졌다. 헌종 5,6년에는 영국 배가 포를 소기도 했다. 헌종 12년에 프랑스 배가 와서 무역을 원했는데 조정은 반대를 하였다. 이때는 동학이 만들어 지기도 했는데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는 서학의 대응 하는 뜻으로 동학이라고 이름을 짓고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러나 철종 14년 철종이 죽기 직전 최제우는 제자들과 같이 체포 되고 서울로 압송 된다. 철종 14년에는 철종은 33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느낀점: 재미 있었고 이재 2권만 읽으면 되니까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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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조선왕조실록17권

by 명화 posted Mar 2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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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실록[순조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 정순대비의 수렴청정

새로 왕이된 순조는 11살 밖에 안되서 왕실의 큰 어른인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재비는 임금의 보호자 이기 보다는 정치 지도자처럼 행동했다. 순조 1년에 정순대비는 천주교를 더욱더 잡아 들였다. 정조 시절에 진산사건을 겪고 위축이 되었지만 이때에는 더욱더 확산이 되었다. 이들은 북경 교구에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에싸지 이르렀고 서양인 대신 중국인 신부인 주문모가 들어온다. 이후 더욱더 확대 되면서 이즈음엔 신도가 1만여 명정도 되었다. 정조는 정학에 힘쓰면 천주교가 없어질것이라고 했지만 정순대비는 이것이 실패하였음을 알고 동시다발적으로 검거를 시작했다. 주요인물은 이기환과 권철신은 고문중에 죽고 이승훈과 정약종은 정법되었다. 정약종의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용은 정약종의 집에서 발견된 문서덕분에 혐의를 벗을수 있었고 이치훈과 함께 유배되었다. 피신해 있었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자수를 했다.

2장 시파의 집권과 벽하의 몰락

정순대비는 순조4년인 왕이 15살이 되자 친정을 거둔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죽는다. 정순대비가 죽고 16살이된 순조는 총명했고 조정에 대해서도 얼추 알고 잇었다. 궐에는 70살을 넘긴 혜경궁 홍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무너진 친정의 명예를 되찾겠다는 마음으로 순조한테 지난 역사를 그녀의 시각으로 들려준다. 이로서 홍씨의 친정의 명예를 회복하였다.

3장홍경래의 난

이앙법 보금 등에 따른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화폐경제와 상품경제가 발달하면서 조선 사회의 신분제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자영농에서 부농으로 성장한 평민들은 이제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원했고 하는 방법은 많았다. 이렇게 양반들이 늘면서 농민들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상민 신분의 농민들은 몰락해서 소작농이나 광산 등의 임노동자로 바뀌갔다. 이렇게 살기가 힘들어지자 농민들은 분노가 생겼다. 순조11년 곡산부의 백성 수백명이 몽둥이를 들고 관아에 들어가서 관속들을 때려 누비고 수령의 병부와 인신을 빼앗아서 이웃 고을의 수령한태 바쳤다. 순조 말년에는 서울 도성 안의 백성의 폭동이 있었다. 이 일은 강상 상인이 사들인 쌀이 많아져서 쌀값이 떨어지자 쌀값을 올릴려고 시전 상인들을 지휘하여 가게중 한 곳만 문을 열게 하여서 쌀값이 촉등하였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백성들이 쌀가게를 부수고 불질러 버린 것이다. 이 일로 폭동의 주도자인 7명의 목을 베고 수십명에게 곤장형등의 벌을내렸다. 그러나 시전 상인들은 유배되었고, 강상 상인들에게는 아에 죄를 묻지도 않았다. 이일로 민심이 다시 들끓자 강상 상인과 시전 상인 한명만 사형을 내렸다. 순조11년에 왕은 병을 얻어사 고생하고 있었다. 왕의 병이 다 낳기도 전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 났다. 홍경래는 평양향시에 합격을 한뒤어 서울로 올라와서 대과를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서울 권세가의 자제들만 합격할 것을 본 홍경래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인근의 부자나 지식인, 장사들을 모았다. 무기를 마련한 다음 광산 노동자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서 군사들을 모은뒤 순조 111218일에 출정식을 가졌다. 봉기군들은 가산성을 함략한뒤 싸움 한번도 없이 며칠만에 8개의 고을을 접수했다. 그러나 정주성에서 고립되고 만다. 순조124월에 관군이 성을 함략하면서 난을 평정했다.

4장 임금 순조

순조는 체격이 크고 건장했지만 즉위10년부터 병을 얻었다. 홍경래의 난때도 병중이였다. 홍경래의 난이 준 충격도 켰다. 왕은 차츰 정사의 열의를 잃었고 순조20년부터 경연도 신하들을 불러보는 일도 거의 없었다. 효명새자는 순조9년에 태어나서 네 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순조는 호명세자가 19살이 되자 디리 청정을 시켰다. 세자는 강단이 있고 일처를 잘하였다. 순조도 매우 기뻐하였으나. 순조 30년에 세자는 22살에 죽고 만다. 효명세자가 죽고 난뒤 계속해서 2년뒤 5월에 복온공주가 죽고 6월에는 명온공주가 죽었다. 웃음을 잃은 순조는 341월에 죽고 만다.

느낀점: 이번에는 매우 재미있었고 나중에 순조가 불상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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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4.05 11:31
    조선이 기울어져가는 것이 느껴지네. 순조, 헌종. 철종, 고종.순종? 순인가?
    명화야. 잘 읽었어~^*^
    그 다음 독후감 기대되네~!!!

정우

조선왕조실록13

by 명화 posted Mar 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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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 만년 야당 남인의 집권

현종이 죽자 숙종은 어린 나이에 임금을 했다. 세자 시절부터 반듯한 모습을 보인 숙종은 대비의 수렴 청정도 없이 바로 친정을 시작했다. 정치를 잘 모르는 숙종은 부왕의 신뢰를 받았던 영상 허적과 외척들을 신뢰했다. 그리고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 복평군 이연도 믿었는데 그들은 효종과 현종의 각별한 아낌을 받아서 궁궐에 쉽게 드나들 수 있었고 숙종과도 친하였다. 숙종의 정세 판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바로 이들이였고 그중에서도 지혜롭다는 복선군 이남이였다. 자연스럽게 이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 들어서 위기감이 들은 왕대비 명성왕후는 복창군과 복평군을 정배되게 한다. 그러나 신하들이 석방을 청하자 다시 돌아왔다. 이런 상황을 김석주는 좋게 보지 않았다. 김석주는 김육의 손자이자 김좌명의 아들로 당대에 최고 명문가의 후예라는 유산과 영민한 두뇌를 물려 받았다. 과거에 장원급제 했고 문장도 잘 쓰던 문사이면서 무인으로서의 자질도 뛰어났다.

2장 경신환국과 집권 서인의 분화

숙종 63월에 허적은 조부 허잠의 시호를 받으며 조정 대신들을 불러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비가 왔는데 숙종은 그것을 보고 유약을 갖다 줄 것을 명했으나 허적은 숙종의 허락도 없이 이미 쓰고 있어서 유현연, 김만기, 신여철을 불러 냇다. 그런다음에 유혁연을 해임시키고 김만기를 훈련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승지와 대간들이 서인으로 교체 되었다. 이렇게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 졌다. 병권이 교체된 다음에 복선군과 허견이 반역을 한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로써 이 둘은 죽었으면서 자식을 잘못 둔 죄로 허적과 윤휴도 사사되었다. 그 뒤로도 남인 사람들 여려명이 사사되었다.

3장 당쟁과 궁중 암투

김민기의 딸인 인경왕후가 숙족 6년에 죽자 다음해에 새로 후비를 들이는데 노론 핵심인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이다. 그런데 인경왕가 죽고 인현왕후가 들어오기 전인 6개월 사이에 장희빈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왕대비인 명성왕후가 내쫓는다. 명성왕후가 숙종9년에 죽자 장씨를 다시 불러들인다. 왕이 인현왕후보다 장시를 더 좋아하자 인현왕후는 그를 경계하였다. 그런데도 인현왕후는 왕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고 숙종 14년에 장씨는 왕자를 낳는다.

4장 위기의 세자

갑술환국으로 정권이 교체 되면서 폐비되었던 인현왕후를 다시 궁전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중전이였던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 시켜서 별당으로 옮기게 했다.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했고 그러던 참에 인현왕후가 병에 걸려서 죽고 만다. 이모든 일이 장씨가 한일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장씨는 죽게 된다. 세자는 몸이 허약했고 성격이 소시했으며 말수가 적었다. 이런 세자가 미덥지 못한 왕은 세자를 교체할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546년 숙종시대

청정을 하는 세자는 늘 피곤해 보였다. 말도 벌로 하지 않고 하는 말도 정해져 있었다. 숙종은 눈이 거의 안보인체로 몇 년을 더살다가 배가 점점 불러오더니 숙종 46년에 죽고 만다.

느낀점: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잘 못 쓴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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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6

by 명화 posted Mar 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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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 세손시절

정조는 어린시절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고 권력이 얼마나 무섭고 비정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사도세자가 죽은지 4일만에 영조의 안부를 물어봐서 긍정적인 답을 얻었다.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 꼴이 나지 않을려고 성실히 공부를 하고 영조한태 효성을 보여서 영조의 기대에 부응했다. 영조가 늟어서 조정에 대해 힘이 없어지자 조정은 노론 천하가 되었다. 노론 사신들은 정조를 없에 버릴 려고 했으나 실패 하였다. 그리고 영조는 대리청정을 맡긴지 3달만에 죽었다.

2장 숙청과 반발

310일 즉위식날 정조는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신로들은 공포에 떨었다. 정조는 즉위를 하고나서 사도세자에 대해서 한 단계 높였다. 사도세자는 장헌 세자로 고치고 묘소인 수은묘는 영우원으로 고쳤으며 사당은 경모궁이라고 붙였다. 영조는 홍국영이라는 일등 공신이 있었는데 정조는 홍국영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를 빈으로 간택되게 해서 영원한 영화를 누릴려 했으나 빈은 1년만에 죽고 만다. 그러나 홍국영은 멈추지 않고 은언군 이인의 아들 상계군은 빈의 양자로 삼게 하고 군호도 완풍군으로 고쳤다. 정조는 이러한 홍국영을 유배시켰고 홍국영은 정조 5년에 강릉에서 죽는다.

3장 의리 탕평의 길

정조때도 역모 사건이 많았는데 송덕상의 제자인 문안방이 거사를 일으킬려고 하자 박서집이란 자가 고변을 해서 거사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문안방의 스승인 송덕상도 유배지에서 하옥되었다가. 울분과 노환으로 죽었다. 정조 9년에는 문양해라는 사람이 가상의 신인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이일로 열 명 이상이 복주되고 끝났다.

4장 사도세자 추숭을 둘러싸고

정조13년에 박명원이라는 자가 상소를 올려서 사도세자의 묘의 천장을 청했다. 신하들도 기꺼이 동의를 해서 화성으로 묘가 옴겨 졌다. 이후에 정조는 한강에 배다리를 건너서 화성에 찾았고 사도세자의 묘를 많이 찾았다. 정조 16년에 일군의 영남 유생들이 상경을 해서 무려 만명이 넘는 유생들이 상소를올리는데 이것이 유명한 영남만인소이다. 그리고 이때쯤 정조의 몸도 병들고 급격히 노쇠해 갔다.

5장 개혁전 유학 군주

정조가 왕위에 있었을 때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미국인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프랑스 혁명도 일어났다. 이때 중국은 서양의 상인과 선교사들이 많이 살았는데 상당수의 유자들이 조선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재야이거나 조정에 있지 않은 사람들 이였다. 조선 후기의 조정은 서울과 경기 호서 출신들이 지배했는데 영조조에 와서는 서울의 독무대로 변해갔다. 정조 24년에 머리와 등에 종기가 돋았다. 그 후로부터 계속해서 정조는 건강을 잃어갔고 결국 그 해에 죽고 만다.

느낀점: 이책은 재미 있게 읽어서 매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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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3.21 17:10
    명화덕분에 정조시대의 세계사가까지 알게 되었네. 서양은 큰 변혁이 일어났구나.
    영국의 산업혁명, 미국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 우리 조선은 어땠는지 알게되어 고마우이~^*^

    다음 글 기대된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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