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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2

by 명화 posted Dec 2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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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2

지은이:박경철

출판사:리더스북

내용:

세상이 미쳤다.

요즘 세상이 미쳤다. 이것은 요즘 들어서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 주제이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돈이 절대화두이다. 예전처럼 최영 장국의 노래를 읊조렸다간 얼간이 취급받기 일쑤이고 위에서건 아래에서건 해먹을 수 있는 만큼 해먹지 못하면 팔불출 소리를 듣는다. 심지어는 의료문제에까지 경제논리로 접근해서 영리법인을 허용한 병원이 만들어지고 있는 지경이다. 그래서 요즘 들어서 내 진료실에서는 보험문제 때문에 잦은 다툼이 벌어진다. 우리병원은 치질수술이 많다보니 환자가 평소에 가입한 보험에서 진표비와 수술비를 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막상 보험금을 얻기 위해서 절차를 밟다보면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약관내용들 때문에 환자들은 수술명을 큰 걸로 고치거나 입원기간을 길게 조정해서 진단서를 다시 끊어달라고 요청한다, 사실 요즘 일선 위사가 겪는 일 중에 이런 일은 거의 일상에 가깝다. 그러나 이세상이 진짜로 미쳤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것이 돈보다 사람일 때이다.

억울한 죽음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느 날 검찰에서 검시 요청이 와서 검안을 나갔다. 사실 검찰이나 경찰의 검안 요청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내가 외과의사라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누군가의 시신을 살피거나 만지고 싶지는 않다. 특히 가매장한 묘소에서 사망한지 한달도 넘은 시신을 부검한다거나 혹은 어딘가에서 방치되어 있던 오래된 시신을 살펴야 하는 날에는 최소한 일주일 정도는 음식을 제대로 넘기기 어려울 만큼 힘들다. 그런데 이번에도 연락하는 폼이 심상치 않았다. 검안실에 도착하니 담당 경찰관과 검사가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분들도 인상이 좋지 않은 것을 봐서 심상치 않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부검실에 들어가서 시신을 보니 도저히 얼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여자로 보이는 시신이 한 구 들어 있었다. 부검 결과는 무려 9군데의 골절상과 30여 군데의 자상 목의 교상과 전신타박상 그리고 익사였다. 이것은 사람을 잔인하게 구타하고 칼로 찌르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직 생명이 남아 있을 때 강물에 던져버린 것을 의미한다. 시신은 인근 하천의 하류에서 3일 만에 발견된 것이다. 그 일이 있기전에 내가 있던 도시의 지역방송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실종되었다는 사건을 본적이 있다. 나는 방송을 보면서 나쁜 일만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날 내가 부검한 시신의 바로 그 아이의 엄마였던 것이다. 훗날 범인이 잡히자 범인들은 아이 엄마가 차를 느리게 몰아서 화가나서 죽였다고 한다. 나는 그대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 분노를 다스리기가 힘들다.

 느낀점: 재미는 있었는데 전편처럼 재미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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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5.01.11 01:36
    원래 2편은 항상 그렇지.... 1편에 임팩트 있는 것들을 담으니까....

정우

시골의사의 아름다운동행

by 명화 posted Dec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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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지은이:박경철

출판사:리더스 북

내용사명과 신념 사이에서

신념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종교에 관한 신념은 곧 잘 죽음의 형태로 이여진다몇 년 전에 어느 지방 종합 병원에 파견을 나가 있었던 날적이 있었다어느날 등산을 하다가 멧돼지로 오인한 사냥꾼의 총격을 받아서 피투성이가 된 환자가 실려 왔다. 수십 발의 탄환은 그의 배와 가슴을 뚫고 후복벽과 신장 폐 등에 박혔고 탄환이 지나간 자리에서는 압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출혈이 계속되었다. 이럴 때에는 괜히 어설프게 치료하지 말고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나는 환자의 양팔에 급히 수액을 달고 응급약을 추여한 후 수혈을 시작하면서 앰뷸런스로 환자를 옮겼다환자의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나는 앰퓰런스의 옆자리에 탔고 파견나온 인턴 선생은 환자 가족과 함께 뒷자리에 탔다나는 대학병원에 가면서 인턴 선생한태 10분마다 환자의 혈압과 맥박을 체크하고 혈액 팩이 비면 새로운 수혈팩으로 교체할 것을 지시했다대학병원으로 가던 중 뒤를 돌아보니 인턴 선생은 혈액팩이 비여 있는 대도 혈액팩을 교체하지 않고 계속 링거액만 바꾸고 있었다나는 일딴 급한 마음으로 인천 선생을 옆으로 밀어내고 수액병을 얼른  혈액팩으로 교체하고 대학병원에 도착할때까지 직접 환자를 옆에서 지켰다우여곡절 끝에 출혈하는 만큼 수혈이 이루어 졌고 미리 연락은 한 대학에서는 우리가 도착할 때쯤 이미 수술 준비가 끝나 있었다나는 환자가 수술실로 가자 후배들이 있는 의사휴게실에서 한 후배한태 인턴의 얘기를 하자 그 후배는 그 인턴은 종교 때문에 수혈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나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의 뺨을 때렸다그리고 얼마 뒤 일곱 살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응급실로 들어왔다. 상태가 위급해서 수술을 해야하는데 그 아이의 위급한 상황을 보면서 안절부절 못하는 아이의 부모가 완강하게 수혈을 거부한 것이다수혈의 필요성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납득하지 못했다그래서 우리는 아이의 부모한태는 수혈을 하지 않는다고 하고 수혈을 했다수술을 하고 난뒤 아이의 상태는 좋아졌다그런데 아이가 퇴원을 할 때 아이의 부모가 퇴원비 계산서에 써져 있는 수혈을 받은 것을 발견하엿다나는 아이가 수혈을 했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썻는데 어덯게 아이의 부모가 알아냈는지을 알아보았더니 그 인턴이 아이의 부모에게 알려주었던것이다나는 그때 엄청 화가나서 그 인턴을 징계위원회 소집을 요구할 정도로 화가 났다나는 화를 가라앉히고 인턴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인턴과 이야기를 나눈후 나는 그녀의 오류를 그쯤에서 덮고 그녀가 외과나 내과처럼 수혈을 하지 않는 전공을 택하지 않는 조건으로 더 이상 그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환자가 위험한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사로서 수혈 거부라는 종교적 신념과 맞닥뜨릴 때 의사는 과연 무엇을 먼저 존중해야 할까

새옹지우

영양 할아버지는 한두 달쯤 전에 우리 병원에 오셨다영양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할아버지 이신데 집에서 키우는 소가 어느날 할아버지를 들이받아서 우측 갈비뼈가 네 개나 부러지고 폐 속에 피가 차는 폐혈흉이 되어서 우리 병원에 오셨다할아버지는 병원으로 오시면서 계속 화가 나서 망할놈의 소를 잡아 먹어야 한다고 중얼거리셨다할아버지는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국소마취를 하고 가슴에 구멍을 내는 수술을 잘 차마으셨다그러나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수술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소를 욕하였다그런데 할아버지의 수술이 있고 이틀후 수술을 했던 친구가 아침에 할아버지가슴 사진을 들고 내 방에 와서 폐에 고인 피가 다 빠졌는지 알아보려고 사진을 찍었는데 좌측폐에 암 덩어리가 있다는 것이다우리는 즉시 대구 동산병원에 연학을하고 다음날 바로 할아버지를 후송했다할아버지는 갈비뼈가 부런진 채로 혈흉으로 인한 호스가 그냥 박힌 채로폐암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폐암은 대부분 수술을 하나마나한 병이여서 초기인 폐암1기때 수술을 하지않으면 수술을 해도 구명하기가 가장어려운 암 중 하나이다그러나 할아버지는 다행이 1기였다만약 소불에 받치지 않았다면 내 년 초쯤이면 벌써 말기 암 환자가 되어계실 일이었다.

 그 후 영양 할아버지는 건강해 지셔서 가끔씩 영양고추를 가져 오신다이렇게 병원이란 울다가 웃다가 슬프다가 기쁘다가 하는 곳이다.

느낀점:이책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두 이야기만 써보았다재미있었고 다음 책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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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사 인물 이야기

by 명화 posted Dec 0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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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사 인물 이야기

지은이:김상훈

출판사:

내용:1장 고대시대

단군

기원전 2333년 단군은 청동으로 된 검과 거울과 방울을 가지고 내려오고 평양성에 고조선을 세웠다. 그는 150년간 고조선을 통치했고 1908세에 산신이 되었다고 삼국유사에 써져있다. 이 말을 풀어서 신화적 내용을 더 자새히 보면 고조선을 건국한 시기가 청동기 시대라는 것을 알수 있다. 또 단군이 150년을 총치했다는 것은 단군이 한명이 아니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왕정 시대에서는 왕은 통치자가 바뀌어도 호칭은 바귀지 않는다 단군 또한 같은 원리로 당시에 고조선에서는 최고 통치자를 단군왕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단군은 제사장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가리키는 호칭이였다.이 호칭을 통해서 고조선이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 사회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곧 멸방하고 새롭게 한나라가 들어슨다. 기원전206년 제후국인 연나라가 한나라에게 반란을 일으켰어 그틈을 타 연나라의 장수인 위만이 천여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했다.

위만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신임해서 국경을 경비하는 일을 맡겼다. 위만은 열심히 일을 했고 점점 그의 권력은 강력해 졌다. 그러다보니 야심이 생겼고 기원전194년에 위만은 반란을 일으켜서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위만은 왕검성을 수도로 삼고 나라이름을 고조선에서 위만조선으로 바꾸었다. 위만조선은 중국의 진나라고 한나라로 교체되서 시기에 그 기회를 노려서 주변의 이민족들을 제압하고 무역을 통해서 강국으로 성장해 나갔다.

2장 남북국 시대

대조영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강제로 여러 지역에 분산 수용을 하였다. 이 정책에 따라서 많은 고구려인들이 요하 서쪽의 영주로 이주했다. 그곳에는 거란족과 말갈족이 살고 있었는데 거란족은 696년에 당나라한태 반란을 일으켰다. 그 틈에 고구려 유민들은 걸걸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이 탈출을 감행했다. 그들은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족으로 가서 천문령에 도착했다. 그곳에 대조영은 군사들을 매복시킨후 당나라 군사들과 싸워서 대승을 거뒀다. 대조영은 오늘의 지린성인 동모산에 도착해서 698년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재도영이 발해를 세우기 17년 전에 신라에서는 31대왕인 신문왕이 왕이 되었다

신문왕

통일신라는 해야할 일이 많이 있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것을 막을려면 귀족들의 권력을 잘 통제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잘 대리고 있어야 했다. 신문왕은 이런 문제들을 잘 풀어나갔다. 신문왕은 먼저 정치 체제부터 정비하였다. 귀족들의 회의체인 화백회의를 약화시키고 왕의 직속기관인 집사부를 강화시켰다. 신문왕은 또 자신의 측근드을 장군으로 임명해서 군대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개혁으로 689년에 녹읍제도를 폐지했다. 녹읍을 폐지하는 대신 현직 관료들에게 관료전이라고 땅을 주었다. 신문왕 덕분에 통일신라는 한동안 태평성대의 시대가 열렸다.

3장 고려시대

왕건

고려의 태조 왕건은 송악 호족 왕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왕륭은 궁예에게 송악을 내주고 부하가 되엇다.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인품도 좋아서 궁예도 왕건을 신임해서 913년 시중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궁예가 폭군으로 변하자 918년 호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성공하여서 나라이름은 고려로 정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했다. 다음해에 왕건은 송악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리고 호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해서 927년에 후백제의 왕인 견휜은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습격해서 경애왕에게 자결을 명하고 경순왕을 신라의 왕으로 앉혔다. 왕건은 신라를 도우로 기병부대를 보냈 공산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후백제가 대승을 이루고 말았다. 하지만 930년에 고창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신라는 935년에 고려에 항복했고 936년에 후백제를 공격해서 한반도를 통일했다. 왕건은 한반도를 통일하였지만 아직까진 호족의 세력이 아주 강했다. 그로부터 왕건이 강력해진 것은 4대 국왕인 광종 때부터이다

광종

광종은 949년에 왕이 되었다. 광종은 개혁을 원했지만 아직까지는 호족들의 세력이 커서 7년동안 개혁을 준비하다가 956년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했다. 노비안검법은 전쟁기간에 노비로 전락한 평민들을 모두 풀어주라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 때문에 호족들에게는 타격이 컸다. 그리고 958년에 과거제도를 실시하여서 호족들의 권력을 약하게 만들었다.

4장 조선시대

이성계

1392년에 이성계는 새 나라을 건국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새 나라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새 나라의 정비 작업에 들어가서 다음해인 1393년 태조는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새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고 지었고 1394년에선 한양에 왕궁을 짓고 천도하였다. 나라정비가 대충 끝나자 이성계는 개국 공신들에게 막대한 땅과 노비를 주었다. 이성계는 둘째 부인이 낳은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정실부인의 자식들이 반발하엿는데 특히 다섯재인 방원의 반발이 가장 컸다. 그라나 정도전은 이성계를 지지했다. 정도전은 재상을 중심으로 한 왕도정치를 꿈꾸고 있어서 그런 인물로는 방석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5장 근, 현대사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가 출법했어 김영삼의 슬로건은 문민정부이였다. 그해 8월 김영삼 정부는 금융실명제를 시행했다. 이것은 자기이름으로만 은행 거래를 할수 있는 제도이다. 김영삼 정부의 말기인 1997년 한국의 경제가 무너졌다. 대기업들은 잇달아서 부도를 맞았고 와환 보유고는 없어져 버렸다 국민들은 김영삼 정부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 다음 대통령인 김대중의 슬로건은 국민의 정부였다. 2003년 2월에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였다. 슬로건은 참여정부이였다. 노무현은 개혁주의자여서 여러가지 분야에 개혁을 밀어붙여씨만 그 과정에서 갈등이 많아서 결국 탄핵 소추안이 발의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졌다. 

느낀점:마지막에는 조금 급하게 썼지만 재미있는 책이였고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이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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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의 탄생과 멘델

by 명화 posted Nov 2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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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학의 탄생과 멘델

지은이:에드워드 에델슨

출판사:바다출판사

내용:8841월에 지금의 체코공화국 소속인 브르노 시의 지역 신문에서는 브르노 수도원의 대수도 원장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부고란에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대수도원장 그레고르 멘델이 벌을 키우며 여러 종류의 꽃들, 틱히 아름답게 만발한 수령초를 키우던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멘델이 죽고나서 25년 뒤인 1910년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브르노 수도원의 야외 광장에서 모였는데 그들은 멘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그 광장을 멘델 광장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그를 기념하는 동상도 세워졌다. 멘델은 살아서는 가치를 받지 못했던 식물 잡종에 대한 연구는 죽은 멘델을 새로운 경의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전에 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발표하려던 과학자들은 의례적으로 참고 문헌을 뒤졌다. 그러다가 그들은 멘델이 30년이나 앞서서 이미 똑같은 발견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멘델은 자신의 연구 결과들을 숨기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연구 결과를 다룬 논문을 과학 잡지에 투고했었고 40부의 논문을 여러 연구소와 과학자들에게 보냈으나 무시당했었다. 멘델이 살아 있었을 적의 과학 수준은 유전에 대한 멘델의 접근을 높이 평가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멘델은 822722일에 합스부르그 제국 실레지아 지방의 한시세 마을에 사는 농부 안톤 멘델의 아들로 태어났다. 멘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전쟁 때 오스트리아의 군인이었다. 그는 아들이 태어날 때 작은 밭을 경작하면서 과일나무를 재배하고 벌을 키웠다. 그는 나무로 된 집을 벽돌로 다시 지을 만큼의 돈도 충분히 있었고 두 마리의 말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멘델의 집안은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멘델의 아버지는 19세기 초에 남아 있던 봉건제도에 따라 일주일에 사흘은 영주를 위해서 일해야 했는데 그 중 반은 말떼를 먹이면서 시간을 보냈다. 멘델이 태어난 힌시세 마을에는 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힌시세의 주인인 제일 백작부인은 자기 영토 안에 사는 어린아이들이 교욱을 시키는 일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어린 멘델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자 마을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은 멘델이 아주 영리하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1833년에 힌시세에서 25킬로미터 덜어진 리프닉에 있는 상급 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도와주었다. 멘델은 새로 입학한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 했고 그 다음해에는 집에서 36킬로미터 떨어진 오파마에 있는 김나지움으로 전학했다. 그러나 멘델의 집은 돈이 많은 상태가 아니어서 멘델은 동료 학생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면서 학비나 용돈을 스스로 벌었다. 멘델은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서 물리학 수업을 담당한 카톨릭 성직자 프란츠 교수를 만난다. 그 당시 멘델은 학업과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프란츠 교수는 수도원으로 들어와서 공부를 계속 하라고 했다. 멘델은 스물한 살이 되던 해인 1843년에 수련수사로 수도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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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by 명화 posted Nov 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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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지은이:혜민

출판사:쌤앤파커스

내용:1강 휴식의 장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지금 한번 노트에 쭉 적어 보세요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도 한번 쭉 적어보세요

그리고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할 거다 생각하시고 오늘 밤은 그냥 푹 쉬세요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나의 몸과 마음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준비가 잘되어 있을 거예요

진짜입니다.

 

내가 저지를 실수 대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완벽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실수를 통해 삶이라는 학교가 우리에게 지금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배우면 그만큼 더 성장합니다.

토닥토닥

 

살짝 노는 듯이 열심히 하는 친구들이 사실 일은 더욱 능률적으로 잘합니다

열심히 죽어라 일만 하는 사람은 일이 즐거움 없이 스트레스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도 새상은 잘만 돌아갑니다

놓으세요

나 없으면 안 될 거라는 그 마음

 

2강 관계의 장

싫어하는 사람을 내 가슴속에 넣어두고 다닐 만큼 그 사람이 가치가 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나를 응원하는 친구만 마음에 넣어두십시오

싫어하는 사람 넣어두고 다니면 마음병만 얻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일로 삐친 후

아주 그럴듯한 논리적 이유를 가져와서 그 사람을 칩니다.

 

나를 낯추면 세상이 나를 높여주고 나를 높이면 세상이 나를 낮춥니다

깨달음의 정상에 올랐을 때 비로소 알게 됩나다

그 정상이 낮아지면서 원래부터가 내 이웃과 똑같은 눈높이였다는 것을

 

몇 백 몇 천만 우너짜리 명품 가방을 가지고 다니면 뭐하나요 사람이 명품이 아니라면

 

인간관계에서 생긴 문제를 풀 때

왜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까 왜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가

이런 마음에서 출발하면 문제는 절대 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대에 대한 이해가 아닌 나의 요구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왜 상대가 나에 대해 저렇게 생각하는지 나의 어떤 면 때문에 오해를 했고 힘들어하는지

이런 관점에서 출발하면 상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생각보다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는 난로처럼 대해야 합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3강 미래의 장

젊은 그대여

잠간의 뒤처짐에 열등감으로 가슴 아파하지 마세요

삶은 당신 친구들과의 경쟁이 아닌 나 자신과 벌이는 장기 레이스입니다

친구들을 무조건 앞지르려고만 하지 말고

차라리 그 시간에 나만의 아름다운 색깔과 열정을 찾으세요

 

공부 잘해서 시험 잘 보는 것만이 지성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을 공감하며 같이 느낄 즐 아는 것도 지성입니다.

 

그냥 소신 있게 밀고 나가요 원래 세상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거든요

소수의 비판에 두려워서 지금 내 의견을 말하지 낳는 것이라면 좀 그렇잖아요

적이 몇 명 생길 수도 있겠지만 나를 더 많이 아겨주는 사람들도 이번 계기로 훨씬더 많이 생길 거예요

느낀점: 이책은 매우 재미 있어서 우리 엄마도 읽었다. 엄마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셨는데 나보다 잘쓰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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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 인들

by 명화 posted Nov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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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지은이:장하준

출판사:부키

내용:1장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다시 읽기

도요타는 원레 방직기 제조사 였는데 1933년에 자동차 회사로 바꿧다. 일본 정부는 1939년에 gm과 포드를 규제해 몰아내고 1949는 일본은행에서 돈을 끌어서 도요타를 부도 위기에서 구했다. 그러다 1958년에 도요타는 도요펫이라는 자동차를 만들어서 수출했는데 실패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은 도요타를 다시 방직 회사로 바꾸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도요타는 도요펫이 물러난지 50년 만에 고급 승용차인 렉서스를 수출했는데 이 차는 성공 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토머스 프리먼이 쓴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라는 책 덕분이었다. 이책의 제목은 프리드먼이 1992년에 일본 여행 중에 신칸센 고속열파에서 얻은 깨달음과 관련이 있다. 당시 프리드먼은 도요타 시에 위치한 렉서스 공장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상태에서 도쿄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우연히 신문에서 자신이 오랫동안 특파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던 중동의 분쟁 관련 기사를 읽었는데 그 순간 한 가지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세상의 절반은 세계화 체제에서 성공 하기 위해 자국의 경재를 현대화 하고 능률화 하고 민영화 하면서 보다 나은 렉서스를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반면에 세상의 나머지 절반은 누가 어던 올리브 나무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싸움에 열중해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1960년대 초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의 말을 따랏다면 렉서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프리드먼의 충고에 따랐다면 지금 렉서스를 수출하자는 국민이 아니라 누가 뽕나무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싸우는 국민이 되었을 것이다.

2장 다니엘 디포의 이중생활

로빈슨 크루소를 쓴 다니엘 디포의 인생은 다채로웠다. 그는 소설을 쓰기 전에는 모직물과 양말 포도주나 담배를 수입하는 사업가였고 왕립복권회사의 주택의 창문 수에 다라 재산세를 징수하던 악명 높은 창호세 사무소 같은 정부 기관에 서도 일했다. 또 정치에서 정부의 스파이 일도 했다. 디포는 경제학자로도 활동했는데 경제학자로서 그의 활동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가쓴 소설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슨 주요 경제 저작인 영국 상업 발전 계획은 거의 잊혀져 있다. 널리 읽히는 리처드 웨스트의 디포 전기에는 이 책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그러나 이 책은 튜더 왕조의 산업 정책에 대한 심층적이면서 통찰력 잇는 설명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디포에 따르면 헬리 7세는 특사를 보내 모직물 제조에 알맞은 입지를 찾게 했고 앞서서는 에드워드3세가 했듯이 저지대국에서 숙련된 기술자들을 빼내 왔다. 디포가 강조하고 있듯 헨리7세는 영국의 모직물 생산자들이 제지대국의 숙련된 경쟁자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은 품고 있지 않았다. 경제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흔히 디포가 쓴 소설의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를 신자유주의적 자유 시장 경제학의 영웅인 합리적 경제인의 원형으로 거론하곤 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크루소는 혼자 살면서 늘 경제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디포의 경제학 책을 뒷받침하는 경제학은 로빈슨크루소의 경제 학과 완전히 반대된다. 디포는 경재학 책을 통해 영국의 모직물 제조업을 발전시킨 것은 자유 시장이 아니라 정부의 보호와 보조금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3장 여섯 살 먹은 내 아들은 일자리를 구해아 한다!

나한태는 여섯 살 난 아들이 있다. 이름은 진규인대 아들은 나에게 의존하면서 생활하고 있지만 스스로 생활비를 벌 충분한 능력이 있다. 나는 아들의 의식주 비용과 교육 및 의료 비용을 지불하고 있지만 내 아들 도래의 아이들 수백만 명은 벌써부터 일을 하고 있다. 이러면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욕을 할 것이다. 내가 여섯 살 먹은 아이를 노동 시장에 몰아넣는다면 아이는 약삭바른 구두닦이 소년이 될 수도 있고 돈 잘 버는 행상이 될수도 있다. 나의 이런 터무니 없는 주장은 개발도상국에는급속하고 있고 대대적인 무역 자유화가 필요하다는 자유 무역주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일피한다. 이들은 개발도상국의 생산자들이 생존을 위해 자신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려는 동기를 가질 수 있도록 지금 당장 가능한 많이 경쟁에 노출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호는 안이함과 나태함을 유발할 뿐이므로 경쟁에 노출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경제 발전에 더많은 도움이 된다. 개발도상국의 산업 역시 너무 일찍부터 국제적인 경쟁에 노출되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선진 기술을 익히고 효율적인 조직을 만드는 등의 능력을 키워 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유치산업 이론의 핵심이다.

느낀점:이책은 내가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뭘 읽는지 모르갰고 이 독후감을 쓰면서도 내가 무슨 소리를 쓰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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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

by 명화 posted Nov 0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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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

지은이:조국

출판사:다산북스

내용:01호모아카데미쿠스

어릴 시절에 나는 공부를 좋아했고 잘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내가 어릴때는 공부를 미친 듯이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래아이들 보다 학교를 빨리 갔는데 그 이유는 영재 같은 것이 아니고 동내에서 놀던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가서 나도 같이 학교를 갔다. 학교에 가보니 교과서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내이름이 특이해서 인지 선생님들이 문제를 불라고 많이 해서 공부를 즐기게 되었다. 오늘날 학벌 사회의 위력을 잘 아는 부모들은 자식들이 그 꼭대기에 올라가길 원한다.그레서 유치원때부터 선행학습을 시킨다. 그러나 나 자신과 딸 아들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선행학습은 비용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아이가 학교 수업에 호기심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학원에서 미리 배운 학생의 상당수가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착각하고 수업에 임하니 학교 수업의 성과가 좋을 리가 없다. 내가 법대에 진학한 것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나는 논리적 사고로 뭔가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강한 흥미를 느꼈다. 당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법대에 진학하는 분워기가 있어서 그 영향을 받은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대 진학을 확신하게 된 것은 티비 드라며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이였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본 후 논리적 토론을 벌이고 공부하는 것에 로망을 느꼈다. 어쩌면 다른 이유보다 이것이 먼져였는지 모른다. 수학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논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법학 수업장면이 마치 수학 문제를 풀어가는 것처럼 흥미로워 보였다. 그러나 법대는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달랐다. 특히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을 접하면서 법학 공부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졌다.

02호모래지스탕스

나는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학년이 바뀔 때마다 반장이나 학생회 간부 등을 많이 맡았다. 특별히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주를 잘하는 모범생이라는 이유가 대부분이었다.그 시기에 학생 간부의 역할은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다른 학생들을 관리하는 것이였다. 그 때에는 리더가 뭔가 하자고 했을 때 의문을 제기하거나 다른 의견을 말하면 반항의 뜻으로 보았다. 대학에 합격한 1982년에 고향인 부산을 떠나서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캠퍼스의 낭만을 기대했지만 법대의 현실은 드라마와 많이 달랐다. 교수의 강의 중심으로 진행되는 수업방식의 차이도 그렇지만 그때는 강의실에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유와 비판의 공간이어야 할 캠퍼스에는 늘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나는 법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사법고시를 봐서 판사가 되겠다는 고교시절의 꿈은 점점 없어져 갔다.

03호모쥬리디쿠스

나는 1994년에 미국 유학을 더났다. 내가 공부한 곳은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이다.버클리 로스쿨은 높은 수준에 비해 학비는 동부 아이비리그 사립 로스쿨보다 훨씬싸다. 수업 시간의 광경은 우리나라와 는 달랐다. 교수님은 반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수들이 최고 실력자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수업분위기도 달라서 힉생들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기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수업을 끌고 나갔다. 나는 버클리에서 정말열심히 공부했다. 매일 도서관에 처박혀서 판례와 논문을 쌓아두고 스스로 정한 공부의 할당량을 채워나갔다. 나는 대학 시절에는 형사버이 싫었다. 수업도 많이 빼먹었고 관심이 없는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원 입학 후 멘토 교수님과 선배님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싫어하던 과목들은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형사법을 한국 사회 현실과 연결시켜 파악하고 변화의 방향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공부를 ᅟᅡᇂ다 보니까 점점 재미 있게 느껴졌다.

04호모엠파티쿠스

우리는 대부분을 노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육체노동이건 지식노동이건 사무실이건 공장이건 상관없이 일하라 거는 사람보다 임대료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을리는 없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노동하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동자라는 호칭을 꺼려한다. 중국 중남 대학 천뤼 교수는 자녀에게 공푸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공사장에 데리고 가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노동자를 가리치며 겁을 주는 중국 부모들을 비판한다. 노동자가 뭉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서 모래알이 될 때 자본과 기업의 논리는 일방적으로 관철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 헌버과 법률른 단결권을 보장한 것이다.

느낀점:재미있었는데 몰아서 쓰다 보니까 내가 뭔소리를 쓴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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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4.11.10 11:31
    그래도 정우야 약속지키고 열심히 써줘서 고맙다. 우리 정우 글쓰는 실력이 나날이 늘어서 좋네... 잘했어.

정우

서민의 기생출 열전

by 명화 posted Nov 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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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기생출 열전

지은이:서민

출판사:을유문화사

내용:

1.기생충 살펴보기

한 생물체가 다른 종의 생물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데 그것이 서로 다 이득을 보는 관계이면 공생이라고 하고 한쪽만 이득을 보는 관계에서 이득을 보는 생물체를 기생충 손해를 보는 생물체를 숙주라고 한다. 이관계 는 영구적일 수도 있고 일시적일 수도 있는다. 기생충이 다른 생물체에 기생을 하는 이유는 오직 자손의 번식인 듯하다. 목적이 자손의 번식이여서 기생충들은 웬만하면 숙주를 괴롭히지 않는다. 죽는 날가지 살아야 할 터전을 망가뜨리는 것은 기생충으로서도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중간숙주롤 삼는 기생충들의 얘기는 다르다. 기생충은 중간숙주를 좀 우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2.소화기계에 사는 기생충

요충

요충은 길이가 1센티미터를 조금 넘는 하얗고 조그만 기생충이다. 미국에서는 핀처럼 생겼다고 핀벌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충은 가장 인간적인 기생충이다. 대부분의 기생충들은 여러 동물을 종숙주로 하거나 중간숙주로 하는 반면에 요충은 오직 사람한태만 발견되며 다른 동물에서는 이와 비슷한 기생충을 찾을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가장 흔한 기생충은 요충이다. 요충은 통상적인 대변검사로는 진단이 안 되며 항문주위도 말법을 시행해야 한다 그래서 요충 감염룰은 전국적인 기생충 검사에서 드러나지 않고 연구자가 개인적인 조사를 통해서 특정 지역의 감염룰을 알아내는 것이 고작이다. 주요 감염자가 아이들이여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가 그 대상이 되는데 2013년 경상도 지역 세 곳의 감염룰은 3.6~여서 8.3퍼센트였고 2008년 전라도의 한 지역의 감염룰은 4.1퍼센트였다. 놀라운 것은 양성이 나온 아이들을 다 치료하고 난 뒤1년후 다시 감염룰을 측정했더기 4.5버센트가 나온 것이다. 이 사실은 요충의 생존력이 만만치 않아서 박멸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요충의 증상은 밤에 요충이 항문 밖으로 나와서 항문을 가렵게 하는 것이다 요충이 감염시 항문이 가렵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어서 항문이 가렵다면 무조건 요충이라고 생각한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데 대부분의 항문이 가려운 이유는 요충이 아닌 다른것에 있다. 요충은 항문 주위에 알을 낳는 특성 대문에 요충의 진단은 대변 검사로는 안되고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항문 주위를 스카치 테이프로 붙였다가 덴 뒤 알이 묻었는지를 검사해야 된다. 한 마리라고 발견이 되면 몸속에는 보다 많은 요충이 살고 있으니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간디스토마

간시스토마는 예전부터 꾸준하게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기생충이다. 간디스토마가 꾸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회충이 사람한태만 어른이 되는 까다로운 기생충인데 반면 간디스토마는 사람은 물론이고 쥐나 살쾡이 등 다른 동물에서도 어른이 된다. 회충은 암수가 달라서 둘다 한 사람한태 있어야 알을 낳을수 있는 반면 간디스토마는 암수가 한몸이라서 혼자서도 얼마든지 알을 낳을수 있다. 그리고 간디스토마는 수명이 엄청나게 길다는 것이다. 회충은 1년 반 정도면 수명을 다해서 사람 몸에서 빠져 나가지만 간디스토마는 사람 몸에서 20년 정도 살수 있다. 간디스토마는 간에 있는 담도에서 사는 디스토마 이다. 디스토마는 입이 두 개라는 뜻으로 위쪽에 있는 진짜 입 말고도 몸 중간 쯤에 입이 하나 더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 졌다. 간디스토마는 사람의 담즙의 통로에서 기생하며 잠즙을 먹으며 산다. 간디스토마가 별로 없으면 별다른 증상을 나타내지 않지만 많은 충체가 들어오면 복통이나 식욕부진, 피로감 등을 유발시킨다. 담도의 기능이 간에서 만들어진 담즙을 소장으로 운반하는 것이니 간디스토마로 인해서 담도가 막히면 담즙이 혈액으로 흡수되어서 황달이 일어 날 수도 있다.

3.조직을 침범해 사는 기생충

메디나충

메디나충은 성경에서 나올 정도로 유명한대 이스라엘인들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을 감행한 직후 그들을 괴롭힌 것이 바로 메디나 충이다. 민수기 214~9절의 내용인 여호와께서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으리라여기서 불뱀이 바로 메디나충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메디나 충이 왜 메디나충이냐면 이슬람 성지인 메디나 라는 도기에서 이 기생충이 많이 발생해서 하는 설이 있다. 강이나 호수에 사는 물벼룩중에는 메디나 충의 유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다.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다가 메디나 충을 지닌 물벼룩을 같이 마시기도 하는데 물벼룩은 위산 때문에 죽지만 거기서 나온 메디나 충의 유충은 작은 창자로 달아나서 적당한 곳에서 창자를 뚫고 나가 배나 가슴에서 머무른다 2~3개월쯤 지나면 유충은 어른이 되고 짝찟기를 하고 수컷은 죽고 암컷은 수천마리의 새끼들을 가지고 있는다. 1년 정도가 지나면 암컷은 사람의 피부 표면으로 기어 나가고 거기에서 피부 밖으로 수포를 만든다. 메디나 충은 물과 접촉할 확률이 높은 곳을 선택하는데 인체 내에서 그럴 가능성이 높은 곳이라면 발이 될 것이고 실제로 복숭아뼈 근처가 가장 많이 수포가 생기는 장소이다. 수포가 생기면 그 부분은 매우 뜨거워지고 통증이 심해진다. 성경에서 불뱀이라고 표현한 이우가 여기에 있다. 그정도가 되면 사람은 수포를 터뜨리고 싶어하고 발이 뜨겁다 보니 상처 부위를 물에 담그게 된다. 발을 물에 담그면 통증과 뜨거움이 사라진다. 이대 물을 만난 메디나 충은 몸에서 키우던 수천 마리의 유충들을 물속으로 내보낸다. 그 유충들은 물벼룩한태 잡여 먹힐 것이다. 메디나 충을 치료하는 약은 아직가지는 없다. 메디나 충이 유충을 풀려고 머리를 내밀 때 비로소 진단이 되는데 이때 해야될 일은 물통에 해당 부위를 담그고 벌레가 남은 유층을 모두 배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의사는 막대기를 꺼내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빼내어서 막대기에 감기 시작한다. 아주 천천히 조심히 감아야 돼서 이 작업은 몇시간에서 몇 달까지 걸릴 수가 있다. 그러다가 중간에서 끊어져 버리면 환자는 남은 평생을 몸 속에 끊어진 벌레를 가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1986년만 해도 메디나충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20개의 나라에서 유행했고 감염자는 350만 정도로 추정 됐다. 쓸만한 약이 없는 데다가 백신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 하지만 그렇다고 인류가 같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엽기적이여서 박멸 대책이 수립되는 것은 당연 한 일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말라릴아를 옮기는 모기가 자유롭게 날면서 사람을 무는 반면 메디나 충의 중간 숙주인 물벼룩은 그 이름처럼 물속에서만 사니 노력만 하면 충분히 박멸이 가능하다.

선모충

선모충은 멧돼지 나 설치류에서 사는데 이것을 사람이 먹으면 이틀 만에 어른으로 자라는데 암컷과 수컷의 교미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교미가 끝나고 수컷은 대변을 통해서 밖으로 나가 버리고 암컷은 혼자서 사람의 장 속에 남아서 무수히 많은 새끼를 낳는다. 다른 기생충들과는 달리 이 선모충은 알 대신 꿈틀거리는 유충 1기를 낳으며 이 유충들은 장에 연결된 혈관을 타고 몸 전에로 퍼져 간다. 몸 여기저기에 퍼졌던 유충들은 대부분 죽고 말지만 상당수는 팔과 다리 어깨 가슴 등 근육이 많은 곳으로 몰려가서 근육에 자리를 잡는다. 유충들은 3기 유충으로 자라난 뒤 똬리를 틀고 앉아서 새로운 숙주한태 건너갈 날을 기다린다. 유충이 근육에 침투할 때 심한 근육통이 생기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그런 증상이 없어지고 기생충과 인간의 평화로운 공존이 시작된다. 연구에 의하면 선모충의 유충들은 사람 몸 속에서 40년동안 살 수 있다는데 선모충에 걸렸지만 진단이 dsk 돼서 치료를 못 받는 사람들의 근육 속에는 선모충의 유충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4.뇌에서 사는 기생충

유구낭미충

삼겹살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적당히 익혀서 먹는 것이다. 그러나 삼겹살을 타기 직적까지 구워서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물론 바짝 익힌 것 좋아해서 일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들은 삼겹살은 바짝 익혀서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교훈은 갈고리촌충이라는 기생충 대문에 생겨진 것인데 갈고리 촌충은 말 그대로 머리 부위에 갈고리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쇠고기 육회를 먹었을 때 걸릴 수 있는 머리에 갈고리가 없는 민촌충에 대응해서 갈고리촌충이라고 부른다. 이 갈고리 촌충은 대부분 증상이 없고 있어 봤자 배가 좀 아프거나 설사가 있는 정도여서 기생충의 조각을 보고나서 갈고리 촌충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처음에 말한 그 교훈은 갈고리 촌충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갈고리촌충의 유충인 유구낭미충 때문이다. 유규낭미충이 사람 몸 안에서 부화를 하면 혈류를 타고서 여러 가지 장기로 가는데 피부나 근육은 물론이고 눈이나 뇌같이 중요한 곳도 흔하게 침범한다. 별문제가 없는 성충과는 달리 유충은 여러 가지 증상들을 일으키는데 뇌를 침범한 경우에는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심한 경우에는 사람을 죽게 만들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돼지에서는 더 이상 유구낭미충을 볼수가 없다. 유구낭미충은 사람의 변으로 이동이 되는데 더 이상 우리나라 돼지들 한태는 사람의 변을 먹이지 않으며 우리나라가 위낙 검역을 철저히 하다보니까 대부분이 걸려나간다.

5.기타,우리 몸 이곳저곳에서 사는 기생충

심장사상충

개나 고양이를 침범하는 기생충 중에는 개사상충 이란 기생충이 있다. 사상이란 것은 실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개들이 심장 사상충에 걸리는 것은 모기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모기안에 있던 3기 유충들이 개안에 들어와서 기생충들이 교접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 자라는 데에는 대략 4개월 정도가 걸린다. 심장사상충이 주로 사는 곳은 폐동맥이며 심장으로 가는 건 충체의 수가 많거나 질병의 말기가 되어서 이다. 개사상충의 특이점은 매우 드물긴 하지만 사람에게도 감염이 될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물고 사람에게 증상을 잘 보이지도 않는다.

느낀점:독후감을 되도록 2장안에 끝내고 싶어서 마지막2챕터에서는 대충 썼지만 이책에 나와있는 모든 내용들은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대부분 다 읽었겠지만 다른 사람들 한태도 추천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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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by 명화 posted Oct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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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지은이마키아벨리

출판사:돋을새김

내용:민중에 대한 재배권력을 행사해온 국가나 통치체제는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가지도 모두 공화국이거나 국주국이었다 군주국은 군주의 가문에 의해 몇 대나 걸쳐 통치돼온 세습 군주국이거나 신생군주국이다. 신생 군주국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통치하는 밀라노처럼 완전히 새로운 군주국이거나 에스파냐 왕이 통치하는 나폴리 왕국처럼 기존 세습군주국의 군주에게 정복되어 편입된 군주국이다. 신생 군주국들 한태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중 공통되는 문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스스로 의 힘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되기 때문에 스스럼 없이 군주를 갈아치우려고 하게 되고 이러한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지배자에게 저항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곧 현실의 경험을 통해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는 것을 알게 될것이고 스스로 어리석게 만들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고유한 법에 의해 자유롭게 살아온 국가를 병합했을 경우 그들을 다스리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그들을 완전히 파멸시키는 것이고 두 번재는 구 나라에 직접 살면서 통치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자신들의 고유의 법에 따라 살도록 허용하면서 공물을 바치게 하고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수 있는 과두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두정부는 군주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군주의 호의와 권력 없이는 자신들의 권력이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촤선을 다해 그 체제를 유지할 것이다. 군주국들의 특징들을 분석할 때 고려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군주 자신이 필요할 대 자신만의 힘으로 스스로를 방어할 만한 충분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고 아니면 언제나 다른 세력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부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판단할 수 있는데 자신의 국가를 공격하는 어더한 세력에도 맞서 전쟁을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군대를 결집시킬 수 있는 군주라면 아니면 충분히 병력을 거느리고 있거나 풍부한 자금력이 있으므로 자신의 국가를 방어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나 전과 상대할 능력이 없어 언제나 성안으로 도망쳐 수비만 해야 하는 군주라면 늘 다른 세력의 보호가 필요하고 말할 수 있다. 군주는 전쟁과 관련된 전략 수립 및 군사훈련 외에는 그 어떠한 일이든 목표로 삼거나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또 연구해서도 안된다. 전쟁과 관련된 것이야 말로 통치하는 자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군주가 군대와 관련된 일보다는 개인적으로 사치스러운 일에 더 몰두하게 되면 그 지위를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명한 군주는 언제나 이러한 규범들을 따라야만 하며 평화로운 시기라도 절대로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근면함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확대시켜서 역경의 시기에 대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하면 어떠한 것이 변하게 될지라도 그 변화를 견딜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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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란드 디자인 산책

by 명화 posted Oct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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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란드 디자인 산책

지은이:안애경

출판사:나무[]

내용:

01필란드는 일강이 디자인 이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헬싱키 시에 위치한 주요한 공공 건축물들은 색다른 옷을 입는다. 이것은 헬싱키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공공 건출물에 빛을입히는 디자인이 효력을 발휘한다. 대중을 위한 퍼블릭 아트는 정부나 헬싱키 시가 추구하는 공공디자인의 연장선상에 있다. 도시 안에서 건축물을 비추는 빛들은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서 최대한 절제된 감성으로 대중에게 다가선다 겨울철 산책을 낙서는 일은 그래서 색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키아스마 현대미술관을 돌아서 중아우체국 건물 하나를 지나치면 바로 중앙역이 나온다 헬싱키의 가장 중심에 자리한 중앙역 건물 앞은 매일 많은 사람들이 오가지만 오늘은 한가하다. 건물 안에 바삐 오가는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오래된 옛날 집에 들어온 것 같은 아늑함이 높은 천장과 창문 곡선들을 따라 전해진다. 날씨의 변화에 따라 내부공간에서도 빛과 함께 사람들의 감정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작은 카페하나가 있다 여름에만 물을 여는 이 작은카페는 산책중에 오고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텅 비었던 카페 앞마당에는 어느새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져 있다. 여름을 상징하는 태양 빛 주전자 하나가 간판 대신 걸려 있다. 야외에 자리 잡기에는 아직 이른 여름 날씨지만 코끝을 자극하는 짙은 커피 향에 취해서 오랜만에 혼자서 여백의 시간을 즐긴다.

02핀란드 공공디자인의 의미

모처럼 햇살 좋은 날 오늘은 헬싱키 항구 주변을 잇는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산책을 하던중 평소에 무의식 중에 지나치던 공우너이 었는데 오늘은 좀 색다른 모습을 발견한다. 찬찬히 공원을 흝어보니 색깔이 분명한 공간들을 따로따로 분리해서 설치해 놓기보다는 공우너 내에 지연스럽게 어우러지게 설치하되 서로 방해되지 않도록 최대한 시민을 배려한 흔적이 엿보인다. 공원에는 두런두런 모여 휴식을 취하는 노인들이 보인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한가롭게 대형 체스게임을 즐기는 노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노인들을 위한 공간은 다른 곳보다 조금더 세심히 배려한 듯하다 헬싱키는 항구도시이다 물 가까이에 위치한 도시니 만큼 삶의 터전에 필요한 정책이 물길과 연관되어서 펼쳐지는 것들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연한 일이다. 헬싱키시가 계획한 도시계획은 겉으로는 보기에 참으로 간단해 보인다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도시계획에는 시내 중심에서 새 빌딩을 짓거나 공사가 이루어 질 일은 없다 단지 항구도시로서 도심을 벗어난 항구 주변의 쇠퇴한 기능을 보완하고 쓸모 없어진 낡은 하역장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시민들을 위한 새로운 주거환경과 문화공간을 계획한는 것이 미래 도시계획의 주 내용이다.

03핀란드 사람 그리고 디자인 철학

여름은 친란드 사람들에게 큰 의미를 갖는 계절이다 사람들은 어둡고 긴 겨울을 지내면서 여름의 태양과 그 빛 에너지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다린다. 도시에서는 감지할 수 없는 여름향기가 핀란드 사람들을 감성으로 물들이는 계절이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노동과 휴식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 여름의 집으로 향한다. 난 여기에 있으면서 필란드 사람들이 여름 집에서 지내는지 깊이 경험할수 있었다. 그리고 숲속 생활이 원시적이라고 해도 불편없이 살아살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한여름의 태양 빛이 이곳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어둠을 침묵해 온 대가로 주어지는 축복의 순간인 것이다.

느낀점: 이책은 자신이 필란드에 가서 느낀 것을 적은 책이여서 이책의 이름과는 다른 느낌이였다 내가사랑하는 유럽과 비슷한 느낌의 책이여서 매우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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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한국 현대사

by 명화 posted Oct 0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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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현대사

지은이:유시민

출판사:돌베개

내용:프롤로그

나는 사회학 전문 용어로 도시 프티부르주아 출신이다일상 언어로 말하면 소시민 가정에서 자랐다출신성분은 의미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사람은 가정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인격과 개성을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고등학생 시절에는 출세라는 것을 하려고 공부를열심히 했다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공부보다 정부와 싸우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썼다야학에서 같은 나이의 노동자들을 가르쳤으며 학생회 임원을 맡았다가 감옥고 가기도 했다. 30대 중반에 독일로 유학을 가서 경제학을 더 공부했다. 40대에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다가 정치에 임문해서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잠시 공직 사회를 경험했다나는 나를 프티부루주아 계층의 대구 경북 출신 지식 엘리트로서 젊은 나이에 이름을 알리고 춝세를 했지만 결국 정체에 실패한 후 문필업으로 돌아온 자유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살피는 것이 좋다그래서 자서전도 아닌 현대사 책을 쓰면서 먼저 개인사이야기를 한 것이다.

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다:1959년과2014의 대한민국

1959년의 대한민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꼭 누군가가 잘못을 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광복 14년 정부 수립11년 한국전쟁이 멈춘지 겨우 6년이 지났다대한민국은 학대와 굶주림 질병으로 숨이 넘어나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공식적으로는 국제 연합인 un이 도와 주었고 실질적으로는 미국이라는 이웃이 대한민국을 구해 주었다전쟁의 포연이 멈추자 사람들은 생기는 대로 아기를낳았다. 100만여 명의 59년 돼지띠들은 이른바 전후 베이비 붐 한가운데에 태어났으며 현대사의 격랑을 헤치며 저마다 인생 스토리를 썼다나는 출생신도고 하기 전에 질병으로 죽는 불운과 살면서 산업재해나 교통사고로 죽는 불은 피했다좋은 부모를 만나 제대로 공부를 할수 있었고 내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소신 것 살았다나는 운이 매우 좋은 59년 돼지띠 남자였다대한민국의 오늘과 55년 전을 배고할 때 느끼는 압도적 감정은 놀라움이다 우리의 삶은 거의 모든 면에서 확연하게 달라졌다그 것은 양의 변화를 넘어선 질적인 전환이었으며 기적에 가까운 변신이었다모든 것이 다 좋게 바뀌었다고 할 수는없다그러나 전체 적으로 좋은 족으로 바귄 것은 분명하다. 1959년 대한민국의 인구수는 2400만 명이었다해마다 인구 증가율은 3퍼센트가 넘었다경제활동 인구는 760만 명이었다미성년자가 많고 여성들이 가정에 머물렀기 때문에 경제 활동 참가율이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공식 실업률은 7퍼센트 실업자 수는 50만 명 정도였다취업자의 63펴센트가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다광산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8.7퍼센트 건설업 종사자는 2.5퍼센트에 불과했다공무원과 공공기관 임직원을 포함한 공공 서비스와 민간 서비스업 종사자가 28.3퍼센트였다국민의3분의2가 농어민고 그 가족이었던 셈이다국민들은 모두 평등하게 가난했다. 1959년 국내 총생산은 19억 달러이였고 1인당 gdp 81달러 수준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제시 우간다 토고와 함께 국가 순의의 밑바닥에 있었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나라였다열세 살이넘어서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 450만 명이었다부끄러워서 감춘 사람도 있었으며 국한문을 혼용한 신문과 책을 읽지 못하는 독해 문맹은 더 많았다한이 맺힌 부모들은 굶는 한 이 있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100만여 명의 1959년 돼지띠 중에서 약 88만 명이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살아 남았다, 1978학년도 대입 본고사 응시 자격을 얻기 위해 예비고사를 본 사람이 32만명 정도 였다대한민국은 1959년과는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나라가 되었다풍요롭고 화려하며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로 바뀌었다그러나 대한민국이 모두가 살기 졸은 나라인 것은 결코 아니다 1959년에는 펑등하게 가난한 독재 국가였던 대한민국이 2014년 현재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었다.

2 419516: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나는 두 살에 4.19를 세 살에 5.16을 보았다 직접 본 것은 아니다만약 그 두 사건이 내 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나도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내 인생에서는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었던 기간은 겨우 9달이지만 그는 내가 살아갈 나라의 토대를 만들고 떠났다그 토대는 친미주의와 반공주의가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분단국가라는 것이다. 55년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이것만큼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민주주의 국가라면 주권재민의 원리와 합법적 절차에 다라 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헌법을 어기고 국회와 법률을 무시했으며 부정선거를 일삼았다결국 국민들은 저항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했다그것이 4.19혁명이다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 2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연설회가 열렸다그런데 대구의 국공립 고등학교에서는 등교령이 내렸다학생들이 장면 후보의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경북고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성고 등 시내의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뒤쳐나왔다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이것이 2.28학생의거 이다. 2.15선거는 완전한 조작선거였다민주당은 3.15선거를 국민주권을 강도질한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원천무효를 선언했다곳곳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젔는대 27일이 지난 411일에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시위당시 실종된 고등하생 김주열의 시신이 떠올랐다격분한 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경찰서 무기고에서 수류탄을 탈취해서 경할서장실 앞에 터뜨리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419일 아침에는 이승만 대통령 관저 경무대와 서대문 이기붕의 집 앞에서 중학생과 초등학생을 포함한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시위대는 대통령 면담과 김주열 사건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며 경무대 정문을 밀고 들어가려고 했다그런대 경찰이 총을 쏴서 두곳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총상을 입었다오후 3시에는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햤지만 시민들은 경찰 총기를 빼앗아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그런대 계엄사령과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426일 오후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살다가 1965 7월에 죽었다. 1961 516일 새벽 제2군 사령부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3500여 명의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서 서울에 들어와 정부청사와 언론기관 등 주요시설을 점령했다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육균 참모총장 장도영 장군을 군사 혁명위원회 의장으로 내세웠지만 쿠데타의 리더는 박정희 소장이었다박정희 소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꾼다음 장도영 장군을 밀어내고 스스로 의장이 되었으며 군부의 반대파를 차례 차례 제거했다그런 다음 병영으로 복귀한다는 혁명공약 제 6조를 폐기하고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제5대 대통령이 되었다그는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윤보선을 꺾고 재선했다박정희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걸어갔던 독재와 장기집권 경로를 그래도 따라갔다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고 1971년 부정선거로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그리고 자신의 추종자들만 체육관에 모아놓고 혼자 출마해 100퍼센트 찬성으로 제8대와 9대 대통령이 되었다.

3장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절대빈곤 고도 성장 양극화

한반도에서 터를 잡고 산 이래 우리 민족은 지금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산 적은 없다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도 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반신반인 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송한 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좋은 나라는 국민이 골고루 잘사는 나라이다그런데 경제 성장과 소든분배의 관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우리나라는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 노동자들의 절반이나 된다비정 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60퍼센트에 불과하며 고용 안정성과 근로 환경도 현저히 나쁘다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1977년 외환위기 이후 크게 심화되었다경제성장은 국가의 부를 늘리는 것이다그렇다면 국가의 부는 무엇인가국민이 해마다 생산하고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을 가리킨다이것을 측정하기위해 국민총생산 국내 총새안 국민 총소득 같은 지표를 쓴다국민총생산을 늘리는 방법은 네가지가 있다첫째는 더 많은 노동력을 생산에 투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더 많은 자본을 생산에 투입하는 것이다세 번째는 생산기술의 수준 향상이다.그리고 마지막 내번째는 신뢰라는 사회적자본이다. 1959년의 대한민국에는 노동력만 있었고 자본과 생산기술이 없었다부정부패와 독재가 판치는 세상이라 신뢰가 형성되기도 어려웠다장면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최초의 경제개발 계획을 만들었다.

4장 한국형 민주화:전국적 독시봉기를 통한 민주주의 정치혁명

1959년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는 있었지만 재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무엇보다 자기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하지도 않았다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의 총합이 아니다제도와 행태와 의식의 복합물이다합리적인 제도가 있어도 행태가 비뚤어지면 그 제도는 힘을 잃는다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3.1운동의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 민족해방이었지만 그 방식은 민주화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두 번째 사례는 4.19혁명이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한국적 전형이었다우리 국민들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서 독재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최초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세 번째 사례는 1987 6월 민주항쟁이다 승리한 6월 민주항쟁과 비극으로 끝난 광주민중항쟁의 차이는 광주민중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만약 그때 서울이나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등 다른 대도시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항께 궐기했다면 광주 한 곳에 그 많은 병력을 집중 투입해 시민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의 승리와 더불어 그 경로는 종착점에 도달했다이제는 다른 경로와 전략을 찾아야 했다우리의 민주화의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은 곧바로 5,16쿠테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 조금씩 자라갔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9년과 제5공화국7년은 성장기였다. 6월 민주항쟁 이후 현재가지는 민주주의성숙기이다우리는 두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헝했다헌법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형태를 개선했다.

5장 사회문하의 급진적 변화:단색의병영에서 다양성의 광장으로

한국전쟁 이후의 대한민국은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니었다사람이 쉬게 접근할 수 있는 야산은 대부분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었다. 1960년대에는 전국에 민둥산은 332만 헥타르나 되었다우리의 숲은 조선 후기 인구가 증가하면서 파괴되기 시작했으며 일제 강점기 수탈과 해방 전후의 혼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해졌다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화전과 도벌을 막기 위해 무진장 애를 섰다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1년 정부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산림보호임시조치법을 만들고 조임사업을 실시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숲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1972년 유신 쿠데타 직후 정부는 비상국무회의에서 산림개발법을 제정한 데 이어서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실시했다오늘날 정부가 시민의 재산권 행사를 마음대로 제약하지 못한 다 정부는 2003년 전북 부안군에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을 지으려 했던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그러나 병영시대의 대한민국은 그렇지 낳았다정부의 정책을 내놓고 반대하는 것은 병사가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과 같았다점부는 여론 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린벨트를 지정했다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를 만난 그린벨트 토지소유자들은 억눌렸던 분노를 뒤늦게 터뜨렸다정부와 국회에서 진정서를 내고 언론에 억울함을 호소했다하지만 소용이 없었다그런데 19889월 개정헌법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만들어졌다오늘날 그린벨트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초기의 약 절반 정도만 남아있다 산림녹화사업과 그린벨트 제도는 산업화와 환경보호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보여준다현재 그린벨트는 수도권과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울산 창원 권역에 3900제곱킬로미터 정도가 남아잇다.

6장 거짓 혁명과 거짓 공호의 적대적 공존

 우리 국민의 정서와 의식에는 분단과 전쟁의 쓰라린 경험이 남북한의 이념적 군사적 대결이 빚어낸 두려움이 무겁게 깔려 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그 두려움은 바로 북한이다 그런데 분단 이후 70년 동안 우리 국민들을 불안하게 한 위험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북한의 침략과 도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대한민국 내부에 이념적 배신자인 내부의 적이다. 정부는 이것을 계속해서 주장해 왔으며 많은 시민이 그것을 의심해서는 안될 신조로 바아들였다. 배신자를 가리키는 말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처음에는 공산당 빨갱이 간첩이었다가 좌경 친북 용공 세력이였다 요즘에는 종북이라고 한다. 배신자로 몰리면 때로는 목숨이 위험하다.201312월 북한 당국은 권력 서열 2인자였던 장성택을 처형했다. 나는 이 사건을 보고 연민보다는 분노를 느꼈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일지라도 사람을 그런 식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느낀점: 매우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이였으나 내용이 너무 어렵고 다양해서 읽기에 부담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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