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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

(독후감) 타나토노트 2

by 김정인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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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 - 베르나르

타나토노트2/베르나르 베르베르 2014.1.9. 김정인

우리는 처음으로 영혼을 추적해보기로 하였다. 우리는 전파망원경을 사용해보기로 하였고 스테파니아가 영계로 떠났다. 스테파니아의 영혼의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은하 중심으로 가기 시작하였다. 그 때 갑자기 신호가 끊겼다. 사실 영계는 블랙홀이고 그녀는 블랙홀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스트라부르 자유유대교 학교의 영계 팀이 세 번째 코마 장벽을 가장 먼저 넘음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 팀을 이끄는 사람은 프레디라는 사람이었는데 체구가 작은 장님이었다. 그 사람은 우리에게 모흐3 너머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곳에는 주황색 평원이 있고 사자들이 거대한 행렬을 이루고 있으며 그저 뭔가를 기다리며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타나토노트들은 그 사람들 위를 날아서 빨리 통과할 수 있다고 하였다. 프레디는 윤회의 마지막 단계에 와 있었고 곧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부러워하였다. 프레디가 이끄는 타나토노트팀은 다시 한 번 더 영계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프레디의 제자들이 하나 둘씩 죽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재빨리 그들을 깨웠고 그들은 분노에 떨면서 하샤신이 자신들을 죽이려 했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그들과 싸우기 시작하였고 많은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다. 우리는 그들을 모흐1 안으로 유인하였고 그들이 기억의 거품들에게 충격을 박아 어쩔 줄 몰라 할 때 그들의 생명줄을 잘라버렸다. 결국 그들은 3백 명의 사람을 잃었다. 전쟁의 규모는 갈수록 커졌고 우리 연합군의 병력도 계속 늘어났다. 그렇게 싸움은 계속 되었고 우리는 그것을 천국 전투라 부른다. 그 전투는 협상을 함으로써 끝이 났다. 그 후 우리는 모흐6까지 가는 것에 성공하였고 그 다음 단계에는 신이 있을 거라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가 영계 탐사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나는 내 친구들과 로즈를 구하기 위해 영계로 갔다. 나는 천국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로즈를 붙잡는 것을 성공하였다. 우리는 다시 이승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그러던 중에 우리는 지난번에 프레디의 제자들을 죽인 그 자객들과 마주쳤다. 프레디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었고 그 싸움은 아망딘이 대장인 산중장로의 생명줄을 끊음으로써 끝이 났다. 프레디는 유언으로 자신은 다시 환생할 것이며 환생한 그 아이는 자신이 쓰던 물건을 알아볼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승으로 돌아왔고 로즈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로즈는 다시 한 번 더 영계로 가보고 싶어 했고 우리는 영계로 떠났다. 우리는 그곳에서 천사들을 만났고 여러 이야기를 나눈 후 이승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라울한테 문제가 생겼다. 사탄이 그에게 그가 몰랐던 비밀을 말해준 것이다. 그는 그 이후 술에 찌들어 살았고 나의 비밀을 누설해 버렸다. 나는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했지만 첫 번째 것을 듣고 말았다. 그것은 우리부모님은 아이를 못 낳는 분들이셔서 나의 형과 나는 양자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배신감이 들었지만 곧 내 양부모님께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 비밀을 끝내 듣지 않았고 아내와 그것을 알아내려 노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영혼이 천사한테 심판을 받는 내용을 담은 기사가 프티타나토노트 화보에 실렸고 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지금 착하게 살면 다음 생에서는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갈수록 착해져 갔고 강도, 말다툼, 폭력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기부도 열심히 하기 시작하였다. 자기가 천국에 가서 시험에서 떨어져 가게 될지도 모르는 불행한 가정의 수를 줄이려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프레디 2세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는 얼마 뒤에 태어날 우리 아이가 프레디 2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아기가 태어난 지 1살이 되던 날 우리는 우리 아기에게 실험을 해 보았고 우리 아기는 프레디 2세가 아니었다. 나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고 왠지 내 아기가 내아기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나는 로즈와 싸웠다. 내가 싸움 뒤 기분 나빠하고 있을 때 라울이 집에 찾아왔고 사탄이 얘기해줬던 두 번째 비밀을 말해 주었다. 나와 전생에 부부였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하였다. 부부가 열렬히 사랑하고도 아이를 낳지 못하면 내생에 만나 한을 풀 수 있고 그는 내 전생의 부인이 누군지 이미 알아 논 뒤였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 보았고 전화를 박은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하였다. 나는 그녀와 통화를 계속했고 그 때 나의 아들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결국 그녀한테 미안하다고 나를 잊어달라고 말하였다. 한편 타나토노트 관련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하였고 영계는 끊임없는 관광객들로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자기 인생은 이미 망했다 생각하여 자살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영게는 관광객들과 자살한 사람들의 유령으로 포화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나는 프레디 2세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게 우리의 유일한 낙이라 생각하여 나의 영계탐사에 대한 관심은 점점 시들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테파니아가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이유를 물어보니 세상 사람들이 다 너무 착해져서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고 하였다. 스테파니아는 싫증을 느꼈고 범죄는 있어야 한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녀는 일단 영계로 놀러가지 못하도록 영계로 놀러간 사람들의 생명줄을 모두 끊어버렸고 영계로 놀러가는 사람들은 점점 없어졌다. 그녀는 추종자를 모으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추종자는 내생에 대란 두려움 때문에 빨리 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비행기가 우리의 연구실을 덮치는 바람에 죽었다. 우리는 생명줄을 안단 것을 신기해하여 영계로 갔고 천사들이 우리를 급히 찾고 있는지 빠르게 천국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였고 이제 사람들은 이곳에 대한 기억을 잃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들은 태풍을 보내어 영계와 관련된 정보나 물건들을 모두 없애버리고 사람들의 기억을 지웠다. 우리는 다른 영혼들과 똑같이 환생하게 되었고 나는 내가 타나토노트였다는 것을 잊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는 타나토노트다 라는 말을 되뇌면서 블랙홀의 깊은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느낀 점: 이 다음 시리즈를 읽어보고 싶고 책이 너무 재미있었다. 프레디 2세가 진짜 프레디가 아닌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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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5 단종세조실록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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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05 단종. 세조실록

2014.1.9.이지원

1장 어린 임금과 장성한 대군

조선 6대 임금인 어린 단종은 열두 살의 나이에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 시대는 새 임금이 미성년일 경우 대가 섭정을 하는 데 단종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없어서 의정부가 나랏일을 대신하게 되었다. 왕은 형식상의 결재만 담당했고, 실제 모든 결정은 의정부에서 이루어졌다. 단종은 이내 안정되었고, 자기 영역을 찾기 시작하였다. 단종은 도망치거나 치기어린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고, 겸허함을 잃지 않으며 성장해갔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은 당대의 어떤 문사에게도 뒤지지 않을 학문적 소양과 교양을 갖추었다. 그는 부왕의 기대에 부응했고, 건강한 신체와 타고난 운동신경이 자랑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자신의 무인적 자질을 자랑하고 싶어 하였고, 자신이 임금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안평대군은 타고난 예술가였다. 시와 그림에 능했고, 당대 최고의 명필이라는 평을 얻었으며 자부심도 형인 수양에게 뒤지지 않았다. 힘이 커진 두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두르이 관계는 경쟁적인 관계로 자리 잡았다.

2장 계유정난

거사를 계획하고 차근차근 내실을 다져 가던 수양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조정에 얼굴을 알리고, 사람들이 하던 수양에 대한 조정의 의심을 누그러뜨려 돌아왔다. 그렇게 여유를 되찾은 수양은 공개적으로 우호 세력 확대에 나섰고, 수양이 계획한 모든 일은 잘 풀려가고 있었다. 또한 수양은 단종에게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단종은 안 된다고 하였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신하들과 단종의 의심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였다. 얼마 뒤 수양은 고려사’‘세종실록의 편찬을 맡고, 세종을 도와 북방을 개척하였던 유학사,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를 죽이고,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수양은 마지막 남은 함길도 도절세자, 이징옥을 죽이기로 했다. 이징옥은 당대 최고의 무장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 충직성으로 인해 널리 존경받았던 인물인데, 군종들은 이징옥에게 술을 권한 후에 화살과 칼로 찔러 죽였고, 그의 목은 오래도록 북방의 찬바람 속에 내걸리게 되었다.

3장 한 마리 원통한 새

권력은 온전히 수양의 것이 되었고, 단종은 수양에게 최대한 몸을 낮춰 대하였지만 속으로는 임금의 자리만은 지키기로 다짐하였다. 그렇게 단종은 윤대를 시작하고, 경연에 더욱 열심히 참석하는 등 조심스럽게 행보를 넓혀나갔다. 수양은 다시 단종에게 국혼을 주장하고 나섰고, 단종은 반대하였지만 결국 강제로 부인을 맞게 되었다. 단종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서 열다섯이 되었고, 자발적으로 보위를 양보할 눈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양은 단종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유배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 살아남지 못할 것인 걸 아는 단종은 결국 수양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수양대군은 마침내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 상왕이 된 단종은 유명한 청령포에 유배되었지만 홍수의 위험이 있다며 영원 객사로 옮겨 살게 되었고, 사약을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즉위한 지 5, 그의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4장 세조의 치세

수양은 가까운 혈육과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들을 많이 죽였고, 그 살육은 단종을 죽이고 나서야 마무리 되었다. 수양은 집현전을 폐지해버렸고, 또한 경연도 폐지하였다. 이렇게 세조는 건국 이래의 유학자들과 세종이 만들어놓은 유교정치 시스템을 부정해 나갔고, 자신의 일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거나 하면 국문을 받게 하였다. 그렇기에 대신들은 입도 벙긋 하지 못하였고, 누구도 임금의 뜻에 반하느 의견을 낼 수 없었다. 실록 막강한 왕권이 구축된 것이었다. 세조는 모든 권한을 틀어쥔 독재자였음에도 신하들과의 관게는 의외로 거리가 없었고, 크고 작은 술자리들을 많이 열었다. 그리고 세조는 자신은 경연도 폐지하였지만 신하들과 성균관 학생들, 무장들에게는 끊임없이 공부를 권했다. 세조는 상당히 금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가 아꼈던 여인은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뿐이었다. 궁중의 연회나 온천행 등 어디든 부인이 대동하기를 좋아하는 세조였다.

5장 이루지 못한 꿈

세조는 태종과 달리 공신을 우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신하들과의 관계에서는 왕권이 강력해보였지만 대궐을 벗어나면 모두 공신들의 세상이었다. 그렇게 공신들은 힘과 부를 키워나갔다. 출세를 하려면 주요 공신들에게 잘 보이면 그만이었고, 공신들은 단지 세조에게 불충하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 백성들이 점점 불만에 쌓여갈 때, 이시애라는 자가 나서서 대규모의 반군을 만들었고, 그 힘을 키웠다. 그것을 안 세조는 조카 구성을 총사령관으로 삼았고, 권군은 반군과의 격렬한 공방이 오다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시애가 군사를 거두고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결정적 오판을 하고 말았고, 그 전투 이후에 반군은 힘이 커지기 시작했지만 다 이긴 싸움을 놓친 반군은 이탈자가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였다. 결국 반군은 와해되어 버렸고, 이시애는 도망치다 옛 부하들에게 잡혀 현장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그런데 건강한 신체가 자라이었던 세조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세조는 세자에게 보위를 넘겨주고는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하여 즉위한 조선 제 8대 임금이 예종이다.

느낀 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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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타나토노트 1

by 김정인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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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베르베르-타나

타나토노트1/베르나르 베르베르 2014.1.7. 김정인

 

나에게 죽음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사람은 우리 동네 고기 집 주인인 뒤퐁씨였다. 뒤퐁씨가 죽었을 때 나는 네 살 이였고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나는 죽음이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증조모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누가 죽으면 울어야 하며 죽음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 후로 누가 죽을 때마다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떠올리며 울어댔고 사람들은 나를 보며 흡족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자동차 사고를 당했고 세 시간 동안 기절을 했다. 그것이 나의 첫 죽음이었다. 어느 날 나는 삼촌이 돌아가셔서 묘지에 가게 됐고 그곳에서 라울이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빨리 친해졌고 라울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열네 살이 되던 해 라울은 나에게 임사체험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 임사체험을 한 사람 중에 빛이나 터널을 본 사람이 있고 그는 그 일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코마 상태에 빠졌을 때 아무것도 못 봤다고 말해주었고 그는 내가 그때 충분히 죽지 않아서 그랬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병원에 갔다. 나는 그곳에서 죽은 사람을 보며 죽음은 혐오스럽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얼마 뒤 나는 라울이 지방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라울이랑 헤어지게 되었다. 열여덟 살이 되면서 나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우연 이였는지 필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전문분야로 마취와 소생법을 선택하였다. 서른두 살이 되던 해 라울이 나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나에세 만나자고 하였다. 라울은 이제 국립과학연구소의 생물학 분과 연구원이 되어있었다. 우리는 임사체험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실험을 하기 시작하였다. 약물을 투입시켜 코마 상태로 만든 다음 전기 충격을 가해 다시 살려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코마상태에 빠진 죄수들은 그대로 다 죽어버렸고 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열사람이 떠나갔고 우리는 더욱 열심히 타나토노트 선발 시험을 했다. 또다시 다섯 명의 인간 기니피그가 선발되었고 우리는 그들을 영계 탐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타나토노트라 불렀다. 결국 그 실험도 실패하고 말았다. 몇 명은 식물인간이 되었고 몇 명은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펠릭스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텨온 사람이었다. 뱃속에서부터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에 상처만 남기고 죽이지 못하였고 어렸을 때 그의 엄마가 그를 물에 빠트려 죽이려 했지만 그는 수영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그는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였고 284년의 징역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나가기 위해 온갖 실험을 받았고 부작용으로 몸도 많이 망가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는 징역을 148년으로 줄일 수 있었다. 그는 감형에만 관심이 집중되어있었고 타나토노트 실험을 하면 80년을 감형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 실험에 지원하였다. 그는 영계에 간사람 중에서 최초로 살아남아서 돌아왔고 그는 영계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는 그 일로 교도소에서 나올 수 있었고 유명해졌다. 우리도 실험이 성공했다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 일을 시작으로 많은 타나토노트들이 영계에 갔다 오는 것을 성공하였고 점점 영계에 대한 정보가 많아졌다. 하지만 코마 플러스 21분에 장벽이 있었고 그 장벽을 넘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 브레송이라는 사람이 그 벽을 넘는 것을 성공하였고 현실세계로 돌아오자마자 그 장벽 뒤에는 지옥이 있다면서 절대로 죽지 말라고 하였다. 그 사건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자살률은 줄어들었으며 담뱃가게는 문을 닫았고 약국은 나날이 번창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는 스테파니아 키켈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라마교 신자였고 명상으로 영계를 갔다 올 수 있었다. 우리는 그녀에게 흥미를 가졌고 곧이어 그녀가 두 번째 장벽을 넘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첫 번째 장벽을 넘어가면 자신한테 상처를 줬던 일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 일을 하나하나 정당화 시키면 두 번째 벽을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벽 뒤에는 쾌락이 있다.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은 유체이탈을 할 수 있어 자신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 그 사람을 원인모를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뒤 며칠 뒤 나는 종교인으로 추정되는 사람한테 그 일을 당했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고 영계 탐험을 하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느낀 점: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준책이었고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상력이 정말 뛰어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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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3 태종실록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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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 박시백의 조

조선왕조실록 03 태종실록

2014.1.8.이지원

1장 전설이 된 태상왕

태종 이방원은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물리치고 왕이 되었다. 그는 경쟁자는 없지만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들을 죽여가면서 등극한다는 건 명문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므로 아버지의 용서를 구해야했다. 하지만 문안인사를 드리고 잔치를 베푸는 등 성의를 보여도 태조의 마음은 풀리지를 않았다. 그러다 도읍을 한양에서 개경으로 옮겨지고 태상왕은 개경에 머무르지 않고 금강산, 오대산 등을 다녔다. 그리고 조사의의 난이 일어났다. 이 싸움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반란이다. 그러나 전쟁영운인 늙은 태상왕은 패하고 마는데 패배 과정이 허망하리만큼 시시했다. 포로로 잡힌 김천우란 자가 관군이 4만 명이 넘는다고 말하였다. 그날 밤 그 말이 퍼져서 많은 도망병이 속출하였고, 한 명이 지른 불을 신호로 하룻밤 사이에 와해되어 버렸다. 그 뒤 태상왕은 체념한 듯 바깥 행차로 많이 줄었고, 더 이상 긁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신들의 집을 짓느라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의 소나무 숲은 베어내었고, 태사왕은 눈물만 흘렸다 한다. 귀환한 후로 태조는 6년을 더 살다 눈을 감았고, 그의 능은 바로 건원릉이다.

2장 사냥이 끝난 후

태종은 신하들처럼 과거를 통해 벼슬을 시작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어떻게 패거리를 만들고 어떻게 뇌물을 주고받는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끼리 새로운 힘을 만들어냈고, 위협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을 도운 공신들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이거이와 이저 부자를 본보기로 삼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방원과 결혼을 한 원경왕후 민씨는 남편을 왕으로 만드는 일에 발 벗고 나섰고, 그녀는 나라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하루뿐이었고, 태종은 왕이 되자마자 젊은 여인들을 찾기 시작했고, 그녀는 격렬하게 항의해보지만 태종은 아예 후궁제도를 법제화하여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제의 나이 열한 살에 마침내 세자에 책봉되었고, 민씨가에 대한 태종의 경계심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세자는 기대에 별로 부응하지 못했다. 공부를 게을리하고, 식사예절이 반듯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태종은 갑자기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신하들은 선위를 항상 반대하였지만 태종은 옥새를 세자에게 가져다 놓고, 세자는 다시 가져오는 등 이 일이 며칠 계속되었다. 그러다 영리한 이숙번이라는 사람이 전하서 보위에 계셔야 한다며 말하였고, 태종은 옥새를 옥새 보관소에 갖다놓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민씨들에 대한 경계심이 풀린 듯 보였다.

3장 공신의 운명

태종은 다시 민씨들이 위험하다고 생각하고는 민구무, 민무질이 선위의 뜻을 밝혔을 때 기쁜 표정을 짓고, 뜻을 거두자 실망한 얼굴을 하였고, 아들이 하나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으로 태종은 그들의 공신 녹권을 빼앗고, 관직 임명장을 회수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죄인 민무구, 민주질을 자진하게 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민무회와 민무휼이 세자에게 버릇없게 굴어서 그들을 자진하게 하였다. 부인인 민 씨네 형제들을 죽인 태종은 이렇게 민 씨 가문에 왕권을 위협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잘 모른다. 더한 말을 한 이거이를 살려주었는데 왜 민 씨들에게만 가혹했을 지는 아직 의문이다. 핵심공신으로 죽는 날까지 영화를 누린 사람은 조영무와 하륜이다. 조영무는 태조의 눈에 들어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지만 태조를 배심하고 태종에게 붙었다. 배운 것이 없었지만 마침내 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하륜은 일처리가 빠르고 거침없었고, 그로 인해 비방도 많이 받았다. 하륜은 항상 불충을 보이고도 용서받았고,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이숙번은 과거시험에서 급제하여 태종이 군사부문에 앉혔고, 나중에 재상에 임명하였다. 이숙번은 하륜처럼 매사에 거침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숙번이 세자에게 말을 이상하게 전하고, 병을 핑계로 대궐 출입을 하지 않았고, 태종은 그를 곱지 않게 보았다. 그러다 태종은 이숙번을 지방에 나가 살게 하였고, 그는 끝까지 복권되지 못하고 죽었다.

4장 현실주의자 태종의 개혁

태종에게는 신앙과도 같은 정치적 신념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강력한 왕권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왕권강화와 유교적 이상 구현이라는 두 목표가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었고, 신하들은 공부하도록 압박하였고, 사관을 두어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였다. 관원들과 태종이 가장 많이 부딛친 것은 사냥과 관련해서였는데 왕의 사냥 행차를 엄청난 비용을 필요로 하였다. 백성들은 가을걷이를 끝내야 하고, 높자란 풀들을 정리해야했다. 또한 행차 인원만 해도 수천 명이었고, 이들을 대저해야 할 관할 수령은 긴장하고, 고통은 백성들에게 떠넘겨 졌다. 태종은 결국 언관들의 반대에도 사냥에 나서게 되고, 태종은 변명도 하고, 솔직한 고백도 하고, 사과도 하였지마 며칠 후에는 또 사냥을 나가고는 했다. 불교 개혁은 이미 태조 시절 도첩제가 실시되었고, 불교를 옹호하던 태조가 죽자 태종은 저로가 승려의 수, 절의 소유지를 대폭 줄여버렸다. 태종도 급할 때는 승려들을 찾았는데 왕비가 위독했을 때 왕비의 병이 낫지 않으면 불교를 없애겠다고 하였고, 다행히 왕비의 병이 나아졌고, 태종은 회암사에 땅과 곡식을 내려주었다.

5장 양녕과 충녕

유학자들은 세자를 훌륭한 임금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빡빡한 생활을 요구했지만 어린 세자는 공부 체질이 아니었다. 세자는 나이를 먹어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활쏘기나 사냥을 좋아했다. 그러다 세자가 열일곱 때 여자를 알게 되고, 그 기생을 잡아 두었다. 세자는 온갖 핑계로 공부를 멀리하였고, 궁중에서 매를 키우며 장안의 건달들을 궁 안으로 불러들여 어울리기도 하였다. 태종은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등 네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효령은 말수가 적은 수마일 맨이었고, 넷째 성녕은 늦둥이로 총명하고 반듯하여 왕과 왕비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리고 셋째 충녕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공부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왕자는 종친일 뿐 임금이 될 수 없었다. 충녕은 세자에게 도발적인 행동을 여러 번 거듭하였고, 선생들은 이만 열면 충녕 타령을 하였다. 충년의 튀는 행동은 계속 되었고, 세자의 일탈행동도 계속 되었다. 갖은 핑계로 서연을 멀리하고 사냥을 즐기고 주색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녕이 어리 나이에 죽고 말았고, 얼마 뒤 태종은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서 폐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그 날 태종은 목놓아 울었고, 양녕는 광주로 떠나게 되었다.

느낀 점

재미있었고, 태종이라는 사람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동우

조선왕조실록

by 양동우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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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양동우

조선왕조실록

박시백 지음

1장 북방의 호랑이

이안사 1250년 고을 전주를 빠져나와 북쪽 끝 동북면으로 간다. 그곳에서 몽고에게 항복을 한다

이안사의 증손이자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개경으로 가서 원에게서 동북면 지역을 되찾아 온다

공민왕 몽고의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원제국 황후의 오라비 기철을 숙청하고 옛땅까지 얻었지만 여진 원 왜구들이 고려를 침범해오면서 자연 개혁은 그 기회를 잃었다

이성계는 개경에 있다가 동북면으로 돌아와 홍건적과 싸워 이긴다 그리고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와 함흥평야에서 싸워 이긴다 크고작은 전쟁들이 고려를 괴롭혔지만 이성계가 출전했고 출전하면 반드시 이기고 돌아왔다

2장 혁명을 꿈꾸는 자

이색은 고려 최고의 명문하원을 탄생시킨다 그들은 배우고 익히고 토론하며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100년에 걸친 무신란과 100여녕에 걸친 원의 지배는 권문세족을 낳았다 권문세족들은 이땅저땅 모두 빼앗고 사람들을 종으로 만들었다 땅뺐기고 종도되기 싫은 사람들은 절로 들어

공민왕은 나라 재정을 건실케 함은 물론 국방도 튼튼히 하는 것이 다짐이였다 그러나 왕비가 죽고 정치고 뭐고 다 싫어졌다 그래서 왕은 신돈이란 승려에게 전권을 위임한다

신돈은 개혁을 시작한다 힘 있는 대신들은 정리하고 새 인물을 요직에 앉혔다 그리고 빼앗은 땅은 돌려주고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은 양인 신분을 되찾게 하였다 또 성균관을 전보다 더 크게 복구하면서 정비된 과거제도를 통해 대거 관계에 진출할수 있었다 허나 역모사건이 터지면서 목이 잘렸다

신돈이 죽으면서 공민왕은 딴사람이 되었다 어느날 익비가 태기가 있다 하니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모두 입막음을 한다고 했다 그러자 앉아서 죽을수 없어 왕을 죽인다

왕이 죽자 공민왕의 아들 모니노가 왕이 되었다 그의 나이 10살 이었다 임인임은 왕의 후견인으로 권력을 한손에 틀어쥐었다

정도전은 원 사신을 접대하라는 말을 듣고 씩씩거리며 경복홍의 집으로 찾아가 북원가 다시 회천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고 말하자 유배되었다 2년이 지나서 풀려났더니 개경으로는 들어오지 못했다 유배된 때로부터 8년이 지나고 결국 그는 역성혁명을 하기로 한다

3장 위화도 회군

왜구들은 내륙까지 들어와 곳곳을 유린했다 다행히 고려엔 두 명장이 있었다 60대의 최영 40대의 이성계였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갔다 첫 만남부터 속을 열어보이며 의기투합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우왕은 사춘기에 접어든다 그는 빗나가기로 하였다 사춘기 왕의 비행은 10대를 다 보낼때까지 계속되었다 스물을 넘기면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졌다 그래서 최영과 이성계의 도움으로 당대의 실권자들인 임견미 염홍방 도길부와 그 일당들을 잡아 목베었다

최영은 이성계를 믿었다 하지만 이성계군이 반란 하여 최영을 참수시킨다

4장 고려를 지켜라

정도전은 모든땅을 국유화 하여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공양왕 그는 바보스러운 이미지 때문에 꼭두각시 왕으로 되었다 하지만 그는 꼭두각시가 되는 쪽을 거부했다 그는 논거를 대고 감성에 호소하고 못 들은척 하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색 이승인 우현보 심덕부 이종학 등 이색 계열과 구세력들은 대거 유배지에 불려들여서는 뚜렷이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5장 역성혁명

한번 빈틈이 보이면 쉴세없이 몰아치는 정몽주의 공세에 이성계의 권력이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한다 그리고 공양왕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렸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폐위된 왕은 원주로 옮겨졌고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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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림 2014.01.16 21:26
    아~ 그리고 조선의 역사가 시작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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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03 11:19
    동우애^*^ 암기의 영역에서 어려운 단계를 넘어서는 너가 참 좋아보인다. 멋져멋져~^*^ 끝내 해내는 동우~!!! 암기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즐거움을 알아가는 모습을 옆에서 함께 볼 수 있어서 참 좋다. 화이팅~!!!
  • profile
    사랑 2014.02.09 00:57
    동우야 독후감이 너무 많이 블로그에 안 올라와 있네... 너랑 약속을 지키며 사는 일은 뭔지 알지? 한다면 하는거... 무리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자존감이 생기고 재미도 생긴다고 하셨잖아. 밀린 독후감들 여기 블로그에 올리는 것도 잊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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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7 연산군일기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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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07 연산군일기

2014.1.13.이지원

1장 대간권력 vs 연산

성종은 빡빡한 군주수업을 받은 자신과는 달리 세자에게는 느슨한 세자수업을 받게 하였다. 그 시절 연산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모범생도 아니었다. 연산은 소리 없이 적당히 하루하루를 보냈고, 어느 날 비로소 연산은 친어머니의 존재와 죽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아버지와 신하들에 의해 폐비된 뒤 사약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연산의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사사건건 대간의 공격을 받고 해명하다 두 손을 들고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연산의 가슴은 투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신하들은 성종과는 전혀 다른 군주임을 신하들은 알게 되었고, 신하들은 집단 사직을 하며 연산이 복직을 명하면 다시 사직하기를 반복하는 일이 일상화되었고, 결국 연산은 작전상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2장 무오사화와 왕권의 회복

성종의 3년 상이 끝나고 연산은 폐비 윤 씨의 이장에 박차를 가하여 대간들도 어찌할 수 없게 하고는 마침내 이장을 마치고 묘호를 회묘라 하였다. 이렇듯 연산은 성종과는 정반대로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밀고나갔다. 그는 왕권에 대한 문제의식도 선명했고, 현실적인 힘의 관계도 잘 이해했다. 연산을 대신들에게 예로써 대하면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자극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신의 대간의 공격을 받을 때면 확실하게 막아주기도 하며, 대신들은 대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연산은 자기주장을 펼 줄 알았고, 경연은 빠지는 날이 낳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핑계로 둘러댔다. 어쨌든 연산은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지녔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힘은 강화되어서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것처럼 보였다.

3장 평온 속의 불안

노사신은 성종 조에 들어서서는 삼국사절요’, ‘동문선등을 편찬하는 학자였지만 대간의 지나친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대간들의 주 공격대상이 되었지만 연산과 대간이 부딪칠 때면 언제나 연산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서다가 무오사화 때 보여준 뜻밖의 상황 때문에 역사에 간신으로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연산은 민생문제에 대해서도 나름 신경을 써서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고, 신하들도 세조 때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가졌지만 문득문득 불안감도 찾아들고는 했을 것이다. 연산은 성종처럼 시와 그림을 좋아했고, 사냥을 좋아했는데 둘의 기질은 매우 달랐다. 연산은 성종과 달리 시를 짓기도 하고, 매에다 사냥개까지 마음껏 기르는 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하였다. 그리고 인정전에서 양로연이 열렸을 때 연산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준 예조판서 이세좌는 술은 못했지만 다른 재상들처럼 술을 올렸고, 못하는 답 술을 받았는데, 그 술이 곤룡포에 떨어졌다가 유배당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파직 당하였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이세좌의 가족들을 유배조치한 날 저녁에 연산은 성종의 후궁은 엄 숙의와 정 소용을 죽이고는 계모인 자순대비의 침소로 갔지만 중전 신씨의 만류에 발걸음을 돌려 연산의 할머니인 대왕 대비전에 가서 통곡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녀는 숨을 거두었고, 그렇게 갑자사화는 막이 올랐다. 연산은 폐비의 추숭을 다시 제기하였고, 이 분위기에서도 대간의 다수는 반대의견을 내었고, 연산은 본격적인 복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세좌는 민가로 들어가 대들보에 목을 매게 하였고, 정창손, 심회, 한명회, 정인지, 그리고 윤필상 등을 죽였다. 그리고 한치형을 부관 능지하였고, 한치형의 아들들을 국문장으로 끌어내었고, 가산을 몰수했으며 이극균도 자진하게 하였다. 이렇게 피바람을 불어오던 연산은 멈출 수도, 계속 할 수도 없는 이 일의 해결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이 가혹한 형벌은 이미 죽은 자와 그의 가족에게만 한정하고, 살아남은 신하들을 향한 피바람은 거두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살얼음판 위 같은 환경이었지만 연산의 의중을 이해했고, 적응해갔다.

5장 무너진 절대군주

연산은 절대 왕권을 위해 유교식 견제장치들을 제거해나갔고, 하급문신들과 급기야 대간들에게까지 가마를 매게 하였다. 그리고 사냥이나 야외 나들이를 즐겨했던 연산은 한 번 움직이면 행차가 지나가는 주변의 민가를 다 비우게 했고, 궁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왕 전용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궁의 기생들을 천 명으로 늘려서 데려오도록 했고, 그 중에서 용모와 재주가 빼어난 자는 흥청이 되었다. 또한 연산은 사냥을 위하 동물원을 만들었고, 날마다 사냥과 연회가 이어졌으며 나라 안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다 결국 박원종이라는 자가 군인들과 백성들을 모아서 군사를 평성하였고, 사태를 파악한 시종이나 내관들, 갑사들은 도망가 버렸고, 연산은 옥새를 진성대군에게 주었고, 그가 경복궁으로 가서 즉위하니 곧 중종이었다. 그 뒤 두 달여 만에 병이 심해져서 죽게 되었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대로 부인 신 씨의 곁에 묻히게 되었다.

느낀 점

재미있었고, 연산이라는 왕은 나쁜 것 같기도 하고, 불쌍한 것 같기도 하였다


정우

글로벌 한국사4

by 명화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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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한국사4

지은이:김 정

출판사:풀빛

내용:조선은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와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라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다. 그후 흥선 대원군은 서양 오량캐가 침략했을 당시서양과 회친을 주장하는 것은 서양 오량캐엑세 나라를 파는 것과 다름 없다는 내용의 척화비를 건국 에 세워서 쇄국 정책을 주진하였다. 흥선군은 백성들과 양반들로부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집권10년 만인 1873년 만에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조선의 쇄국을 추진하던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자 조선의 분위기는 끄게 바뀌기 시작했다. 서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상 개화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안으로는 북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밖으로는 중국의 양무 운동과 일본의 문명 개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북학파는 상공어 진흥의 중요성을 알고 청 나라의 문물과 해외 통상을 주장했다. 통상 개화론자인 박규수는 정조 시대에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작고 주장한 북학파의 대표인 박지원의 손자였다. 할아버지의 영향인지 손자인 박규수도 서양의 문물을 들이자고 했으나 1861년 청에 사신으로 갔다가 애로 호 사건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목격했고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저너럴 셔먼 호 사건을 집적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의 구사적 위력을 깨달은 박규수는 서양 세력을 막기 위해서라도 주체적으로 서양 문물을 수용해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화도 조약의 시작은 1875년 영종도 앞바다에서 운요 호라는 일본 군함의 위험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위험 사격으로 조선 군대는 화포를 발해서 운요 호에 대응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운요 호에 탄 일본군들은 영종도에 상륙해서 백성들의 집을 방화하였고 약탈을 하는등 난동을 피우고 돌아갔다. 이것이 이른바 운요 호 사건이다. 그 다음해의 일본은 다시 군함을 끌고와서 운요 호가 공격을 받은 사실을 들먹이면서 개항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일본에 썻던 반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다른 점은 미국은 사격을 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실제로 전투를 했다는 점이다. 18762월에 조선은 일본과 일명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의 강요로 맺어진 조약이니 만큼 강화도 조약은 그 자체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과 조약을 맺은 후 조선 정부와 청 나라는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은 서양의 여러 나라와도 통상울 맺어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호 견제를 유도해서 중립을 유지하자라는 것도 있었다. 1882년 조선은 서구 열강 가운데서 최초로 미국과 조 . 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 미 수호 통상 조약도 강화도 조약과 마찬가지로 불평등한 조약이였다. 이 조약에서도 사법권의 독립을 부정하는 치외법권이명시되어 있었다. 조선은 미국과 조양을 맺은 후 연달아서 영국, 독일 등과도 조약을 체결하엿다. 그러나 프랑스와는 천주교 포교 문제가 걸려 있어서 1886년에 공식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76년 개항으로 시작된 조선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조선의 식민지화의 위험은 한층더 높아져 가고 있었다. 조선은 18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위한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1880년에는 통라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화 정책을 전담하게 했다. 그리고 구신 군대였던 5군영을 재편하여 무위영과 장위영인 2개로 통패합했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새로 만들었다. 별기군의 교관은 일본인이 담당했다. 조선 정부도 일본과 같이 외국의 개화 정책을 배우기 위해서 사정단을 파견했다. 먼저 개항을 한 1876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서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1880년에 파견돤 수산서 대표 김홍집이 주일 중국 대사 황쭌셴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와 논란이 된것도 이 무렵 이였다.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점점 켜져가자 1882년에 임오구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은 개로 생긴 신식군대인 별기군 때무에 소애 받았던 구신군인 들이 폭동을 이르킨 것인데 이 사건으로 구식 군대 월급 지급 책임자인 민겸호와 별기군 교관을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질렸다. 일본인인 별기군 교관이 죽고 공사관이 불타는 피해를 입은 일본은 조선에 배상금을 요구하고 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주둔까지 강요했다. 188412월에는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극진 개화파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하지만 정권 장악은 3일만에 끝났다. 조선은 국내에서 일어나는 쌀 부족 현상 때문에 1889년부터 함경도를 시작으로 다른 여러 지역에도 일본으로 쌀 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렸다 하지만 한 달 전에 미리 일본에 알려야 한다는 1883년에 맺은 통상 규약을 어겼다면서 일본은 조선에 배상금을 청구했다.

느낀점: 이책은 일재시대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데 그곳까지 다 못써서 매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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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4 세종문종실록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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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추천]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04 세종. 문종실록

2014.1.9.이지원

1장 임금 위의 임금

태종은 갑작스럽게 상왕으로 물러앉았고, 세종은 두려웠다. 권력은 온전히 상왕 한 사람의 것이었고, 세종은 철저히 몸을 낮춰서 모든 것을 상왕의 뜻에 따랐고, 신하들과 의논 끝에 내린 결론을 언제나 태종과 의논하겠다는 말이었다. 상왕 태종은 여유를 얻었고, 대간들의 잔소리를 듣거나 하는 건 모두 세종의 몫이었다. 그리고 세종 2년에 대비인 원경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아픔을 알았던 세종은 슬픔이 컸고, 처음으로 태종의 뜻을 거역하였다. 비록 관철시키지는 못했지만 세종은 능 곁에 절을 세우는 문제도 완강하게 자지 주장을 펼쳤다. 세종은 태종에게 태상왕의 존호를 올렸고, 태종은 마음껏 취미생활을 즐겼지만 얼마 뒤 태종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2장 태평성대를 꿈꾸며

태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세종은 진짜 임금이 되었고, 신하들은 기대가 컸다. 그리고 신하들은 태종의 카리스마에 기 한 번 펴보지 못해서 암묵적 합의가 이루어졌던 모양이었다. 세종은 태종의 일생과 결단력은 존경했지만 피 냄새나는 정치방식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세종은 신진 학자 그룹을 날개로 삼아 자신에게 맡겨진 시대적 사명을 완수했고, 즉흥적인 결정을 경계하였고, 모든 일에 분명한 근거를 갖기 원하였다. 세종은 토론본연의 목표에 충실하고, 가장 나은 방안을 찾았다. 또 대충 하는 법이 없었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다. ‘고려사도 많은 수정으로 만들어졌고, 결국 세종은 완성된 고려사는 볼 수 없었다. 세종은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열심히 공부하며 토론을 앞세웠다. 또한 끊임없이 생각하여 새로운 일을 만들고,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임금이었다. 그렇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세종의 카리스마는 형성되었다.

3장 백화만발의 시대

세종의 집현전 사람은 특별했고, 장서각을 지어 연구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물품 공급도 아낌없이 하였다. 그렇게 점차 기틀이 잡히고 인원이 늘면서 학무 여구, 저술 등의 일을 맡게 되었다. 집현전의 자문은 권위를 갖게 되었고, 저술 작업도 본격화 되었다. 그리고 조선에는 물시계인 자격루가 만들어지고 일정성시의라는 별시계, 해시계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세종은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며 여러 곡들을 만들어냈고, 보태평과 정대업 등을 만들었다. 1443년에 세종은 그의 인생 최고의 걸 작품인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지만 점차 사라져서 세종은 본격적으로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4장 명군을 도운 명신들

장영실은 동래의 관노 출신이었는데, 그는 당대 세계 최고수준의 기계기술자였다.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 옥루를 만들어냈지만 그가 제작한 안여가 부러지면서 곤장을 맞고 직첩을 회수 당했다. 그리고 음직으로 벼슬을 하다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최윤덕은 대마도 정벌에 공을 세웠고, 폭행 사거 같은 것도 없어서 문신들로부터도 존중받았다. 세종은 야인정벌을 성공하고 돌아와 정승으로 임명하였다.

5장 준비된 임금, 문종

세종의 장자 향은 여덟 살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자는 반듯하고 의젓하며 총명하였다. 세종은 그런 세자가 믿음직스러웠다. 세자는 세종의 요구에 착실히 따라주었고, 신중하며 차분하고 끈기 있었다. 그는 스물이 넘어서부터는 세종 곁에서 실무를 배우고, 세종을 돕기도 하였다. 실록은 그렇게 준비된 문종을 말수가 적었지만 논쟁이 일면 노성한 대학자로 당할 수 없었고, 천문을 잘 알아서 일기예보가 매우 정확하고, 효성이 지극했고, 각종 기술에도 신묘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설명한다. 문종은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산모인 현덕왕후가 세상을 뜨고 만다. 세종은 30대 중반을 넘기며 각종 병에 시달렸는데 결국 세종은 세자와 대군들에게 각자에 능력에 맞는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떴고, 얼마 뒤 세종은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종기를 앓고 있었는데 재위한 뒤 23개월만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도 없는 어린 단종은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다.

느낀점

재미있었고, 문종이 왕이 되고 2년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죽은 게 불쌍하였다


재현

하라하라의 생물학 카페

by 류재현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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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하라의 생물학 카페

이은희 저

2014/1/15/유재현

 하라하라.jpg

생명은 떄로는 깊고 깊은 바닷속 해초 줄기사이에서도, 저높은 하늘 산꼭대기 나무둥지에서도, 한가닥 빛이 들어오지도 않는 곳 에서도 탄생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어디서 탄생하는가?. 공간적으로는 엄마 뱃속에서 탄생한다. 엄마 뱃속에서 탄생할려면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수정을 해야한다. 그리고 한번 만나려면 난자는 1개이고 정자는 1~3억마리다. 그러므로 하나의 정자만 난자를 차지할 수 있다. 정자 1~3억마리는 난자를 만나려고 동시에 출발을 한다. 그런데 대부분 다 자궁의 산도를 이기지 못하고 죽는다. 그렇게 몇 천 몇 백 마리만 살아남는다. 그리고 정자 몇 명이 벽을 만들어서 다른 정자들을 못 오게 한다. 그렇게 난자에게 가는 정자는 몇십 마리가 된다. 그리고 난자에 빽빽하게 붇는데 난자에게는 ZP3라는 벽이 있다. 정자들은 그것을 뚫고 들어가는데 너무 많이 들어가면 오히려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다. 그렇게 가장 빠르고 가장 똑똑한 정자와 난자는 수정을 이룬다. 그리고 그 수정한 것 이 40주가 지나면 아기가 태어난다. 그리고 수정을 했는데 쌍둥이가 될 수 도 있다. 쌍둥이는 2명이 동시의 태어나는 것 이다. 쌍둥이는 일란성과 이란성이 있는데 일란성은 수정한 난자와 정자가 임신중에 2개로 나뉘어서 생겨진 것이고 이란성은 난자가 정자 2개와 수정해서 수정체를 2개를 만든 것 이다. 하지만 수정체는 모체에게 영양분을 공급받는데 한달의 한번 씩 받는다. 그런데 쌍둥이의 경우는 한달에 한번은 하나의 수정체가 영양분을 공급받고 또 한달 뒤에는 다른 수정체가 공급 받고 하니 쌍둥이가 임신됬는데 그중 한명이 죽을 확률은 85% 라고 한다. 그리고 기형아가 태어날 수 도 있다. 기형아가 태어나는 이유중 30%가 유전적인 것 이고. 20%가 환경적인 것이고 50%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외부적인 요인에서는 모체가 임신을 했을 때 각종약물,알코올,흡연,방사선,카페인,자외선,바이러스 등등 이 있다. 그리고 난자와 정자에는 성 염색체라는 것이 있다. 난자는 X밖에 없고 정자는 XY가 있다. XX가 만나면 여자가 임신되고 XY가 만나면 남자가 임신된다. 그리고 그리고 임신을 했을 때 아기가 남자일 확률이 더 높다 그 이유는 YX보다 가볍기 때문이다. 미국의 패션 사진작가 론 해리스는 인터넷 상의 미녀 난자 경매 싸이트를 열고 수퍼 모델 출신 모델 8명의 미녀 난자를 경매의 붙였다. 그리고 싸이트에는 100만명이 왔다 갔고 론 해리스는 약 42천 달러를 벌었다고 한다, 여자보다 더 이쁜 여자 하리수 그녀는 거짓말처럼 어느새 우리곁에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외모는 같은 여자가 보아도 흠 잡을 때 없이 완벽하였다. 그녀는 지난 200212월에 호적정정을 해서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다. 그녀처럼 남자에서 여자가 되거나 여자에서 남자가 된 사람이 국내에만 1천명 정도 된다고 한다. 자신의 성과 같은 성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을 동성애자라고한다. 동성애는 역사적으로 경멸과 금지의 대상이였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동성애의 원인은 생물학적으로 증명된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뇌구조를 비교해봤을 때 이성애자의 뇌는 성욕을 제어하는 부분이 동성애자보다 2배가 더 컸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는 이성에게 잘 사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 사랑 사랑 너무나 많이 쓰여서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이만큼 들을 때마다 가슴 설래이고 가슴 아린 말은 아마 없을 것 이다. 사랑의 한번 빠지면 짧게는 18개월 길게는 30개월동안 빠진다. 동물들은 일정한 기간에만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인간은 퍙생동안 사랑을 나눈다, 인간이 유일하게 사랑을 평생동안 할 수 있는 동물이다. 사랑을 하면 마약을 하는 것 과 비슷한 좋은 기분이 들지만 몸에 나쁘지는 않다. 사랑이 인간만 영원하게 할 수 있는 까닭은 그렇게 진화 하였기 떄문이다. 사랑은 진화가 인간에게준 가장 큰 선물이다.

느낀점: 책이 너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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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2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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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그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2 태조, 정종실록

2013.1.7.이지원

1장 개국과 역성의 세월

이성계가 왕이 되고 왕 씨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기에 왕 씨들을 거제도와 강화도에 격리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조선이라 하기로 하였다. 태조는 두 부인이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62녀를 낳았지만 남편이 왕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모두 전장을 누비기도 하고, 개국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역할을 하였다.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은 현비인데 21녀를 낳았다. 근는 담대함과 결단성을 갖추었고, 고비마다 훌륭한 자문역을 해주었다. 하지만 아들을 세자로 만들고 싶어서 태조를 설득하였다. 결국 태조는 막내아들인 방석이를 세자로 택했고, 이것은 아주 무리한 수였다. 그리고 태존격리시켰던 왕 씨들을 다시 풀어주었는데 투표를 한 결과 왕 씨를 제거해야 한다는 표가 많이 나와서 결국 왕 씨들은 강화나루와 거제 바다에 던져졌다.

2장 새 술은 새 부대에

태조는 개국 초부터 도읍을 옮기고 싶어 했었다. 태조는 도읍을 바꾸기로 마음먹었고, 대신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다가 현재의 경복궁 근처에 도읍을 옮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종묘와 궁궐은 태조의 뚝심으로 공사한지 1년이 되지 않아 완성되었다. 그리고 궁궐의 완공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열렸을 때 정도전이 즉석에서 지은 경복궁이라는 이름이 궁궐의 이름이 되었다. 정도전은 대조의 후원을 받으며 나라의 중요할 일들을 관리하였고, ‘고려사를 편찬하였고, ‘사시수수도진도등을 지어 군사훈련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 때 정안군 이방원은 어린 이복동생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니 방석이가 세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직 자신에게 한 가닥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도 되기에 나쁜 상황만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3장 제 3의 변수 홍무제

이방원과 정도전 세력 간의 대립이 서서히 표면화 되는 가운데 조선과 명나라 간 외교 갈등이 중요 변수로 떠올랐다. 명 황제 홍무제는 조선 사신을 죽도록 패기도 하고, 조선 사신을 입국하지 못하게도 하였다. 결국 태조는 이방원을 명나라로 보내게 되었는데 예상과 달리 홍무제는 방원을 국빈으로서 최상의 예우를 했다. 이렇게 이방원의 중국 방문으로 잠시 완화되었던 조, 명 간의 갈등은 표전문 문제로 인해 다시 악화되었다. 그런데 현비의 병세가 악화되었다가 결국 현비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태조는 직접 현비를 묻을 자리를 찾아서 돌아다녔다. 결국태조는 취현방에 묻기로 하였고,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정도전은 남들보다 앞선 진보성과 거침없는 일처리로 가는 곳마다 논란을 일으키고 적을 만들었지만 태조가 보호했기에 돌을 맞지 않았다. 그는 태조에게 필요한 일이라 생각되면 악역을 자처했고, 태조가 안쓰럽게 보이면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둘을 갈라놓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4장 왕자의 난

1398년에 조, 명 간에 긴장을 몰고 온 홍무제가 죽었고, 태조는 완자, 종친,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병을 해산하고 관군에 편입시키고, 사병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들을 모두 국가의 헌납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때 이방원은 위기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에 대한 경계심이 느슨해질 지금이 다시없을 기회라 생각하고 100여명을과 함께 조금의 무기와 막대기로 광화문 앞으로 내달았다. 정도전은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자였던 폐세 자는 궁성을 나서서 죽게 되었고, 그의 형도 동생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태조는 많은 것을 잃었고, 사랑했던 사람들, 지위와 명예, 자부심을 잃게 되었다.

5장 임시 군주 정종

난이 있고 난 후에 태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다. 그렇게 조선의 2대 왕이 된 영안군, 즉 정종은 나라의 중대사를 방원과 대신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사냥이나 겨구를 즐겼다. 그 때 이방원은 공신 책봉을 통해 샐운 주류로 떠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종에게 정안군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면서 소리쳤고, 결국 정종은 정안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마침내 이방원은 미래를 기약 받았고, 얼마 뒤 정종은 자신의 역하이 다했음을 알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아버지 태조에게 효성스러웠고, 자식은 낳지 못했지만 정안왕후와 금슬이 좋았다. 상왕으로 물러나 격구를 즐겼지만 죽고 나서는 왕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느낀 점

정릉 이야기가 나와서 친근한 느낌이 들었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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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1 개국

by 다솜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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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01 개국 지은이 박시백

2014.1.6.이지원

1장 북방의 호랑이

고려 후기 1250년대에 수령의 분노를 산 이안사의 무리가 전주에서 빠져나와 삼척현으로 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전주의 그 수령이 신임 사또로 부임해오는 바람에 그들은 다시 동북면으로 갔다. 이안사는 자신을 따라온 160여 호와 자리를 잡고 인근의 고려인들을 규합해 나갔고, 얼마 뒤 이안사는 천여 호의 수장으로 자리 잡았는데 어느 날 몽고 군대가 이안사에게 항복을 권하는 글을 보내왔다. 이안사는 항복을 했고, 그 대가로 몽고로부터 벼슬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00년 뒤 이안사의 증손인 이자춘은 원제국이 망할 것이라 예상하고 고려로 가게 된 것이다. 이자춘은 공을 세웠고, 공신의 가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고려가 전란에 휩싸이고 백성들이 피난보따리를 싸야 했다. 그렇게 공민왕은 불운했고, 그 불행이 이성계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이성계는 고려군의 백분의 일 정도 되는 병사로 멋지게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나하추군의 진군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고려를 대표하는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로도 많은 전쟁이 이어졌지만 이성계는 출전하면 반드시 이기고 돌아왔고, 그에 따라 벼슬도 높아지고, 불패의 명장으로서 명성과 위신도 높아갔다.

2장 혁명을 꿈꾸는 자

공민왕은 권문세족을 제압하여 토지집중 문제를 해결하고,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를 면천시켜 양인 수를 늘려서 나라 재정을 건실케 하려고 했으나 끝없는 외침과 권문세족의 반발, 신하의 반란까지 경험하였고, 노국공주가 산고 끝에 죽고 말게 되었다. 부인의 죽음으로 왕은 무너졌고, 왕은 스님에게 자신 대신 나라와 백성을 보살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렇게 스님은 신돈이란 이름을 하사받은 후 관복을 입게 되었고, 권문세족은 반발하다가 몇몇이 관복을 벗게 되자 조용하게 되었다. 신돈은 새 인물들을 요직에 앉히고, 힘 있는 대신들을 정리해 나가고, 과거제를 개혁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그러나 신돈 역모 사건이 터졌고, 신돈은 목이 잘리게 되었다. 그렇게 그의 죽음으로 개혁은 끝났고, 왕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공민왕은 자신의 아이를 가지려고 모두 죽이겠다는 농담 같은 말을 하였고, 이 말을 들은 내시와 다른 사람들은 공민왕을 죽이게 되었다. 이 일은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는데 결국에는 이인임에 의해 발각이 되었고, 이인임은 왕을 만들어야 한다며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소문이 돌고 있는 왕의 아들 모니노는 우왕이라 불리는 왕이 되었다.

3장 위화도 회군

우왕은 10대에 들어서서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좋은 왕이 되어보려고 공부와 경연에 열심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도성 골목에서 개, 닭 사냥을 즐기고 결혼 앞둔 처자를 빼앗는 등 지냈다. 그래도 이인임 등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았지만 노장군 최영만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다. 왕은 잔소리를 하는 최영에게 마음이 갔고, 스물을 넘기면서 자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졌다. 그래서 왕은 최영과 이성계와 함께 개혁을 계획했고, 그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그렇게 왕은 소원대로 권신들을 몰아내고 최영은 권력의 정점에 서고 이성계도 권력 핵심부로 진입을 하게 되었다. 왕은 원하던 바를 이루었지만 최영마저 등을 돌리면 끝이기에 최영의 딸과 결혼을 하였고, 왕은 최영만 자신의 편이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최영은 명나라와 전쟁을 하자고 하였고, 이성계는 반대하였지만 왕은 허락하였다. 그런데 철없는 왕이 최영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이 싫다고 하였고, 결국 최영은 남게 되었다. 최영은 자신의 군사들을 이성계에게 주어 보냈다. 그러나 이성계는 왕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없애겠다고 하며 다시 궁으로 돌아왔고, 최영은 이성계 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그렇게 결국 최영은 죽고 말았다.

4장 고려를 지켜라

회군 세력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왕은 이성계, 조민수의 집을 급습하였다. 그러나 허무한 실패로 끝나버렸고, 왕은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우왕의 아들, 창왕이 왕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폐위되었고, 아버지인 우왕이 있는 강화로 가게 되었다. 그 뒤 정창군이 등 떠밀려서 보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 공양왕이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 되었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이색 부자와 조민수를 벌하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왕은 이색 부자와, 이숭인 등을 유배조치하고 조민수는 폐서인하라고 하는 등 관련된 이들의 목숨을 보전해주었다. 그런데 우왕과 창왕을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죽여야 한다며 신속하게 결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이성계 측은 이색의 죄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상소를 올려대었다. 결국 왕은 이색은 무죄로 하고, 조민수는 유죄로 인정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의 편에 서던 정몽주는 이색 계열과 구세력들을 불러들여서 조정의 요직들을 장악해버렸고, 이로 인해 조정은 이성계 세력과 정몽주 세력으로 구분되게 되었다.

5장 역성혁명

양자 간의 긴장이 유지되던 때,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정몽주는 조준, 정도전 등 이성게 파의 사람들을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왕에게 상소를 올리고 엎드려 시위를 하였다. 이렇게 이성계 권력이 무너질 것처럼 보일 때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게 된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으로 병문안을 간다. 그렇게 정몽주와 이성계가 환담하는 사이에 이방원 네는 정몽주를 죽이겠다고 결심을 다지고 있었다. 그렇게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 뒤로 폐위된 왕은 원주로 옮겨졌고, 이성계가 왕이 되었다.

느낀점

만화책이라서 재미있었지만 요약하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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