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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16.일 서울- 방콕

by 다솜 posted Feb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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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16.일  서울- 방콕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4시 55분에 교회를 출발했다. 그리고는 공항철도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비몽사몽 상태로 움직여서 힘들고, 배고 엄청 고팠지만 문제없이 공항으로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와 다은이 언니와 규진이 오빠와 같이 한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근데 생각보다 가격은 비싸고 맛은 별로여서 아쉬웠다. 밥을 먹고 우리는 중국 동방 항공이라는 비행기를 탔다. 인터넷으로 찾아봤을 때 사람들이 별로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설도 좋고, 준비된 것도 많아서 좋았다. 비행기에서 한참 자다가 안 나올것만 같았던 기내식이 나왔다. 기내식으로는 닭고기 같은 게 올려져 있는 밥과 샐러드, 케잌 비슷한 것, 오렌지쥬스, 빵이 나왔다. 밥이 보기와는 다르게 맛있었고, 오렌지쥬스가 되게 맛있었는데 밥을 먹은지 얼마 안 된 때라서 많이 못 먹은게 아쉽기는 하다. 얼마 뒤 우린 경유지인 상하이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인지 습하고, 찝찝했지만 내가 중국 땅을 밟게 된 게 신기했고, 재미있었다. 그리고는 지호, 정우, 동우, 정인, 선우와 같이 공항 구경을 했고, 이 상하이 공항에는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많이 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공항 구경을 할 때 나머지 사람들은 공항 의자에 누워서 자고  있었고, 정말 편해보였다. 그렇게 상하이에서 2시간 동안 쉬고 이번에는 방콕을 가는 비행기를 탔다. 나는 기내식을 먹으려고 다른 사람들이 자는 동안 자지 않았고, 인터넷 소설을 봤다. 그리고 기내식이 비벼먹으면 닭죽 맛이 나는 밥과 요플레, 빵 등이 나왔는데 아침에 먹었던 기내식보다 더 맛있었다. 그렇게 또 인터넷 소설을 보다가 방콕에 도착했고, 비행기에서 내려보니 되게 습하고, 더웠다. 그래도 드디어 방콕을 도착했다는 게 좋았다. 방콕 수완나품 공항은 베트남 공항과는 달리 되게 크고 좋았고, 우리나라 공항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린 1시간 동안이나 택시를 기다려서 겨우 숙소로 이동했고, 가는 동안 끝말잇기를 하려다 베스킨라빈스를 했는데 지호가 일, 이, 삼을 하고, 다음 차례인 선우가 곰곰히 생각하더니 '삼계탕!' 을 외치는 바람에 모두가 빵 터졌다. 그렇게 재밌게 숙소로 이동했는데 숙소는 공동화장실을 써야하는 곳이라서 정말 실망했다. 또한 에어컨은 있는데 방에 구멍이 뚫려 있어서 전혀 시원해지지 않았고, 선풍기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렇게 우린 처음으로 도미토리 숙소에 묵게 되었고, 되게 새로웠다. 우린 짐을 풀고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난 약 3700원 짜리 쌀국수를 먹었다. 선우 말로는 싼 곳은 800원 정도 한다고 하는데 가격에 비해서는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쌀국수는 되게 맛있었고, 그 식당이 되게 시원해서 좋았다. 그리고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에 정우가 태국 고추를 먹었는데 너무 매워해서 바나나 껍질 말린 걸 줬는데 그걸 먹고는 입 안에다 토를 하고는 그 토를 씹어먹는 일이 발생했다. 정우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걸 본 사람이 여러 명이었고, 모두 즐거워했다. 그렇게 저녁식사를 마친 후 우린 세븐일레븐에 가서 800바트 정도의 간식을 샀다. 그렇게 맛있는 간식을 많이 사본 것도 오랜만이었고, 태국 편의점에 여러가지 간식들이 많아서 좋았다. 간식을 사서 숙소로 돌아와 에어컨이 빵빵한 정우, 선우네 방에서 과자파티를 했고, 김 과자나 도라에몽 과자 등 신기하고 맛있는 과자들을 먹어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그리고나서 나와 정인이는 샤워를 하려고 했는데 우리 층 샤워실 불이 이상해서 4층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게 되었다. 근데 물이 엄청나게 차가웠고, 옷을 거는 곳도 없어서 서로 들어주면서 샤워를 하게 되었다. 겨우 샤워를 마치기는 했지만 모이기로 했던 10시를 넘기게 되서 대기명당과 선배들에게 미안했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하루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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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아 2014.02.22 22:15
    욱~ 다솜이 너무 리얼하게 써서 정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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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4.02.23 01:35
    역시 다솜이의 섬세한 기억력이 너희들과 함께한 것처럼 즐거운 기행문을 만들어 주네... 재미있다.
  • ?
    보라 2014.02.24 01:27
    자세한 묘사가 즐겁네. 잘 지내며 좋은 추억 많이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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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 2014.02.28 00:02

    중국 공항에서의 2시간도 재미있게 잘 보냈구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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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6 정조실록

by 다솜 posted Feb 0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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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6 정조실록

2014.2.1.이지원

1장 세손 시절

세손은 죄인의 아들로 바라보는 신하들과 언제 등 돌릴지 모르는 외가 사이에서 무너지지 않고,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세손은 자라면서 외가에 대해 불신을 드러내었고, 외가는 권력 실세로 군림했지만 세손에 대한 왕의 신뢰가 굳건하여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세손은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고, 석 달 뒤 영조는 눈을 감았다.

2장 숙청과 반발

정조는 김상로와 문성국를 대역죄로 처단하고, 영조의 후궁 문씨를 도성 밖으로 내쫒는 일로 복수를 하였고,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최강의 척신들을 제거하였고, 그들을 경계하였다. 홍국영은 왕과 마음이 통하는 벗이었으나 점점 자신의 힘을 키워갔지만 왕은 그런 그를 지켜보다 결국 유배보내었다.

3장 의리 탕평의 길

사파는 정조의 주요 정채겡 동의했던 부류이고, 벽파는 반대했던 부류이다. 일가는 세손의 보호자였다가 반대 세력으로 돌아섰고, 나중에는 역모를 꾀하기도 했다. 정순왕후는 열다섯 살에 궁에 들어와 나중에는 언제나 명분을 쥐고 움직었고, 단호한 태도로 자신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4장 세도세자 추숭을 둘러싸고

정조의 뜻으로 아버지의 천장이 행해졌고, 그 이후 왕은 해마다 화성을 찾아 오열을 했다. 노론 벽파의 수장 김종수는 왕의 신뢰가 커서 위리안치까지 했다가도 다시 불려지기도 했지만 정조 23년에 죽었고, 얼마 뒤 채제공도 죽었다. 그리고 왕의 몸은 점점 병들도 급격히 노쇠해갔다.

5장 개혁적 유학 군주

정조는 자신의 앞에 높은 시대의 흐름과 병폐의 심각함을 잘 알았으며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었고, 백성을 사랑했다. 그는 암행어사를 보내어 수령들을 긴장하게 했고, 백성을 보다 편안하게 했다. 그런데 정조 24년에 머리와 등에 종기가 돋았고, 점점 심해지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느낀 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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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03 11:16
    꾸준히 책을 읽어가는 다솜 지원아~^*^ 꿋꿋하게 너의 미래를 만들어가며, 예쁘고 멋지게 자라는 걸
    보는 재미가 좋다.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 또한 보기 좋다. 건강하고 유쾌한 나날되삼~^*^
  • profile
    사랑 2014.02.09 00:59
    지원이도 블로그에 조선왕조 빠진 부분도 찾아서 채워 올려줘. 드문 드문 이 빠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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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7 순조실록

by 다솜 posted Feb 0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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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7 순조실록

2014.2.1.이지원

1장 정순대비의 수렴청정

열한 살의 순조 대신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고, 정치 지도자처럼 행동했다. 순조 1년에 대왕대비는 사학하는 이들을 징계하라 하였고, 형조와 지방 관아들은 검거를 시작했으며 이가환, 권철신 등은 몰고 되었다. 정순대비는 정조의 개혁 정책을 계승하려고 했고, 순조 1년에 노비안을 불태워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명분을 중시하였고, 절제를 알았다.

2장 시파의 집권과 벽파의 몰락

순조 4년부터는 열다섯이 되는 왕이 친정하게 되었고, 몇 달 뒤 대비는 숨을 거두었다. 순조는 총명했고, 정치의 작동 원리와 조정 신하들의 면면도 얼추 알았다. 그리고 얼마 뒤 조득영이 김달순을 공격하는 소를 올리고 왕은 받아들여 결국 김달순은 사사되었다.

3장 홍경래의 난

농업 생산력의 발전과 화폐경지의 발달은 양반의 수를 늘게 했고, 그럴수록 농민들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고, 분노한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순조 11년에 홍경래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점점 규모가 커졌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고, 홍경래의 난은 그렇게 평정되었다.

4장 임금 순조

순조는 총명하였고, 결단력도 부족하지 않고, 부지런했던 왕이었지만 정치적 목표가 없었다. 그는 건장했지만 즉위 10년부터 자주 병에 시달렸고, 열의를 잃어갔다. 그리고 38세에 열아홉 살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고, 세자는 일을 잘 해나갔지만 각혈을 하였고, 순조 30년에 세자는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얼마 뒤 순조 34년에 순조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5장 세도정치의 개막

임금이 정사에 손을 놔버리고 비변사에서 대부분의 결정이 이루어지면서 세도정치가 열렸다. 수령으로 임명된 자들은 백성이 돈을 주지 않으면 폭력을 휘둘렀고, 때문에 백성은 굶주리고 분노가 쌓여가 나라의 기반을 허물었다. 그렇게 조선 사회는 수령들에게 백성에 대한 수탈을 권장하는 사회라 해도 될 것이다.

느낀 점

순조와 세자가 불쌍해보였고, 정순대비가 대단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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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5 경종영조실록 이지원

by 다솜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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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15 경종영조실록

2014.1.24.이지원

1장 거대한 그늘을 남긴 경종 4

30년동안 세자로 살다 마침내 왕이 된 조선 제 20대 임금 경종은 소론에 의해 왕이 되었다. 경종 1, 경종은 노론의 압박으로 영의군을 세제로 삼고, 경종은 세자가 대소국사를 해야 하겠다 하였고, 신하들이 만류해서 왕은 서서히 명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노론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임금다워졌고, 소론은 집권 세력이 되어 한을 풀고자 했다. 그리고 세제는 경종의 궁녀들과 내관들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알기에 정면 돌파를 하여 승리하였고, 경종에게는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세자라는 정치적 지위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경종 4년에 경종은 눈을 감았다.

2장 신원에서 탕평으로

영조는 보위를 이었고, 다시 핵심 요직들은 노론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노론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방지하려 탕평의 길로 가려했지만 노론은 설득되지 않았고, 다시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영조 4년에 이유익 등은 반역을 하였지만 이광좌와 오명항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3장 탕평에서 신원으로

왕은 탕평을 유지하려 애썼고,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고 하며 자신은 왕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영조는 시종 탕평을 내세우며 노력했지만 민심은 영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소론 준론은 사라졌으며 남은 소론은 보전을 빌어야했다. 그리고 영조는 영조 35년에 정순왕후를 맞이하였다.

4장 영조 52

영조는 유학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며, 제사에도 열성을 보이며 검소를 숭상하며 백성의 어려움을 더는 정치를 위해 애썼다. 그리고 영조는 눈물이 많은 왕이었으며 다혈질의 왕이었지만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그는 신하들을 마음대로 다루었고,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5장 사도세자의 비극

영조가 마흔둘일 때 세자가 태어났다. 세자는 몸집도 컸고, 총명했으며 영조는 세자의 칭찬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세자 수업이 시작되고 세자는 공부보다 무예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점에서 영조는 세자에게 실망하였다. 그럴 때 공부도 싫어하지 않고, 총명한 세손이 태어났고, 영조는 세손을 아끼며 칭찬하였다. 세자가 비행하였고, 역모를 꾸몄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8일 후 세자는 뒤주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그 뒤로도 경연에 열심이고, 백성도 자주 만났으며 세손에게 여러 차례 다짐 받았다.

느낀 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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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7 연산군일기

by 다솜 posted Jan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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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07 연산군일기

2014.1.13.이지원

1장 대간권력 vs 연산

성종은 빡빡한 군주수업을 받은 자신과는 달리 세자에게는 느슨한 세자수업을 받게 하였다. 그 시절 연산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모범생도 아니었다. 연산은 소리 없이 적당히 하루하루를 보냈고, 어느 날 비로소 연산은 친어머니의 존재와 죽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아버지와 신하들에 의해 폐비된 뒤 사약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연산의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사사건건 대간의 공격을 받고 해명하다 두 손을 들고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연산의 가슴은 투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신하들은 성종과는 전혀 다른 군주임을 신하들은 알게 되었고, 신하들은 집단 사직을 하며 연산이 복직을 명하면 다시 사직하기를 반복하는 일이 일상화되었고, 결국 연산은 작전상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2장 무오사화와 왕권의 회복

성종의 3년 상이 끝나고 연산은 폐비 윤 씨의 이장에 박차를 가하여 대간들도 어찌할 수 없게 하고는 마침내 이장을 마치고 묘호를 회묘라 하였다. 이렇듯 연산은 성종과는 정반대로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밀고나갔다. 그는 왕권에 대한 문제의식도 선명했고, 현실적인 힘의 관계도 잘 이해했다. 연산을 대신들에게 예로써 대하면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자극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신의 대간의 공격을 받을 때면 확실하게 막아주기도 하며, 대신들은 대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연산은 자기주장을 펼 줄 알았고, 경연은 빠지는 날이 낳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핑계로 둘러댔다. 어쨌든 연산은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지녔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힘은 강화되어서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것처럼 보였다.

3장 평온 속의 불안

노사신은 성종 조에 들어서서는 삼국사절요’, ‘동문선등을 편찬하는 학자였지만 대간의 지나친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대간들의 주 공격대상이 되었지만 연산과 대간이 부딪칠 때면 언제나 연산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서다가 무오사화 때 보여준 뜻밖의 상황 때문에 역사에 간신으로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연산은 민생문제에 대해서도 나름 신경을 써서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고, 신하들도 세조 때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가졌지만 문득문득 불안감도 찾아들고는 했을 것이다. 연산은 성종처럼 시와 그림을 좋아했고, 사냥을 좋아했는데 둘의 기질은 매우 달랐다. 연산은 성종과 달리 시를 짓기도 하고, 매에다 사냥개까지 마음껏 기르는 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하였다. 그리고 인정전에서 양로연이 열렸을 때 연산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준 예조판서 이세좌는 술은 못했지만 다른 재상들처럼 술을 올렸고, 못하는 답 술을 받았는데, 그 술이 곤룡포에 떨어졌다가 유배당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파직 당하였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이세좌의 가족들을 유배조치한 날 저녁에 연산은 성종의 후궁은 엄 숙의와 정 소용을 죽이고는 계모인 자순대비의 침소로 갔지만 중전 신씨의 만류에 발걸음을 돌려 연산의 할머니인 대왕 대비전에 가서 통곡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녀는 숨을 거두었고, 그렇게 갑자사화는 막이 올랐다. 연산은 폐비의 추숭을 다시 제기하였고, 이 분위기에서도 대간의 다수는 반대의견을 내었고, 연산은 본격적인 복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세좌는 민가로 들어가 대들보에 목을 매게 하였고, 정창손, 심회, 한명회, 정인지, 그리고 윤필상 등을 죽였다. 그리고 한치형을 부관 능지하였고, 한치형의 아들들을 국문장으로 끌어내었고, 가산을 몰수했으며 이극균도 자진하게 하였다. 이렇게 피바람을 불어오던 연산은 멈출 수도, 계속 할 수도 없는 이 일의 해결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이 가혹한 형벌은 이미 죽은 자와 그의 가족에게만 한정하고, 살아남은 신하들을 향한 피바람은 거두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살얼음판 위 같은 환경이었지만 연산의 의중을 이해했고, 적응해갔다.

5장 무너진 절대군주

연산은 절대 왕권을 위해 유교식 견제장치들을 제거해나갔고, 하급문신들과 급기야 대간들에게까지 가마를 매게 하였다. 그리고 사냥이나 야외 나들이를 즐겨했던 연산은 한 번 움직이면 행차가 지나가는 주변의 민가를 다 비우게 했고, 궁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왕 전용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궁의 기생들을 천 명으로 늘려서 데려오도록 했고, 그 중에서 용모와 재주가 빼어난 자는 흥청이 되었다. 또한 연산은 사냥을 위하 동물원을 만들었고, 날마다 사냥과 연회가 이어졌으며 나라 안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다 결국 박원종이라는 자가 군인들과 백성들을 모아서 군사를 평성하였고, 사태를 파악한 시종이나 내관들, 갑사들은 도망가 버렸고, 연산은 옥새를 진성대군에게 주었고, 그가 경복궁으로 가서 즉위하니 곧 중종이었다. 그 뒤 두 달여 만에 병이 심해져서 죽게 되었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대로 부인 신 씨의 곁에 묻히게 되었다.

느낀 점

재미있었고, 연산이라는 왕은 나쁜 것 같기도 하고, 불쌍한 것 같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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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5 단종세조실록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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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05 단종. 세조실록

2014.1.9.이지원

1장 어린 임금과 장성한 대군

조선 6대 임금인 어린 단종은 열두 살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 시대는 새 임금이 미성년일 경우 대가 섭정을 하는 데 단종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없어서 의정부가 나랏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왕은 형식상의 결재만 담당했고, 실제 모든 결정은 의정부에서 이루어졌다. 단종은 이내 안정되었고, 자기 영역을 찾기 시작하였다. 단종은 도망치거나 치기어린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고, 겸허함을 잃지 않으며 성장해갔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은 당대의 어떤 문사에게도 뒤지지 않을 학문적 소양과 교양을 갖추었다. 그는 부왕의 기대에 부응했고, 건강한 신체와 타고난 운동신경이 자랑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자신의 무인적 자질을 자랑하고 싶어 하였고, 자신이 임금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안평대군은 타고난 예술가였다. 시와 그림에 능했고, 당대 최고의 명필이라는 평을 얻었으며 자부심도 형인 수양에게 뒤지지 않았다. 힘이 커진 두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두르이 관계는 경쟁적인 관계로 자리 잡았다.

2장 계유정난

거사를 계획하고 차근차근 내실을 다져 가던 수양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조정에 얼굴을 알리고, 사람들이 하던 수양에 대한 조정의 의심을 누그러뜨려 돌아왔다. 그렇게 여유를 되찾은 수양은 공개적으로 우호 세력 확대에 나섰고, 수양이 계획한 모든 일은 잘 풀려가고 있었다. 또한 수양은 단종에게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단종은 안 된다고 하였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신하들과 단종의 의심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였다. 얼마 뒤 수양은 고려사’‘세종실록의 편찬을 맡고, 세종을 도와 북방을 개척하였던 유학사,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를 죽이고,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수양은 마지막 남은 함길도 도절세자, 이징옥을 죽이기로 했다. 이징옥은 당대 최고의 무장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 충직성으로 인해 널리 존경받았던 인물인데, 군종들은 이징옥에게 술을 권한 후에 화살과 칼로 찔러 죽였고, 그의 목은 오래도록 북방의 찬바람 속에 내걸리게 되었다.

3장 한 마리 원통한 새

권력은 온전히 수양의 것이 되었고, 단종은 수양에게 최대한 몸을 낮춰 대하였지만 속으로는 임금의 자리만은 지키기로 다짐하였다. 그렇게 단종은 윤대를 시작하고, 경연에 더욱 열심히 참석하는 등 조심스럽게 행보를 넓혀나갔다. 수양은 다시 단종에게 국혼을 주장하고 나섰고, 단종은 반대하였지만 결국 강제로 부인을 맞게 되었다. 단종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서 열다섯이 되었고, 자발적으로 보위를 양보할 눈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양은 단종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유배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살아남지 못할 것인 걸 아는 단종은 결국 수양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수양대군은 마침내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 상왕이 된 단종은 유명한 청령포에 유배되었지만 홍수의 위험이 있다며 영원 객사로 옮겨 살게 되었고, 사약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즉위한 지 5, 그의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4장 세조의 치세

수양은 가까운 혈육과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들을 많이 죽였고, 그 살육은 단종을 죽이고 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수양은 집현전을 폐지해버렸고, 또한 경연도 폐지하였다. 이렇게 세조는 건국 이래의 유학자들과 세종이 만들어놓은 유교정치 시스템을 부정해 나갔고, 자신의 일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거나 하면 국문을 받게 하였다. 그렇기에 대신들은 입도 벙긋 하지 못하였고, 누구도 임금의 뜻에 반하느 의견을 낼 수 없었다. 실록 막강한 왕권이 구축된 것이었다. 세조는 모든 권한을 틀어쥔 독재자였음에도 신하들과의 관게는 의외로 거리가 없었고, 크고 작은 술자리들을 많이 열었다. 그리고 세조는 자신은 경연도 폐지하였지만 신하들과 성균관 학생들, 무장들에게는 끊임없이 공부를 권했다. 세조는 상당히 금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가 아꼈던 여인은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뿐이었다. 궁중의 연회나 온천행 등 어디든 부인이 대동하기를 좋아하는 세조였다.

5장 이루지 못한 꿈

세조는 태종과 달리 공신을 우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신하들과의 관계에서는 왕권이 강력해보였지만 대궐을 벗어나면 모두 공신들의 세상이었다. 그렇게 공신들은 힘과 부를 키워나갔다. 출세를 하려면 주요 공신들에게 잘 보이면 그만이었고, 공신들은 단지 세조에게 불충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백성들이 점점 불만에 쌓여갈 때, 이시애라는 자가 나서서 대규모의 반군을 만들었고, 그 힘을 키웠다. 그것을 안 세조는 조카 구성을 총사령관으로 삼았고, 권군은 반군과의 격렬한 공방이 오다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시애가 군사를 거두고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결정적 오판을 하고 말았고, 그 전투 이후에 반군은 힘이 커지기 시작했지만 다 이긴 싸움을 놓친 반군은 이탈자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였다. 결국 반군은 와해되어 버렸고, 이시애는 도망치다 옛 부하들에게 잡혀 현장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그런데 건강한 신체가 자라이었던 세조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세조는 세자에게 보위를 넘겨주고는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하여 즉위한 조선 제 8대 임금이 예종이다.

느낀 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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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3 태종실록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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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 박시백의 조

조선왕조실록 03 태종실록

2014.1.8.이지원

1장 전설이 된 태상왕

태종 이방원은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물리치고 왕이 되었다. 그는 경쟁자는 없지만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들을 죽여가면서 등극한다는 건 명문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므로 아버지의 용서를 구해야했다. 하지만 문안인사를 드리고 잔치를 베푸는 등 성의를 보여도 태조의 마음은 풀리지를 않았다. 그러다 도읍을 한양에서 개경으로 옮겨지고 태상왕은 개경에 머무르지 않고 금강산, 오대산 등을 다녔다. 그리고 조사의의 난이 일어났다. 이 싸움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란이다. 그러나 전쟁영운인 늙은 태상왕은 패하고 마는데 패배 과정이 허망하리만큼 시시했다. 포로로 잡힌 김천우란 자가 관군이 4만 명이 넘는다고 말하였다. 그날 밤 그 말이 퍼져서 많은 도망병이 속출하였고, 한 명이 지른 불을 신호로 하룻밤 사이에 와해되어 버렸다. 그 뒤 태상왕은 체념한 듯 바깥 행차로 많이 줄었고, 더 이상 긁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신들의 집을 짓느라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의 소나무 숲은 베어내었고, 태사왕은 눈물만 흘렸다 한다. 귀환한 후로 태조는 6년을 더 살다 눈을 감았고, 그의 능은 바로 건원릉이다.

2장 사냥이 끝난 후

태종은 신하들처럼 과거를 통해 벼슬을 시작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어떻게 패거리를 만들고 어떻게 뇌물을 주고받는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 새로운 힘을 만들어냈고, 위협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을 도운 공신들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이거이와 이저 부자를 본보기로 삼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방원과 결혼을 한 원경왕후 민씨는 남편을 왕으로 만드는 일에 발 벗고 나섰고, 그녀는 나라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하루뿐이었고, 태종은 왕이 되자마자 젊은 여인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녀는 격렬하게 항의해보지만 태종은 아예 후궁제도를 법제화하여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제의 나이 열한 살에 마침내 세자에 책봉되었고, 민씨가에 대한 태종의 경계심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세자는 기대에 별로 부응하지 못했다. 공부를 게을리하고, 식사예절이 반듯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태종은 갑자기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신하들은 선위를 항상 반대하였지만 태종은 옥새를 세자에게 가져다 놓고, 세자는 다시 가져오는 등 이 일이 며칠 계속되었다. 그러다 영리한 이숙번이라는 사람이 전하서 보위에 계셔야 한다며 말하였고, 태종은 옥새를 옥새 보관소에 갖다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민씨들에 대한 경계심이 풀린 듯 보였다.

3장 공신의 운명

태종은 다시 민씨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는 민구무, 민무질이 선위의 뜻을 밝혔을 때 기쁜 표정을 짓고, 뜻을 거두자 실망한 얼굴을 하였고, 아들이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으로 태종은 그들의 공신 녹권을 빼앗고, 관직 임명장을 회수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죄인 민무구, 민주질을 자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민무회와 민무휼이 세자에게 버릇없게 굴어서 그들을 자진하게 하였다. 부인인 민 씨네 형제들을 죽인 태종은 이렇게 민 씨 가문에 왕권을 위협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잘 모른다. 더한 말을 한 이거이를 살려주었는데 왜 민 씨들에게만 가혹했을 지는 아직 의문이다. 핵심공신으로 죽는 날까지 영화를 누린 사람은 조영무와 하륜이다. 조영무는 태조의 눈에 들어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지만 태조를 배심하고 태종에게 붙었다. 배운 것이 없었지만 마침내 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하륜은 일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었고, 그로 인해 비방도 많이 받았다. 하륜은 항상 불충을 보이고도 용서받았고,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이숙번은 과거시험에서 급제하여 태종이 군사부문에 앉혔고, 나중에 재상에 임명하였다. 이숙번은 하륜처럼 매사에 거침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숙번이 세자에게 말을 이상하게 전하고, 병을 핑계로 대궐 출입을 하지 않았고, 태종은 그를 곱지 않게 보았다. 그러다 태종은 이숙번을 지방에 나가 살게 하였고, 그는 끝까지 복권되지 못하고 죽었다.

4장 현실주의자 태종의 개혁

태종에게는 신앙과도 같은 정치적 신념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강력한 왕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왕권강화와 유교적 이상 구현이라는 두 목표가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었고, 신하들은 공부하도록 압박하였고, 사관을 두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였다. 관원들과 태종이 가장 많이 부딛친 것은 사냥과 관련해서였는데 왕의 사냥 행차를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하였다. 백성들은 가을걷이를 끝내야 하고, 높자란 풀들을 정리해야했다. 또한 행차 인원만 해도 수천 명이었고, 이들을 대저해야 할 관할 수령은 긴장하고, 고통은 백성들에게 떠넘겨 졌다. 태종은 결국 언관들의 반대에도 사냥에 나서게 되고, 태종은 변명도 하고, 솔직한 고백도 하고, 사과도 하였지마 며칠 후에는 또 사냥을 나가고는 했다. 불교 개혁은 이미 태조 시절 도첩제가 실시되었고, 불교를 옹호하던 태조가 죽자 태종은 저로가 승려의 수, 절의 소유지를 대폭 줄여버렸다. 태종도 급할 때는 승려들을 찾았는데 왕비가 위독했을 때 왕비의 병이 낫지 않으면 불교를 없애겠다고 하였고, 다행히 왕비의 병이 나아졌고, 태종은 회암사에 땅과 곡식을 내려주었다.

5장 양녕과 충녕

유학자들은 세자를 훌륭한 임금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빡빡한 생활을 요구했지만 어린 세자는 공부 체질이 아니었다. 세자는 나이를 먹어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활쏘기나 사냥을 좋아했다. 그러다 세자가 열일곱 때 여자를 알게 되고, 그 기생을 잡아 두었다. 세자는 온갖 핑계로 공부를 멀리하였고, 궁중에서 매를 키우며 장안의 건달들을 궁 안으로 불러들여 어울리기도 하였다. 태종은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효령은 말수가 적은 수마일 맨이었고, 넷째 성녕은 늦둥이로 총명하고 반듯하여 왕과 왕비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셋째 충녕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공부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왕자는 종친일 뿐 임금이 될 수 없었다. 충녕은 세자에게 도발적인 행동을 여러 번 거듭하였고, 선생들은 이만 열면 충녕 타령을 하였다. 충년의 튀는 행동은 계속 되었고, 세자의 일탈행동도 계속 되었다. 갖은 핑계로 서연을 멀리하고 사냥을 즐기고 주색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녕이 어리 나이에 죽고 말았고, 얼마 뒤 태종은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그 날 태종은 목놓아 울었고, 양녕는 광주로 떠나게 되었다.

느낀 점

재미있었고, 태종이라는 사람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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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7 연산군일기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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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07 연산군일기

2014.1.13.이지원

1장 대간권력 vs 연산

성종은 빡빡한 군주수업을 받은 자신과는 달리 세자에게는 느슨한 세자수업을 받게 하였다. 그 시절 연산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모범생도 아니었다. 연산은 소리 없이 적당히 하루하루를 보냈고, 어느 날 비로소 연산은 친어머니의 존재와 죽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아버지와 신하들에 의해 폐비된 뒤 사약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연산의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사사건건 대간의 공격을 받고 해명하다 두 손을 들고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연산의 가슴은 투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신하들은 성종과는 전혀 다른 군주임을 신하들은 알게 되었고, 신하들은 집단 사직을 하며 연산이 복직을 명하면 다시 사직하기를 반복하는 일이 일상화되었고, 결국 연산은 작전상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2장 무오사화와 왕권의 회복

성종의 3년 상이 끝나고 연산은 폐비 윤 씨의 이장에 박차를 가하여 대간들도 어찌할 수 없게 하고는 마침내 이장을 마치고 묘호를 회묘라 하였다. 이렇듯 연산은 성종과는 정반대로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밀고나갔다. 그는 왕권에 대한 문제의식도 선명했고, 현실적인 힘의 관계도 잘 이해했다. 연산을 대신들에게 예로써 대하면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자극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신의 대간의 공격을 받을 때면 확실하게 막아주기도 하며, 대신들은 대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연산은 자기주장을 펼 줄 알았고, 경연은 빠지는 날이 낳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핑계로 둘러댔다. 어쨌든 연산은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지녔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힘은 강화되어서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것처럼 보였다.

3장 평온 속의 불안

노사신은 성종 조에 들어서서는 삼국사절요’, ‘동문선등을 편찬하는 학자였지만 대간의 지나친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대간들의 주 공격대상이 되었지만 연산과 대간이 부딪칠 때면 언제나 연산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서다가 무오사화 때 보여준 뜻밖의 상황 때문에 역사에 간신으로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연산은 민생문제에 대해서도 나름 신경을 써서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고, 신하들도 세조 때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가졌지만 문득문득 불안감도 찾아들고는 했을 것이다. 연산은 성종처럼 시와 그림을 좋아했고, 사냥을 좋아했는데 둘의 기질은 매우 달랐다. 연산은 성종과 달리 시를 짓기도 하고, 매에다 사냥개까지 마음껏 기르는 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하였다. 그리고 인정전에서 양로연이 열렸을 때 연산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준 예조판서 이세좌는 술은 못했지만 다른 재상들처럼 술을 올렸고, 못하는 답 술을 받았는데, 그 술이 곤룡포에 떨어졌다가 유배당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파직 당하였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이세좌의 가족들을 유배조치한 날 저녁에 연산은 성종의 후궁은 엄 숙의와 정 소용을 죽이고는 계모인 자순대비의 침소로 갔지만 중전 신씨의 만류에 발걸음을 돌려 연산의 할머니인 대왕 대비전에 가서 통곡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녀는 숨을 거두었고, 그렇게 갑자사화는 막이 올랐다. 연산은 폐비의 추숭을 다시 제기하였고, 이 분위기에서도 대간의 다수는 반대의견을 내었고, 연산은 본격적인 복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세좌는 민가로 들어가 대들보에 목을 매게 하였고, 정창손, 심회, 한명회, 정인지, 그리고 윤필상 등을 죽였다. 그리고 한치형을 부관 능지하였고, 한치형의 아들들을 국문장으로 끌어내었고, 가산을 몰수했으며 이극균도 자진하게 하였다. 이렇게 피바람을 불어오던 연산은 멈출 수도, 계속 할 수도 없는 이 일의 해결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이 가혹한 형벌은 이미 죽은 자와 그의 가족에게만 한정하고, 살아남은 신하들을 향한 피바람은 거두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살얼음판 위 같은 환경이었지만 연산의 의중을 이해했고, 적응해갔다.

5장 무너진 절대군주

연산은 절대 왕권을 위해 유교식 견제장치들을 제거해나갔고, 하급문신들과 급기야 대간들에게까지 가마를 매게 하였다. 그리고 사냥이나 야외 나들이를 즐겨했던 연산은 한 번 움직이면 행차가 지나가는 주변의 민가를 다 비우게 했고, 궁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왕 전용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궁의 기생들을 천 명으로 늘려서 데려오도록 했고, 그 중에서 용모와 재주가 빼어난 자는 흥청이 되었다. 또한 연산은 사냥을 위하 동물원을 만들었고, 날마다 사냥과 연회가 이어졌으며 나라 안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다 결국 박원종이라는 자가 군인들과 백성들을 모아서 군사를 평성하였고, 사태를 파악한 시종이나 내관들, 갑사들은 도망가 버렸고, 연산은 옥새를 진성대군에게 주었고, 그가 경복궁으로 가서 즉위하니 곧 중종이었다. 그 뒤 두 달여 만에 병이 심해져서 죽게 되었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대로 부인 신 씨의 곁에 묻히게 되었다.

느낀 점

재미있었고, 연산이라는 왕은 나쁜 것 같기도 하고, 불쌍한 것 같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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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4 세종문종실록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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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추천]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04 세종. 문종실록

2014.1.9.이지원

1장 임금 위의 임금

태종은 갑작스럽게 상왕으로 물러앉았고, 세종은 두려웠다. 권력은 온전히 상왕 한 사람의 것이었고, 세종은 철저히 몸을 낮춰서 모든 것을 상왕의 뜻에 따랐고, 신하들과 의논 끝에 내린 결론을 언제나 태종과 의논하겠다는 말이었다. 상왕 태종은 여유를 얻었고, 대간들의 잔소리를 듣거나 하는 건 모두 세종의 몫이었다. 그리고 세종 2년에 대비인 원경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아픔을 알았던 세종은 슬픔이 컸고, 처음으로 태종의 뜻을 거역하였다. 비록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세종은 능 곁에 절을 세우는 문제도 완강하게 자지 주장을 펼쳤다. 세종은 태종에게 태상왕의 존호를 올렸고, 태종은 마음껏 취미생활을 즐겼지만 얼마 뒤 태종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2장 태평성대를 꿈꾸며

태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세종은 진짜 임금이 되었고, 신하들은 기대가 컸다. 그리고 신하들은 태종의 카리스마에 기 한 번 펴보지 못해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졌던 모양이었다. 세종은 태종의 일생과 결단력은 존경했지만 피 냄새나는 정치방식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세종은 신진 학자 그룹을 날개로 삼아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완수했고, 즉흥적인 결정을 경계하였고, 모든 일에 분명한 근거를 갖기 원하였다. 세종은 토론본연의 목표에 충실하고, 가장 나은 방안을 찾았다. 또 대충 하는 법이 없었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다. ‘고려사도 많은 수정으로 만들어졌고, 결국 세종은 완성된 고려사는 볼 수 없었다. 세종은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열심히 공부하며 토론을 앞세웠다. 또한 끊임없이 생각하여 새로운 일을 만들고,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임금이었다. 그렇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세종의 카리스마는 형성되었다.

3장 백화만발의 시대

세종의 집현전 사람은 특별했고, 장서각을 지어 연구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물품 공급도 아낌없이 하였다. 그렇게 점차 기틀이 잡히고 인원이 늘면서 학무 여구, 저술 등의 일을 맡게 되었다. 집현전의 자문은 권위를 갖게 되었고, 저술 작업도 본격화 되었다. 그리고 조선에는 물시계인 자격루가 만들어지고 일정성시의라는 별시계, 해시계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세종은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며 여러 곡들을 만들어냈고, 보태평과 정대업 등을 만들었다. 1443년에 세종은 그의 인생 최고의 걸 작품인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점차 사라져서 세종은 본격적으로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4장 명군을 도운 명신들

장영실은 동래의 관노 출신이었는데, 그는 당대 세계 최고수준의 기계기술자였다.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옥루를 만들어냈지만 그가 제작한 안여가 부러지면서 곤장을 맞고 직첩을 회수 당했다. 그리고 음직으로 벼슬을 하다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최윤덕은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웠고, 폭행 사거 같은 것도 없어서 문신들로부터도 존중받았다. 세종은 야인정벌을 성공하고 돌아와 정승으로 임명하였다.

5장 준비된 임금, 문종

세종의 장자 향은 여덟 살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자는 반듯하고 의젓하며 총명하였다. 세종은 그런 세자가 믿음직스러웠다. 세자는 세종의 요구에 착실히 따라주었고, 신중하며 차분하고 끈기 있었다. 그는 스물이 넘어서부터는 세종 곁에서 실무를 배우고, 세종을 돕기도 하였다. 실록은 그렇게 준비된 문종을 말수가 적었지만 논쟁이 일면 노성한 대학자로 당할 수 없었고, 천문을 잘 알아서 일기예보가 매우 정확하고, 효성이 지극했고, 각종 기술에도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문종은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산모인 현덕왕후가 세상을 뜨고 만다. 세종은 30대 중반을 넘기며 각종 병에 시달렸는데 결국 세종은 세자와 대군들에게 각자에 능력에 맞는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떴고, 얼마 뒤 세종은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종기를 앓고 있었는데 재위한 뒤 2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도 없는 어린 단종은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다.

느낀점

재미있었고, 문종이 왕이 되고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죽은 게 불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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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2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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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그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2 태조, 정종실록

2013.1.7.이지원

1장 개국과 역성의 세월

이성계가 왕이 되고 왕 씨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에 왕 씨들을 거제도와 강화도에 격리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 하기로 하였다. 태조는 두 부인이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62녀를 낳았지만 남편이 왕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모두 전장을 누비기도 하고, 개국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역할을 하였다.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은 현비인데 21녀를 낳았다. 근는 담대함과 결단성을 갖추었고, 고비마다 훌륭한 자문역을 해주었다. 하지만 아들을 세자로 만들고 싶어서 태조를 설득하였다. 결국 태조는 막내아들인 방석이를 세자로 택했고, 이것은 아주 무리한 수였다. 그리고 태존격리시켰던 왕 씨들을 다시 풀어주었는데 투표를 한 결과 왕 씨를 제거해야 한다는 표가 많이 나와서 결국 왕 씨들은 강화나루와 거제 바다에 던져졌다.

2장 새 술은 새 부대에

태조는 개국 초부터 도읍을 옮기고 싶어 했었다. 태조는 도읍을 바꾸기로 마음먹었고, 대신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다가 현재의 경복궁 근처에 도읍을 옮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종묘와 궁궐은 태조의 뚝심으로 공사한지 1년이 되지 않아 완성되었다. 그리고 궁궐의 완공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열렸을 때 정도전이 즉석에서 지은 경복궁이라는 이름이 궁궐의 이름이 되었다. 정도전은 대조의 후원을 받으며 나라의 중요할 일들을 관리하였고, ‘고려사를 편찬하였고, ‘사시수수도진도등을 지어 군사훈련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 때 정안군 이방원은 어린 이복동생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니 방석이가 세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직 자신에게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도 되기에 나쁜 상황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3장 제 3의 변수 홍무제

이방원과 정도전 세력 간의 대립이 서서히 표면화 되는 가운데 조선과 명나라 간 외교 갈등이 중요 변수로 떠올랐다. 명 황제 홍무제는 조선 사신을 죽도록 패기도 하고, 조선 사신을 입국하지 못하게도 하였다. 결국 태조는 이방원을 명나라로 보내게 되었는데 예상과 달리 홍무제는 방원을 국빈으로서 최상의 예우를 했다. 이렇게 이방원의 중국 방문으로 잠시 완화되었던 조, 명 간의 갈등은 표전문 문제로 인해 다시 악화되었다. 그런데 현비의 병세가 악화되었다가 결국 현비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태조는 직접 현비를 묻을 자리를 찾아서 돌아다녔다. 결국태조는 취현방에 묻기로 하였고,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정도전은 남들보다 앞선 진보성과 거침없는 일처리로 가는 곳마다 논란을 일으키고 적을 만들었지만 태조가 보호했기에 돌을 맞지 않았다. 그는 태조에게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면 악역을 자처했고, 태조가 안쓰럽게 보이면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둘을 갈라놓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4장 왕자의 난

1398년에 조, 명 간에 긴장을 몰고 온 홍무제가 죽었고, 태조는 완자, 종친,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병을 해산하고 관군에 편입시키고, 사병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들을 모두 국가의 헌납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때 이방원은 위기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질 지금이 다시없을 기회라 생각하고 100여명을과 함께 조금의 무기와 막대기로 광화문 앞으로 내달았다. 정도전은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자였던 폐세 자는 궁성을 나서서 죽게 되었고, 그의 형도 동생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태조는 많은 것을 잃었고, 사랑했던 사람들, 지위와 명예, 자부심을 잃게 되었다.

5장 임시 군주 정종

난이 있고 난 후에 태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다. 그렇게 조선의 2대 왕이 된 영안군, 즉 정종은 나라의 중대사를 방원과 대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냥이나 겨구를 즐겼다. 그 때 이방원은 공신 책봉을 통해 샐운 주류로 떠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종에게 정안군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소리쳤고, 결국 정종은 정안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마침내 이방원은 미래를 기약 받았고, 얼마 뒤 정종은 자신의 역하이 다했음을 알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아버지 태조에게 효성스러웠고, 자식은 낳지 못했지만 정안왕후와 금슬이 좋았다. 상왕으로 물러나 격구를 즐겼지만 죽고 나서는 왕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느낀 점

정릉 이야기가 나와서 친근한 느낌이 들었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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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1 개국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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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01 개국 지은이 박시백

2014.1.6.이지원

1장 북방의 호랑이

고려 후기 1250년대에 수령의 분노를 산 이안사의 무리가 전주에서 빠져나와 삼척현으로 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전주의 그 수령이 신임 사또로 부임해오는 바람에 그들은 다시 동북면으로 갔다. 이안사는 자신을 따라온 160여 호와 자리를 잡고 인근의 고려인들을 규합해 나갔고, 얼마 뒤 이안사는 천여 호의 수장으로 자리 잡았는데 어느 날 몽고 군대가 이안사에게 항복을 권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안사는 항복을 했고, 그 대가로 몽고로부터 벼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00년 뒤 이안사의 증손인 이자춘은 원제국이 망할 것이라 예상하고 고려로 가게 된 것이다. 이자춘은 공을 세웠고, 공신의 가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고려가 전란에 휩싸이고 백성들이 피난보따리를 싸야 했다. 그렇게 공민왕은 불운했고, 그 불행이 이성계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이성계는 고려군의 백분의 일 정도 되는 병사로 멋지게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나하추군의 진군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고려를 대표하는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로도 많은 전쟁이 이어졌지만 이성계는 출전하면 반드시 이기고 돌아왔고, 그에 따라 벼슬도 높아지고, 불패의 명장으로서 명성과 위신도 높아갔다.

2장 혁명을 꿈꾸는 자

공민왕은 권문세족을 제압하여 토지집중 문제를 해결하고,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를 면천시켜 양인 수를 늘려서 나라 재정을 건실케 하려고 했으나 끝없는 외침과 권문세족의 반발, 신하의 반란까지 경험하였고, 노국공주가 산고 끝에 죽고 말게 되었다. 부인의 죽음으로 왕은 무너졌고, 왕은 스님에게 자신 대신 나라와 백성을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렇게 스님은 신돈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후 관복을 입게 되었고, 권문세족은 반발하다가 몇몇이 관복을 벗게 되자 조용하게 되었다. 신돈은 새 인물들을 요직에 앉히고, 힘 있는 대신들을 정리해 나가고, 과거제를 개혁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그러나 신돈 역모 사건이 터졌고, 신돈은 목이 잘리게 되었다. 그렇게 그의 죽음으로 개혁은 끝났고, 왕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공민왕은 자신의 아이를 가지려고 모두 죽이겠다는 농담 같은 말을 하였고, 이 말을 들은 내시와 다른 사람들은 공민왕을 죽이게 되었다. 이 일은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는데 결국에는 이인임에 의해 발각이 되었고, 이인임은 왕을 만들어야 한다며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소문이 돌고 있는 왕의 아들 모니노는 우왕이라 불리는 왕이 되었다.

3장 위화도 회군

우왕은 10대에 들어서서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좋은 왕이 되어보려고 공부와 경연에 열심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도성 골목에서 개, 닭 사냥을 즐기고 결혼 앞둔 처자를 빼앗는 등 지냈다. 그래도 이인임 등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았지만 노장군 최영만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다. 왕은 잔소리를 하는 최영에게 마음이 갔고, 스물을 넘기면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졌다. 그래서 왕은 최영과 이성계와 함께 개혁을 계획했고, 그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그렇게 왕은 소원대로 권신들을 몰아내고 최영은 권력의 정점에 서고 이성계도 권력 핵심부로 진입을 하게 되었다. 왕은 원하던 바를 이루었지만 최영마저 등을 돌리면 끝이기에 최영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왕은 최영만 자신의 편이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최영은 명나라와 전쟁을 하자고 하였고, 이성계는 반대하였지만 왕은 허락하였다. 그런데 철없는 왕이 최영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이 싫다고 하였고, 결국 최영은 남게 되었다. 최영은 자신의 군사들을 이성계에게 주어 보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왕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없애겠다고 하며 다시 궁으로 돌아왔고, 최영은 이성계 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그렇게 결국 최영은 죽고 말았다.

4장 고려를 지켜라

회군 세력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왕은 이성계, 조민수의 집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허무한 실패로 끝나버렸고, 왕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우왕의 아들, 창왕이 왕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폐위되었고, 아버지인 우왕이 있는 강화로 가게 되었다. 그 뒤 정창군이 등 떠밀려서 보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 공양왕이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 되었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이색 부자와 조민수를 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왕은 이색 부자와, 이숭인 등을 유배조치하고 조민수는 폐서인하라고 하는 등 관련된 이들의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그런데 우왕과 창왕을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죽여야 한다며 신속하게 결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성계 측은 이색의 죄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려대었다. 결국 왕은 이색은 무죄로 하고, 조민수는 유죄로 인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의 편에 서던 정몽주는 이색 계열과 구세력들을 불러들여서 조정의 요직들을 장악해버렸고, 이로 인해 조정은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으로 구분되게 되었다.

5장 역성혁명

양자 간의 긴장이 유지되던 때,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정몽주는 조준, 정도전 등 이성게 파의 사람들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왕에게 상소를 올리고 엎드려 시위를 하였다. 이렇게 이성계 권력이 무너질 것처럼 보일 때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게 된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으로 병문안을 간다. 그렇게 정몽주와 이성계가 환담하는 사이에 이방원 네는 정몽주를 죽이겠다고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그렇게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뒤로 폐위된 왕은 원주로 옮겨졌고,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

느낀점

만화책이라서 재미있었지만 요약하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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