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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동남아 여행기 1

by 류재현 posted Feb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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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16.일

일요일 새벽 1시에 잠을 자고 4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세수를 하였고, 머리를 감고 4시 50분에 교회에서 출발을 하였다. 그때태국의 기온 때문에 반팔,난방,바람막이만 입었는데 다행이도 날씨가 따뜻해서 춥질 않았다. 그리고 공항철도를 탓는데 첫차를 탔다. 잠을 교회에서 3시간만 자서 졸렸는데 기차에서 잤다. 가방을 베게 삼아 잤는데 매우 편했다. 그리고 배가 엄청 고팠다. 토요일날 짐싸느라 저녘을 못 먹어서 배가 업청 고팠다. 그리고 인천 국제 공항에 도착해서 아침밥을 먹었다. kfc에서 징거더블맥스를 먹었는데 기름덩어리 였다. 그래도 맛있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탓는데 나는 잣다. 경유를 해서 비행기를 두번 탓는데, 첫번째 비행기에서는 자디만 했는데, 기네식을 못 먹었다. 선우의 말로는 기네식이 유산슬이나와서 엄청 맛있었다는데, 못먹어서 아쉬웠다. 그렇게 약 2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국제공항에 도찯하였다. 그리고 1시간 30분정도 기다린 다음에 비행기를 탓다. 이번에는 기네식을 먹었는데 찜닭같기도 하고 닭죽 같기도한 요리가 나왔는데 맛있었다. 그리고 빵이 나왔는데 따뜻했다. 그래서 더욱 더 맛있었다. 기네식을 먹고 약 2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 스왐나프 공항에도착하였다. 그리고 집을 챙기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사람이 엄청 많아서 많이 기달렸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yha 방콕 다운타운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는데 동우형이 택시에서 mp3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밥을 먹으러 갔다. 숙소에서5분 거리인데 되게 고급져보이는 식당이였다. 그곳에서 밥을 먹었는데 꼬띠아오라는 면요리를 먹었는데 엄청 맛있었다. 그리고 정우형이 태국고추를 오징어인줄 알고 먹고 바나나 껍질을 먹고 입에서 토했는데 그걸 다시먹고 화장실에가서 토했다. 그리고 밥을 먹고 편의점에가서 간식을 샀다. 그리고 정우형과 선우의 방의 가서 다같이 먹으면서 놀았다. 그리고10시에 규진이형방에 모여서 1분 스피치를 하였다. 그리고 씻고 잣다.

2014.2.17.월

아침 7시30분에 일어 났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 한 후 다시 잤다. 그리고 8시30분에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양치를 하였다. 그리고 9시 30분에 규진이형 방에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채크아웃을 하였다. 그리고 짐을 맡기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침을 먹었는데, 나는 구운 치킨과 밥을 먹었는데 별로 였다. 그리고 기차랑 버스를 타고 버스 터미널에 갔다. 그리고 치앙마이로 가는 버스를 예약하였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백화점에 갔다. 백화점에서 밥을 먹었는데 나는 어떤 복음밥을 먹었는데 태국고추가 엄청많이 들어 있어서 엄청 매웠다. 그리고 2시간동안 백화점 구경을 하고 스타벅스 커피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래서 구경을 하고 스타벅스 커피로 갔다. 근대 스타벅스 커피가 그 백화점에는 3개가 있어서 서로가 엇갈렸다. 그래도 20분 뒤에 다 만났다. 그리고 마사지샵에 갔는데 자리가 없어서 그냥 숙소로 갔다. 근대 진표형이 머리를 자르러 가서 남은 사람들은 숙소에서 짐을 가지고 기달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어떤외국인이 들어와서 질문을 하였다. 근대 그 외국인은 여행을 다니면서 다른나라 사람들의 필기체를 모으는 사람이였다. 그래서 나는 좋은 여행되세요 라고 적었다. 그리고 사진을 찍고 진표형이 와서 버스터미널에 갔다. 그리고 화장실에 갔는데 유로 화장실이였다. 그래서 3바트를 내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저녘밥을 kfc에서 먹었는데 135바트 짜리 세트로 통일해서 먹었다. 버거,닭다리,감자튀김,음료수가 나왔는데, 맛있었다. 그리고 슬리핑 버스를 타고 가면서 잤다. 

2014.2.18.화

오늘의 아침은 슬리핑 버스에서 맞았다. 새벽3시 버스에서 깬 다음에 다시 잤다. 그리고 6시에 일어났다. 그렇게 6시에 치앙마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위리아 하우스래 갈려 했는데 버스 운전사가 담요를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호형이 가져간 담요를 줬는데, 한 명이 안줬다고 한다. 그런데 진표형이였다. 그리고 위리아 하우스로 갈려고 하는데 계속 태국인이 트럭같은 택시를 타라고 한다. 그런데 그냥 걸어 갓다. 왜냐하면 위리아 하우스 까지는 걸어서 10분이라고 하여서이다. 걸어서 가고 있는중 길을 물어 봤는데 트럭같은 택시를 타야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결국은 그 택시를 타고 가는데 택시 운전사가 길을 몰랐다. 그래도 위리아 하우스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위리아 하우스에 짐을 맡기고 밥을 먹으러 갔다. 맥도날드에서 맥모닝을 먹었는데. 스프라이트가 그냥 설탕물 맛 이였다. 그리고 거리구경을 하고 있는데 진표형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해서 다시 맥도날드에 갔다. 그리고 맥플로리를 먹었다. 그리고 위리아 하우스로 왔다. 하지만 시간이 안되서 체크인을 못하였다. 그래도 수영장에서 놀 수는 있었다. 그래서 수영장있는 의자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누워있다가 정우형이랑 다은이 누나가 수영을 하자고 해서 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고 수영장에들어 갔는데, 수영장물이 너무 차갑고 짯다. 그리고 수영을 하였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수영을 다 하고 옷을 갈아 입었는데, 아직 시간이 안돼서 수영장에 있는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방배정을 하였다. 나는 정우형이랑 동우형이랑 같은 방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누워있었는데뜨거웠다가 시원했다가 했다. 그리고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서 잤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현지 음식을 먹었는데, 닭고기가 맛있었다. 카레맛이 났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쉬는데 잤다. 그리고 일어나서 마사지를 받으러 가는데 시원했다. 그리고 저녘을 먹으러 갔다. 저녘은 술집인데 음식도 파는 곳  에서 먹었는데 맛있었다. 그리고 수박 스무디도 먹었는데 맜있었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고 숙소에서 먹었다. 그리고 규진이형방에서 느낌나누기를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티비에서 10시에 응답하라1994를 한다고 했는데 안했다. 그래서 티비를 보다가 잤다.

2014.2.19.

 

아침에 740분에 일어나서 티비를 봤다티비는 미국노래를 틀어줬다노래를 듣다가 다시 잤다그런데 진표형이 나를 깨웠다그래서 진표형이랑 동우형이랑 아침밥을 먹으러갔다그런데 정우형이 와서 같이 먹었다나는 팬케이크를 먹었는데맛있었다그리고 밥을 먹고있는데 동엽이형이 와서 같이 먹었다그리고 밥을  먹고 방으로 올라갔다그래서 머리를 감고 티비를 봤다티비에서는 미국노래를 틀어 줬다그래서 노래를 듣다가 수영장으로 가서 의자에 누워있었다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티비를 보다가 짐을챙기고 1 로비로 나왔다그리고 동엽이형이랑 진표형이랑 정인이 누나랑 같이 빨래를 찾으러 같다그리고 벤을 기달렸다그리고 12시에 벤이 왔다그리고 벤을 타고 빠이에가던  2시에 점심을 휴게소에서 먹었다복음밥을 먹었는데 여태까지 태국에서 먹었던 밥중에 제일 맛있었다그리고 벤을 타고 빠이에 왔다그리고 숙소인 레인보우하우스에왔다그리고 동우형이항 돌을 주워서 체스를 하였다그리고 지원이누나 mp3 노래를 들었다그리고 시내로 나가서 루왕프라방행 버스를 예약하였다그리고 지호형과 지원이누나는 마사지를 받으러 가고 나머지는 쇼핑도 하고 간식도 먹었다나는 먼저 보조가방을 샀다그리고 거리에 있는 간식을 먹었는데팽이버섯에 베이컨을 감싼 것을 구운 것을먹었는데 엄청 맛있었다그리고 소세지도 먹었는데 맛있었다그리고 젤리도 먹었다그리고 돼지고기 구운 것도 먹었는데 엄청 맛있었다그리고 지호형이랑 지원이 누나가 나오고 편의점에가서 음료구를 삿다그리고 구운 옥수수를 먹었는데 옥수수가 아삭아삭 했다그런데 맛있었다그리고 샤브샤브 파는 곳에 가서 샤브샤브를 먹었는데 엄청 맜있었다그리고 숙소로 돌아와서 느낌나누기를 하고 동엽이형 방에가서 놀았다동엽이형 방에서 동엽이형 핸드폰으로 원피스 극장판을 봤다.

  • profile
    아모 2014.02.28 00:27
    돌을 주워서 체스를..ㅎㅎ 어디서든 재미있게 잘 지내는 너희가 대견하다.^^

재현

조선왕조실록 11

by 류재현 posted Feb 1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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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광해군 일기

2014.2.13. 유재현

1장 왕과 세자

선조는 후궁으로 공빈 김씨를 들였다. 하지만 공빈 김씨는 네 살 임해군, 세 살 광해군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인빈 김씨가 선조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임해군,광해군은 부왕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임해군은 사고나 치는 문제아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형과는 달리 모범생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신하들의 평판도 좋았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선조는 조정을 버리고 광해군에게 맡긴 다음에 요동으로 갔다. 그리고 광해군은 사람들을 모와 일본과 싸웠다. 그래서 광해군은 영웅이 되었고, 선조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

2장 초기의 광해군

선조 40년 방 밖으로 나오던 왕은 갑자기 쓰러졌다. 그리고 왕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하지만 그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고작 2살 이였다. 그리고 선조41년 선조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중전은 광해군을 왕위에 세우라고 하였고, 광해군은 숱한 장애를 넘고 마침내 보위에 올랐다. 하지만 광해군에게 온 것은 미움과 견제였다. 중국은 책봉을 거부했고, 조정은 노골적으로 영창대군에게 줄을 섯다. 하지만 광해군은 자신을 낮추고 개혁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을 실패로 이끈 것, 광해군의 총명을 집어삼켜버린 것은 바로 옥사였다.

3장 꼬리를 무는 옥사

황해도 봉산 땅에 군수인 신율이란 사람이있다. 신율은 남이 대신 지은 글로 과거에 급제하여 동류 사이에서는 왕따 신세였다. 그는 야심이 있었다. 바로 출세를 하는 것 이다. 좀도둑을 잡아도, 혹독한 고문을 통해 큰 도둑으로 만들고는 했다. 어느날 공문서 위조범이 잡혀왔는데 공문서 위조범은 고문을 당하기 실어서 엄청난 말들을 토해낸다. 바로 자신과 아우는 반역을 가담하고 있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아우를 잡아오자 겁에 질린 아우는 조선 8도에 모두 대장과 별장을 둔 조직이고 총대장은 수염이 많은 등 그런 말을 하였다. 이 일을 보고를 받은 황해 병사도, 황해 감사도 대수롭지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조정에 보고를 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은 거명된 자들을 체포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옥사가 시작되었다. 8도대장으로 거론된 김백함도 곤장14대를 맞고 평소에 자신이 싫어하던 50여 명을 끌어드린다. 그래서 그자들을 바로 형에 처했다. 그런 식의 진술을 통해 날마다 새 얼굴들이 끌려들어왔다. 그래서 340명이 끌려왔고, 100여 집안이 파멸했다. 그리고 영창대군을 죽였다.

4장 고독한 중립 외교

중원의 지배자 명나라는 쇠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반면 누르하치는 급격히 힘을 키워갔다. 어느 해, 명나라는 자신들에게 맞서는 여진 부족을 치다가 그동안 복종해왔던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이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운다. 그리고 명나라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명나라는 조선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조선은 군사를 보낸다. 그리고 명나라와 후금이 싸우는데 후금이 이겼다.

5장 모래 위의 성

왕은 미신을 크게 신봉하였다. 왕은 점쟁이를 불러 궐안에서 화려한 기도식을 가졌다. 그리고 왕은 경복궁 복구를 실시한다. 하지만 조정에는 재산이 없어서 백성들에게 벼슬을 팔고 돈을 받았다. 그래서 정원군의 집을 헐고 경복궁을 지었다. 그리고 능양군 등은 거사를 결의한다. 하지만 이 계획이 누설되었다. 하지만 그때 왕은 후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늦게야 보고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능양군과 김류가 이끄는 반란군은 광해군을 왕위에서 내려오게 한 다음에 죽였다. 그리고 능양군이 즉위를 하였는데 이가 인조이다.

느낀점: 광해군은 연산군이랑 정말 비슷한 것 같다.


재현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by 류재현 posted Feb 0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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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윤덕노 저 2014.2.6. 유재현

#붕어빵에도 족보가

찐빵

찐빵은 이름처럼 수증기로 찐빵이다. 찐빵은 처음에 일본에서 생겨났다. 일본은 육식 금지령이 내려진지 1200년만에 풀렸다. 하지만 1200년 동안 육식을 안먹은 사람들은 육식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일본은 밀가루안에 고기를 넣고 쪄서 찐빵을 만들었다.

붕어빵

붕어빵은 일본에서 계량된 음식이다. 일본에 서양의 와플이 넘어 왔다. 그러자 일본은 와플을 계량하여 물고기 모양으로 생긴 와플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은 그 지역의 최고의 물고기인 도미의 이름을 붙여서 도미빵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일제강정기때 우리나라에 도미빵이 들어왔다. 그러자 우리나라는 제일 많이 잡히는 민물고기인 붕어의 이름을 붙여서 붕어빵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잉어빵이란 북한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민물고기인 잉어의 이름을 붙인 북한의 붕어빵이다.

와플

와플은 고대 게르만어로 벌집이란 말 이다. 와플은 고대 유럽에서 만들어 졌다. 그리고 콜롬버스의 향해때 미국으로 와플이 퍼졌다. 그리고 전세계로 퍼졌다. 그리고 일본에서 도미빵을 만들었다.

단팥빵

단팥빵은 일본사람들이 만든 서양식 만두이다. 밀가루에 고기나 야채를 넣고 찌면 만두가되고, 밀가루에 단팥을 넣고 찌면 찐빵이 되고, 밀가루에 단팥을 넣고 구우면 단팥빵이 된다. 그리고 단팥빵에 참깨를 뿌리는 까닭은 참깨를 뿌리면 통팥을 거른 앙금으로 만든 단팥빵이란 소리고 겨자씨를 뿌리면 통팥으로 만든 단팥빵이라는 것 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통팥으로 만들어도 참깨를 뿌리는게 대부분이다.

소보로빵

소보로빵은 일본이 일본인의 체격을 서양인처럼 키울려고 만든 여러 가지의 음식중 하나이다. 소보로빵은 빵에 비스킷을 붙이고 구운 것 이다.

크림빵

크림빵도 일본이 일본인의 체격을 서양인처럼 키울려고 만든 여러 가지 음식중 하나이다. 슈크림빵은 크림빵이지만 크림빵과 다르다. 슈크림의 뜻은 양배추 크림이란 뜻인데 슈크림빵을 굽는데 부풀어오르는 모습이 양배추 같아서 슈크림빵이라 이름지었다. 일본은 서양인의 주식인 빵을 계량하여 단팥빵,소보로빵,크림빵 등을 만들었다.

카스텔라

카스텔라는 스폰지 케이크이다. 카스텔라는 일본에서 만들었지만, 스페인의 스폰지 케이크와 흡사하다. 스페인의 스폰지 케이크가 카스텔라보다 먼저 나왔으니 스페인의 스폰지의 카스텔라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건빵

건빵은 일본이 세계2차대전때 만든 군용식품이다. 일본은 태평양을 건너면서 싸우는데 밥 같은 음식을 군용식품으로 쓰니 금방 썩어버렸다. 그래서 서양의 비스켓을 계량해 건빵을 만들었다.

비스킷

비스킷은 건빵의 시초이다. 비스킷의 어원풀이는 두 번 굽다라는 뜻 이다. 두 번 구우면서 재료 안 에 있던 수분이 다 없어진다. 그래서 유통기한이 수 년이 된다.

고로케

고로케는 프랑스의 크로켓이 일본으로 넘어와 고로케가 되었고, 그게 우리나라의 전파되었다.

마시멜로

마시멜로는 기원전2000년에 고대 이집트인이 먹었다. 그래서 마시멜로는 4000년 역사의 우서깊은 과자이다. 옜날에는 나무수액으로 마시멜로를 만들어서 마시멜로를 약으로 먹었다. 하지만19세기 서양에서는 마시멜로를 약에서 과자로 바꿨다.

느낀점: 우리가 먹는 빵이나 거리음식이 거의다 일본에서 육식금지령을 해제하고 계량해서만든 음식이여서 놀랐고, 재미있었다.

  • profile
    사랑 2014.02.09 00:53
    재현이 이 책 잼나지? 이모도 넘 읽고 싶어서 이모가 산거야. 나도 봐야지....

재현

조선왕조실록10

by 류재현 posted Feb 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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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0 2014.2.1 유재현

박시백 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제1장 사림의 집권과 분열

선조는 16살 때에 왕위에 올랐다. 선조는 임금의 대한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믿고 의지 할 만한 정치 세력도 없이 임금노릇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이 이다. 이이는 강렬하게 존재하였다. 말보다 글을 먼저 익혀다던가, 세 살의 시를 짓고, 일곱 살에 경서를 섭렵하기 시작했으며, 열세살의 진사시의 장원한 천재이다. 그리고 열여섯의 어머니를 잃고, 중이 된다. 그리고 스물살에 절에서 내려와 벼슬을 맡는다.

제2장 당쟁의 격화와 기축옥사

율곡 이이가 죽었다. 그러자 신하들의 권력이 나눠 지면서 동 서로 나위었다. 그래서 많은 대신,대간들이 옥사의 같이거나, 고문을 받다 죽거나, 사형을 당하거나, 자살하였다. 그렇게 피바람이 불었다.

제3장 일본의 침략,무너지는 조선

조선에는 피바람이 불고, 일본에는 100년 넘게 이어져온 전국 시대가 정리 되었다. 일본은 100년 넘게 이어져온 전쟁을 끝낸 자신감과 끝없는 전쟁으로 인한 수십만의 정예부대, 욕심많은 영주들로 인해 새로운 구상을 세운다. 하지만 조선은 군사훈련은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병선을 건조하고 군사를 훈련 시켰다. 그리고 일본군이 쳐들어왔다. 일본군이 우리나라의 상륙하는데 단 한번의 해진도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부산진성에 들어갔는데 함락 당하였다. 일본군은 3000명을 살육하였다. 동래성에 같다. 동래성에서는 송상현과 동래선 군민들이 끝까지 싸웠지만, 끝내 함락 당하였다. 그리고 경상 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에 갔다가, 전투가 시작되자 도망가 버렸다. 일본군과 조선군의 싸움은 최정예 일본군과 오합지졸의 조선군의 싸움이였다. 일본군은 북으로 쭉쭉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자 왕은 궁을 버리고 파전하였다. 그러자 분노한 백성들은 궁을 불태 웠다. 일본군은 계속 북진을 하였다. 그렇게 20일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관군은 5만이 넘는 관군을 이끌고 막았지만, 일본 수군 1600명에게 패배한다. 그렇게 일본은 조선의 침략을 성공하는 듯 했으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긴 것 이다.

제4장 이순신과 무적 수군

일본군은 막강하였다. 특히 수군이 막강 하였다. 1600명으로 5만명을 이길 정도였다. 그래서 조선은 일본은 수군이 강하고 육군이 약하니 무조권 육지에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일본도 자신은 수군이 더 쌔다고 생각 하였다. 하지만 옥포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에 일본 수군이 깨졌다. 이순신은 제수되고 1년 남잣의 기간동안 전쟁 대비의 총력을 기울였다. 전함을 건조하고, 화포와 화약을 준비했으며, 군사훈련을 거듭했다. 그리고 전법을 세워나갔다. 그리고 왜군이 쳐들어 왔다.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필두로 일본 수군과 싸웠다. 그러자 일본군은 전멸하고, 조선군은 부상자1명 뿐이였다. 그리고 거북선을 필두로 해전을 하였는데 언제나 완승이였다.

제5장 올려라 구국의 깃발

바다에는 이순신이 있고 육지에는 곽재우가 있었다. 이순신과 곽재우 둘 다 관군이 훈련을 하지 않을 때 훈련을 하였다. 곽재우는 미리 바다에 말뚝을 박아 놓고 일본의 수군이 전복되는 틈에 일제히 화살을 퍼부었다. 그리고 의병 1천명과 승려1천명의 의병으로 일본군을 맊았다. 그래서 승리는 의병쪽으로 기울었지만 결국에 일본군이 승리하였다. 그렇게 곳 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서 일본군을 막았다.

제6장 퇴각하는 일본군

선조는 의주에서 있었고, 최고위급 지휘관들은 겁부터 먹고 전투가 일어나면 도망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전쟁의 흐름은 바뀌어 가고 있었다. 연이은 이순신의 승전보와 의병들의 분전으로 싸울 만하다는 자신감이 퍼져갔다. 그리고 조선군에게는 일본군을 압도하는 각종 화포가 있었다. 그렇게 각종 화포를 가지고 경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일본군이 쳐들어 왔다. 그래서 밤낮으로 싸워서 결국엔 조선군이 이겼다. 그리고 또 엄청나게 많은 일본군이 쳐들어 왔다. 하지만 조선군이 이겼다. 그래서 일본군은 점점 남쪽으로 티각해 나갔다. 그래서 결국에 일본군은 퇴각하였다. 그리고 선조는 이순신에게 벼슬을 주지는 않고 유배를 보냈다.

제7장 정유재란과 그 뒤

일본군은 이순신만 제거하면 조선을 다시 침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순신 제거를 우선 과제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결국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유배를 가있었다. 그래서 조선 수군을 원균이 지휘하였다. 원균은 그동안 만들었던 모든 판촉선과 거북선을 가지고 일본군과 싸웠다. 하지만 조선수군은 전멸하였다. 그리고 전주성 까지 침략하였다, 그래서 결국 선조는 이순신의 유배를 풀어주고 조선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은 바로 남해안으로 갔고, 흩어진 병사들과장수들을 모았다. 그리고 의병들도 생겼다. 그때 다행히도 판촉선 12척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순신의 판옥척은 한척이 더해져서 13척 이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300척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하지만 이순신은 13척으로 300척을 이겼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였다. 조선수군이 대승을 하였지만, 이순신은 총알을 맞아 생을 마감하였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다.

느낀점: 이순신은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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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03 11:25
    재현아~!!! 대기명당에서 남자로 훌쩍 커버려 너를 만나는 것이 새로왔단다. 재미있는 날날되삼~^*^

재현

조선왕조실록9

by 류재현 posted Feb 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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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 2014.2.1 유재현

제1장 기대를 뒤로하고

인종은 태어나자 친모가 죽고 궐 밖에 재상가에서 키워졌다. 그리고 여섯 살의 나이의 세자로 책봉되어 궁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왕위의 올렀더. 이가 조선의 12대 임금 인종이다. 인종은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지세며 부왕을 간호하였다. 그리고 부왕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였다. 그리고 인종은 증종사후 두어달간 미음만 먹고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종은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하면서 하루 다섯 차례의 곡립을 직접 행하는 등 상례를 모두 챙기는 왕 이였다. 그래서 신하들은 약과 고기반찬을 드셔야한다고 간곡하였고, 왕은 거절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은 청하고 왕은 거절하고를 5개월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니 체력이 떨어지고 허약한 몸에 병이 찾아 왔다. 그리고 병세는 점점 악화 되었고, 인종은 생을 마감하였다.

제2장 을사사회

인종이 죽고 대위는 동생인 경원대군에게로 넘어왔다. 문정왕후의 소생으로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이다. 즉위할 때 나이는 겨우 열두 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았다. 명종이 즉위를 하였지만, 거의 모든 결정은 수렴청정인 문종왕후가 하였다. 윤원로를 유배를 보내고 많은 대신,대간들을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대윤을 몰락 시켰다. 정희,정욱,나식 등은 유배되었고, 윤임,유관,유인숙,이덕응은 3일동안 효수되었다. 그들의 아내,첩,나이어린 아들들은 노비로 전략했으며, 형,아우,숙부,조카들은 유배되었다.

제3장 문정왕후의 시대

문정왕후는 피바람을 불어 이르켯다. 유관이 역모를 꾸밀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 사람은 현장에서 맞아 죽었고, 권벌은 삭탈관직 되었다. 다시 명종 2년 3월에는 이중열,성자택,김저가 사사된다. 그리고 명종3년 작은 옥사가 있었는데, 사초를 거두어 보니 난감 해졌다. 그래서 문정왕후는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렇게 문종왕후는 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명종20년 2월 문종왕후는 병에 걸리고 결국에는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문종왕후는 욕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그리고 서울에 묻히지도 못하였다.

제4장 명종의 길은?

대군 시절 명종은 주변의 건장한 보디가드와 함께 다녀야 했다. 한밤중에 잠자리가 바뀐적도 많았다. 하지만 명종은 어린나이에도 알고 있었다. 명종은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도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것은 어느덧 습관이 되었다. 열두살의 대위에 올랐지만, 강력한 어머니의 수렴청정으로, 여전히 조심하고 절제해야했다. 그렇게 8년이 지나고 명종은 성인이 되어서 진정한 왕이 되었지만, 명종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모후때문이 아니라, 노회하고 강성한 대신들, 입을 열면 청산유수인 대간들 때문이였다. 최고 권력자는 임금이지만, 그보다 대간,대신들이 힘이 더 많았다. 그리고 명종 22년 6월 명종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성군이 뒤를 이으니 이가 바로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이다.

제5장 시대의 표상들

개국 이래 계속된 공신 책봉과 권세를 가진 자들의 탐욕으로 토지 소유의 양극화는 계속 심화되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질수록 고을 수량들의 횡포는 심해져 간다. 백성들의 재산을 모두다 자신이 가져가고, 사냥을해서 호피를 바쳐야하는데 사냥을 해서 얻은 호피는 자신일 쓰고 백성들한테 돈을 받아서 호피를 사서 바친다. 명주나 칠,왕골 같은 공물도 마찬가지 였다. 그리고 히없는 사람을 군대에 배속시키고, 미리 뇌물을 쓴 사람은 관속에 소속시켜 허드렛일을 맡기니, 고을에는 뇌물이 넘쳐 났다. 그렇게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져 갔다.

느낀점:문정왕후는 연산군이랑 비슷한 것 같다.


재현

중종실록 (조선왕조실록8권)

by 류재현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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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8 2014.1.24. 유재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장 공신천하

백성들에게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연산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위에 올른 것 이다. 연산의 폭정에 고통받았던 사대부와 백성들은 희망에 들떴고, 반정의 주역들은 자신들이 담담해야할 시대적과제가 무엇인지 알았다. 무오사화로 죄입거나 연좌된이들을 석방조치 시켜주고, 홍문관 사간원이 복구되고, 연산 전용 동물원이 해체되었으며, 서총대도 철거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못지 않게 중요한 개혁과제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바로 연산의 협력자들의 대한 청산 작업이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전국 공신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공신들중엔 연산의 총신들도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극형을 주장하였고, 중종은 반대하였다. 그것을 반복하다가 결국 몇몇을 극형에 처하고 유배를 보냈다.

2장 조광조의 개혁

문과 급제자중 조광조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석 달 뒤 사간원 정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틀 뒤 정6품 새내기 대간 조광조가 아뢰길 사헌부와 사간원을 파직하자는 것이였다. 그래서 중종은 생각을 하다가 대간을 전원 교체하였다. 그래서 대간들 사이에 또 전해가 갈라져 시끄러웠다. 이번엔 조광조를 지지한 이장곤 등이 교체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왕은 조광조를 따르기 시작했고, 대간들도 조광조지지 세력으로 변모해갔다. 그리고 성균원의 유생들도 조광조처럼 되기를 원하면서 조광조를 따랐다. 그래서 조광조가 소학을 보급해야한다고 하니 소학 보급운동을 펼쳤으며 항약 보급에도 힘 썻다.

3장 조광조의 몰락

신하들은 임금에게 연산의 총신이였던 66여명의 공신들을 개정하기를 바랬고 의견을 냈다. 그러자 조광조도 나섰고, 성균관 유생들도 동참하였다. 그러자 왕은 동의 하였다. 그리고 그날 왕은 생각하였다. 70여명의 공신을 폐하면 2차 쿠데타가 일어날 위험이 크다고 생각한 왕은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조광조의 힘이 자신의 힘보다 큰다는 것을 느끼고 그날 밤 조광조와 그의 세력들을 옥에 잡아서 넣은다. 그러자 신하들과 성균원 유생들이 반대를 하였다. 그래서 결국엔 조광조등의 4인은 교신을 빼앗고 곤장100대를 쳐서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고, 나머지는 곤장100를 속바치게한다는 것이다(속바침이란 대신 해당한 돈을 바치고 형을 면하는 것 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조광조는 극형에 처한다.

4장 권간들의 시대

조광조가 죽고 이질적인 인물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인물 이 있으니, 바로 김안로이다. 김안로는 임금의 총애가 커져갔다. 승진도 빨라져서 이조판서의 자리의 오른다. 그리고 남곤이란 사람이 있다. 남곤은 조광조 제거로 악명을 얻었지만 , 그리 원칙 없는 사람이 아니다. 뇌물을 멀리 했고, 차림도 수수했다. 뛰어난 문장 덕에 외교문서를 전담했고 영의정으롯서 국정도 무난하게 이끌었다. 그리고 영의정에 오르고 4년뒤 남곤은 죽었다. 그리고 김안로는 권력이 커졌다. 아무 판서나 가도 김안로는 그중 으뜸이였다. 김안로는 경연,언론,외교,교육,인사,검찰,국방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신하들은 김안로를 없애야 한다고 했지만 실패하고 사약을 받았다.

5장 제자리 39

김안로는 그 자신이 수많은 겸직을 통해 나랏일의 대부분을 주관하기도 했지만, 그의 수족들이 대간에서 궐내까지 포진해 있어서 모든 정보가 다 그에게로 들어왔다. 그는 임금을 능가하는 권력자답게 생활도 초호화판이였다. 집에는 단청을 칠해졌고, 옥수동 강변에 화려한 정자를 지어 날마다 고관대작들을 불러다 잔치를 벌였다. 그러자 웝궐한 대신들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김안로 탄핵을 가세했다. 그러자 김안로는 우선 유배조치 되었고, 신하들은 김안로의 탄핵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천하를 다 가진 듯했던 권신중의 권신 김안로도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중종은 39년은 참으로 일관된 39년 이였다. 내내 부지런 했고, 비판에 귀 귀울였으며, 반성과 사과를 인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종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리고 여러 사건이 수없이 많아서 옥사를 시킨 것 도 여러번이여서 옥사의 희생된 이가 연산 때를 능가할 정도였다. 중종은 재위 39년에 이르러 급격히 쇠약해졌다. 그리고 1115일에 세상을 떳다.

느낀점:재미있었다.


재현

연산군일기(실록7)

by 류재현 posted Jan 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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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 2014.1.23. 유재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장 대관권력대 연산

성종은 연산군이 세자시절 때 세자 수업을 느슨하게 시켰다. 하지만 연산군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아버지 성종같은 모범생도 아니였다. 특별히 말썽도 일으키진 않았지만, 칭찬받을 만한 행적도 별로 없다. 소리없이 적당히 하루하루를 보냈을 따름이다. 얼굴의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이 걸리는 잔병사례가 잦았다. 엊잿든 특별해 보이지 않는 세자였다. 하지만 연산군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왜냐하면 세자시절의 충격적인 일 때문이였다. 연산군 세자시절 아버지 성종은 대간들에게 별 것도 아닌일에 쩔쩔매며 해명하시다가, 결국엔 두손을 든다. 그런다음에 스트레스로 괴로워 하는 것 이였다. 그리고 연산군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대간들은 성종과 전혀 다른 군주임을 알았다. 그래서 대간들은 연산군을 길들이기로 한다.하지만 실패하였고, 연산군의 의견은 꺽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간들은 단체로 사직서를 쓰고 복직을 시키고를 반복하였다.

2장 무오사회와 왕권의 회복

조정은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대간들이 장악하고 있고, 대신들은 이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연산군은 대신들을 예로써 대하면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자극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신이 대산의 공격을 받을 때 에는 확실하게 막아주기도 하였다. 그결과 나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 연산군은 공부는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적절하게 자기 주장을 펼 줄도 알았다. 경연에 참석하는 날보다 빠지는 날이 훬신 많았는데, 적어도 세조처럼 아주 폐하지는 않았다. 어찌됬든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지닌 연산.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힘은 강화하기 마련인지라, 제법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것처럼 보였다.

3장 평온속의 불안

노사신. 단종 1년에 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성종 말년에 주공격 대상이 되었으니, 연산과 대간이 부딫일 때면 그는 언제나 연산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대간들은 그를 간신이라 불렀지만, 역사에는 간신이라 남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연산은 경연에도 종종나가 경연관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토론에도 적극 임했다. 그리고 연산은 대간들의 대한 문제도 잘 처리하였고, 민생문제도 나름 신경을 써서 백성들은 성종기의 이은 태평성대를 이을 수 있었다. 연산은 부왕인 성종과 많이 닮았다. 시를 좋아했고 그림 애호가였으며 사냥도 좋아했다. 하지만 성종은 대간들의 말을 잘 따랐으며, 연산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했다. 그리고 궐 밖에선 종종 곤장 소리가 들렸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연산은 자신의 엄마인 폐비 윤씨의 죽음을 슬퍼하고 복수를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연산10320일 저녘이였다. 연산은 성종의 후궁인 엄 숙의와 정소용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그리고 장검을 빼어든 후 자순대비의 집에 갔다. 그리고 자순대비를 나오라고 했지만 자순대비는 나오지않았다. 그리고 달려온 중전 신씨의 만류에 발걸음을 돌렷다. 그리고 성종때의 후렴청정이였던 대왕대비를 에게 가서 왜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냐고 묻고 나왔다. 그리고 대왕대비는 한달 뒤에 죽었다. 그리고 연산은 대간들과 신하들이 자신을 위험하게 할수 있을 것 이라며 피바람을 불게 하였다. 그리고 절대 왕권을 위해서 피바람이 불었다.

5장 무너진 절대군주

연산은 유교식 견제장치들을 제거해나갔다.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사간원을 폐지하고, 사헌부도 축소 시켜 조사들에 대한 감찰 기능만 남았다. 홍문관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군신간의 구별을 분명히 하는 제도도 계속 강화 하였다. 급기야 하급문신은 물론 대간들에게 까지 가마를 메게 하였다. 강력한 왕권을 누리는 것이 연산의 목표였다. 연산은 사냥이나 야외 나들이를 즐겨했는데, 한번 움직이면 주변의 민가들울 다비워야 했고 급기야 민가들을 다 철거하고 금표를 세워 민간이은 못 들어오게 하고 사냥을 즐겼다. 그리고 날마다 잔치를 열었는데, 기생을 천명으로 늘리고 악공도 천명으로 늘려서 호화찬란한 잔치를 누렸다. 그리고 급기야는 만원정을 헐고 2천명이 앉을 수 있는 초대형 정자도 만들었고, 중소형 연회장도 만들었다. 그리고 후원에다가 동물원을 꾸몄다. 하지만 이동물원은 구경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냥을 위한 것 이였다. 그래서 결국은 군인과 백성들이 모여서 연산군을 쳤다.그렇게 연산군은 죽고 지성대군에게 왕위가 갔다. 그리고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는데 이가 중종이다.

느낀점:처음에는 연산군이 좋은 군주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연산군이 좋은 군주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재현

예종,성종 실록(6권)

by 류재현 posted Jan 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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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6 2014.1.22. 유재현

실록6

1장 짧았던 여종의 치세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예종이 즉위하고 9명의 대신들을 원상에 임명하였다. 원상이란 승정원에 출근하는 재상을 말한다. 세조는 17명을 원상으로 삼아 승정원을 출근캐 했는데 이떄에 이르러 9명으로 축소되고 2명씩나오게 했다. 그리고 신공신이 있었다. 신공신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면서 급부상안 종친들과 무장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말련의 구공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그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공신들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로 인해서, 신공신과 구공신간의 세력갈등이 자라나고 있다. 그리고 남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는 역모를 꾀했다가, 관련된 사람들과 남이는 모두 죽었다. 예종은 세조의 차남. 여덞살 때 세자로 채택되어 그때부터 세자수업을 받았다. 그래서 공부 또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데 세조가 망쳐논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예종1년 예종은 죽고 말았다.

2장 대신권력의 시대

예종의 운명소식을 접하고, 다들 곡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견예조판서인 신숙주가 나섰다. 그는 주상을 일찍 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왕대비를 찾아갔다. 후계서열 1위인 원자(제안군)의 나이는 겨우 4살이였다. 그래서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후계서열 3위인 자을산군이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즉위식이 열렸다. 개국이래 선왕이 죽고나서 후계자가 즉위한 경우는 문종과 단종. 문종은 세종이 죽고 5일 단종은 문종이 죽고 4일 뒤에 즉위식을 가졌으나, 성종은 예종이 죽은 바로 그날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열두 살 단종은 궁에 혼자 남겨졌지만, 열세 살 성종에겐 막강한 후원자인 대비가 셋이나 있었다. 그중 두명은 예종의 후비와 세자빈이고 한명은 그 둘의 시어머니인 대왕대비이다. 대왕대비는 몇 차례 사양 끝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수렴청정은 임금이 미성년일 경우 대비가 최종결정을 하는 것 이였다. 하지만 대왕대비는 공은 늘 손자에게 돌리고, 과는 자신이 떠맡았다.

3장 왕권을 되찾다.

성종은 명석함과 놀라운 성실성으로 일찌감치 군주수업 전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했지만. 조기 졸업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기다렸다. 그래서 해를 더할수록 훈구 댄신들은 하나 둘 사라진 반면 성종은 점점 더 어른이 되어갔다. 이윽고 성종 7, 스무 살이 되었다. 그러자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중단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왕과 원상들, 대간들이 나서서 거듭 만류했지만, 그녀의 결심은 확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종은 친정을 선언한다. 그래서 대왕대비는 정사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7년뒤 요양차 온천에 갔다가 66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손자 성종은 최고의 예우로 장사 지냈다. 성종은 한명희의 기세를 꺽는 데 성공한 성종은 이어서 원상제를 폐지한다. 그러나 훈구대신들의 힘은 아직도 막강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그들의 힘을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문제 해결을 토론과 자문을 거쳐 결정을 이루어 진다.

4장 다시 온 태평성대

성종은 즉위와 함께 유교의 생활화를 실시하였다. 유교의 전면화, 생활화를 위한 캠페인도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방식은 모법 사례 발굴과 표창이었다. 성종을 도락군주로 준비시킨 신하들은 생각하였다. 불교 폐지이다. 친정의 시작과 함께 틈나는 대로 불교 폐지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성종은 불교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없애냐며 천천히 없애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비전이 문제였다. 수렴청정 시기인 대왕대비는 신하들의 불교 비판을 어느정도 수용하였다. 그리고 대왕대비가 직접 나서서 불교를 비호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신하들의 의견을 무마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성종23년 왕은 결심을 굳힌다. 도첩제를 폐지하고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는 금승법을 통과해 버린 것 이다. 그렇게 불교는 사라졌다.

5장 성종이 남긴 유산

성종4년 성종은 대왕대비의 말의 따라서 윤기견의 딸과 윤호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다. 윤기견의 딸은 가난한 집 의 딸이였는데, 딸 윤씨는 성장환경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 윤씨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고한다. 그녀는 검소하고 예의바르게 생활하여 성종은 물론, 대비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일이 되려니 임신을 하기 시작하고, 마지막 테스트를 삼아 대왕대비가 중전이 될 마음이 없냐고 하였다. 그러자 윤씨는 거절하였다. 그래서 대왕대비는 윤씨를 중전으로 삼았다. 그레서 윤씨는 기쁨의 취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려 버렸다. 대비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등에 대해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후궁들을 저주하는 책자를 성종에게 들키고, 독약을 소지하다가 들켰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결국은 중전을 폐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폐비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성종 251225일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있으면 스무살이 되는 세자가 보위를 이으는데 이자가 폐비의 아들이자 성종의 아들인 연산이다.

느낀점: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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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조선왕조실록5

by 류재현 posted Jan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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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5 2014.1.21. 유재현

1장 어린 임금과 장성한 대군

조선 제 6대 임금 단종, 여덟 살이 되던해에 세종30년 세손으로 책봉되고, 2년뒤 문종이 즉위하자마자 세자의 책봉되었다. 그리고 이제 열두살이 되던해에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라의 주인이자 만백성의 어버이인 임금, 더없이 괴귀하고 막중한 자리아니 그에게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새임금이 미성년일 경우 왕실의 큰어른인 대비가 수렵뒤에서 섭정을 하는게 이 시대의 관례 하지만 단종에게는 어머니도 할머니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형식상 결재만 담당했고, 실제 모든 결정은 의정부에서 이루어 졌다.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 그는 문학,역법,풍수,음악,교양 등 모든 것을 두루 같추었다. 이런 그의 자질을 높게 평가한 세종은 여러 일을 맡겼고, 그의 부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2장 계유정난

수양대군은 거사를 준비하기위해 사람들을 모은다. 황수신,이정옥,이정석,이징규 등등 이렇게 차근차근 내심을 다져 가던 수양 측근들과의 상의도 없이 돌연 고명사은사를 자칭해 나간다. 수양이 명나라로 떠날때는 조정 안팍에서 요란한 전송을 받으며 떠났고, 명나라 조정의 환대를 받은 뒤 돌아왔다. 이행차로 수양은 두 가지 중요한 수확이 있었으니, 중국 조정에 얼굴을 알린 것 과 수양의 대한 조정의 의심을 누그러트린 것 이다. 그리고 수양은 단종에게 자신의 처세와 관련된 의견을 담은 상소를 봉해 올린다. 하지만 그 내용은 뻔한 이야기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종은 크게 반색하였다. 상소가 매우 알맞고 절절하다며 기뻐하는 것 이였다. 그리고 수양은 공신들을 죽였다.

3장 원통한 한 마리 새

공은 세웠으되 공신 책봉에서 제외되었던 종이나 시녀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이 주어졌다. 죽은자들의 재산을 분배해주는 것 인데, 김종서를 철퇴로 내려친 수양의 종 임어을운은 황보인의 집을 받았고, 시녀 내은은 김종서의집을, 종 막봉은 이보인의 집을 시녀 소근은 조극관의 집을, 사헌부에서 공신 책봉의 대한 문제 제기를 하였지만, 가볍게 해결되었다. 이제 권력은 온전히 수양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수양은 온갖 권력을 휘두르며 단종을 괴롭혔다. 하지만 단종은 잘버텨내고 1년뒤에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모든 내신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한달 뒤 단종은 결심을 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주었다. 곧이어 즉위식이 열렸다. 차남으로 태어난 수양대군(이하 세조)가 마침내 몽매에도 그리던 임금이 되었다.

4장 세조의 치세

세조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겠지만 피바람을 막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세조는 피바람을 막기위해 왕권강화를 실시한다. 즉위 직후 말하기를 6조의 일을 직접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6조 직계제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세조는 실시하라고 했고, 예조 참판이였던 하위지가 물러서지않고 반대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하위지를 참수시켰다. 그리고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정치방식의 불만이 있었고, 문제가 있으면 토론을 하는 정치방식을 없애버리고, 집현전도 폐지시켜 버렸다. 그리고 경연이 있는날 정인지가 말을 잘못했다. 그래서 세조는 정인지를 감옥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인지를 풀어줬다. 그래서 왕권은 강화가 되었지만, 올바르게 되지는 않았다.

5장 이루지 못한 꿈

민생안정에 대한 세조의 집년, 수령에대한 고소 허용과 윤대 파견 등 지속적 감찰, 이쯤되면 백성들의 생활이 크게 나아졌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왜그럴까? 말련에 세조가 행궁에 가 있을 때일이다. 한 여인이 세조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싶었다. 그러자 세조는 말을 하라고 하였다. 그는 나계문이란 자의 아내라 하였다. 고을 출신인 홍윤성이 정승이 되자, 유향소에선 선물로 노비를 두 명을 바쳤다. 그런데 홍윤성은 노비들이 튼튼하지 않다며 담담자인 나계문을 불러서 죽을정도로 곤장을 치는가 하면, 그러고도 분이 안풀린 듯 하여 자신이 수십년간 키운 나무를 베어버리고 길거리에서 집단구타를 하여서 죽게 만든 것 이였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홍윤성이 무서워서, 가담자 세명만 구속하였다. 하지만 관아는 그 세명을 탈옥하게 도와주었고, 오히려 윤덕녕과 그의 가족을 구속하였다. 그래서 세조는 관련자를 모두 불러서, 벌을 주고 직전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자신만의 정치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었는데, 할아버지 태종과 비슷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공신을 우대하다가 그힘이 너무 커지면 가차없이 죽였고, 세조는 공신만 우대하였다,

느낀점: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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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4

by 류재현 posted Jan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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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4 2014/1/20/유재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장 임금위에 임금

급작스레 보위에 올른 젊은 임금 세종은 두려웠다. 준비없이 나라를 맡게 되어서가 아니라, 상왕으로 물러앉은 아버지 태종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 앉았지만 권력은 왕보다 많았다. 그리고 세종이 서른이 되기 전 까지는 군사와 정치를 자신이 맡았다. 그리고 태종은 자신의 처가인 민씨가의 이어 아들 세종의 처가인 심씨가 마저 박살내버렸다. 그는 왜 그리 외척에게 가혹했을까? 아무래도 계모인 신덕왕후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버지 태조를 꼬드겨 개국에 공이 큰 전부인의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자신이 낳은 어린 아들을 세자 자리에 앉였던 그녀다. 그녀에 대한 복수도 잊지 않아서,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를 태조의 첩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왜구가 조선의 바다에서 들락날락 거리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래서 태종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쳤다. 이후100여년간 조선과 중국 해안가에는 왜구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2장 태평성대를 꿈꾸며

태종이 세상을 뜸으로써 세종은 최고 결정권자인 진짜 임금이 되었다. 세종은 소문난 효자일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아버지 태종을 존경하였다. 세종은 세종의 정치스타일이 있다. 아버지의 일생과 결단력은 존경했지만 피냄새나는 정치방식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던 것 이다. 세종은 어렵고 먼 길을 택했다. 피를 부르지 않고 조용하게, 그러나 뚜벅뚜벅 황소걸음으로 입지를 다져 나갔다. 태종 생존시에 세종은 자기 시대를 끌고 나갈 쌍두마차를 마련했으니, 진현전과 황희다.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있던 기관으로 유명무실한 상태였는데, 세종1년 자의정 박은의 청을 받아드려, 이듬해 본격 발족 시켰다. 세종은 늘 책을 손에서 때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며 토론을 앞세우는 지도자, 끊임없이 생각하여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고 뚝심있게 밀어 붙이는 임금, 그것이 세종이다. 하지만 그가 부족한 것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명나라에게 이기지 못하는 것 이였다. 명나라는 말을 1만필을 보내라고 했는데 세종은 거절하지 못하고 말을 1만필을 보내주고 금은보화를 보내주는 등 명나라만은 이기지 못하였다. 하지만 명나라의 황제가 바뀌면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3장 백화만발의 시대

세종은 효과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사가 독서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공부 체질이 아닌 학자들에게는 괴로웠겠지만, 공부돌이들에겐 환상적인 환경이였다. 그리고 저술 작업도 본격화 되었다. 조선식 농업기술서가 나오고, 의원들과 집현전 공동으로 항약집성방이 현찬되고, 뒤에 동양 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평가 받는 의방유취가 편찬되었다. 그리고 백성교육을 위해 삼강행실도를 퍼냈고, 급기야 훈밍정음을 창제하기에 이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종은 쉽지않은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결심에 선 세종은 두 가지 방향으로 독자역법계획을 진행시켰다. 양 팀의 협력으로 간의,규표,혼천의 등 천문 관측기구가 만들어져서 설치되었다. 그리고 일정성시의 란 천채관측 기구도 만들어 졌으며, 앙구일부를 시작으로 해시계도 만들어 졌다. 강물을 쟤는 수표 바람의 방향을 살피는 풍향계 등도 설치되어 기상 변화를 다양한 측면에서 ㅈㅇ합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기분야에도 많은 진보가 있었다. 더 튼튼하고 더 빠르고 수명이 긴 병선을 제조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고, 특히 화포에 대한 세종의 관심은 재대하여 귾임없이 실험하고 개량을 독려했다. 그리고 북방을 개척하여 영토를 넓였다.

4장 명군을 도운 명신들

황희 정승, 세종시절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 무혀24년간 정승으로 있었고, 이 중 19년간 영의정에 있었다. 황희하면 떠올르는 것은 온화, 청렴, 두루뭉술 이다. 그래서 인지 세종은 황희를 잘 챙겼다. 개간 작업을 추진한 공을 내새워 개간한 땅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가 하면, 교하 수령에세 땅을 받는 대가로 그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그리고 황희는 사직서를 냈다. 세종은 말렸지만, 영의 정을 물러났다. 그래서 황희는 여든일곱에 영의정에 물러나고 아흔 살에 눈을 감았다.

5장 준비된 임금 문종

세종이 문종을 세자로 책봉한 날은 문종이 8살 때였다, 세자 나이 열둘에 중국 사신들을 위한 하마연을 주관하였다. 세종은 의젓하고 총명한 큰아들이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세자는 아버지의 성품을 이받아 신중하고 차분하고 끈기 있는 세자였다. 성년이된 세자는 근사한 수염에 기품있는 얼굴, 아버지를 닯아 살찐 모습이였다. 세자로 있은지 무려 30, 스물이 넘어서 부터는 세종 곁에서 실무를 배우고, 또 세종을 거들기도 하였다. 타고난 자질, 착실한 세자 수업, 풍부한 행정 경험까지, 문종은 준비된 임금이였다.

느낀점: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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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3

by 류재현 posted Jan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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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3

2014/1/17/유재현

실록3.jpg

1장 전설이 된 태상왕

태조는 임금에서 태상왕이 되었다. 임금은 태종 이방원이 하고 태조는 태상왕이 된 것 이다. 하지만 태조는 이제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었다. 옛 신하들은 인사조차 오지 않고, 나라의 중대사들이 자신과는 의논 한마디 없이 결정된다. 물러나 6개월 남짓 지났을 때였다. 수도를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를 하는 것 이였다. 그래서 태조는 권력을 잃은 허탈감이나 옛신하들의 배신감보다. 더견디기 힘든 건 역시 슬픔이였다. 마음을 달래려 틈나는 대로 절을 찾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는지, 견디기 힘든 슬픔을 분노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태조는 정종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명령을 듣고 움직여줄 부하 한 사람 없는 신세. 그러나 뜻밖에 변화가 있었으니, 태상왕에게 비판적으로 여론이 바뀌기 시작한 것 이였다. 한양으로 떠났던 이씨 왕실이 개경으로 돌아 왔을 때 개경 사람들의 반응은 싸는했다. 여론은 태상왕에게로 모아졌다. 그리고 이제 여론은 태종에게 비판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태상왕은 최정예부대를 데리고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관군의 위세를 이기지못하고. 허무하게 패배하였다.

2장 사냥이 끝난 후

태종은 안으로는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밖으로는 명나라와의 사이가 좋아 졌다. 이제 장차 위험이 될 만한 인물은 단연 자신을 도운 공신들이다. 그렇게 공신을 없애려 했다가, 정종은 공신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태종4,제의 나이 열한살 마침내 세자로 책봉되고, 민씨가의 경계심은 더욱 날카로워 졌다. 세자는 안팎의 기대에 별로 부응하지 못했다. 공부를 게을리한 탓에 내시가 대신 종아리를 맞은 적도 있고, 식사예절이 반듯하지 못해서 태종이 혀를 차기도 하였다. 1206, 세자 나이 열세 살. 태종은 왕을 못해먹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다.그리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경승 판서에서 말단관리에 이르기까지 난리가 났다. 선위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주정은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정종은 왕위를 자신이 계속이어가기로 하였다.

3장 공신의 운명

태종의 삼촌 이화가 민무구,민무질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민무구,민무질은 정종의 처남이다. 탄핵하는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지난번 정종이 왕을 그만한다고 하였을 때, 모두들 슬퍼하였지만 민형제 두명만 기뻐하였고, 그뜻을 거두시자. 그들은 실망한 얼굴을 한 것 이였다. 그리고 정종이 던진 질문에 불경한 것이고. 또 즉위 직루 이무에게 한 말과 구종지에게 한 말에 들어난 불경의 죄이다. 그래서 공신들을 필두로 민씨 형제를 처벌하라는 주정이 쏟아졌다. 하지만 태종은 가벼운 처벌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왕의 본심이 아니라고 여긴 신하들은 계속해서 처벌을 청했다. 하지만 태종은 거절하였고 신하들은 그것마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속 처벌을 요청하였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조정에선 오늘도 백관의 아우성이 이어졌다. 급기야 세자까지 나섰다. 그래서 결국은 민씨형제를 참수시켰다.

4장 현실주의자 태종의 개혁

태종은 맨날 사냥을 나갔다. 그래서 대간과는 시종일관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다. 태종은 변명도 해보고 솔직한 고백도해보고, 사과도 곧잘 했다. 그래놓고 며칠 후엔 또 사냥을 떠날 만큼 드의 사냥병은 심각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유학자인 하륜을 중심으로 이숙번을 비롯한 청년 유학자들을 앞세워 개혁을 밀고 나갔는데, 왕권강화라는 면을 제외하곤 정도전의 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유학으로 무장한 신진관료들을 충원하고, 관료제도도 유교 정치의 구현과 중앙집권의 필요의 맞게 개편하였다. 그리고 사그라들지 않는 왜구의 노략질의 대응하기 위해 병선을 건조하고 성능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무과제도를 정착시키고, 진법훈련을 다시 실시하였다. 그리고 장교의 질을 높였다,

5장 양년과 충년

태종은 얻던 신하도 어떤 정치 세력도 두렵지 낳았다. 그런 그다 처가를 몰락시키고, 공신들을 유배보낸 이유는 오직 하나, 세자 때문이였다. 유핟자들은 세자를 훌륭한 임금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빡빡한 생활을 요구했다. 그런데 세자는 공부체질이 아니였다. 나이를 먹어 가도 세자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세자는 탈선행위를 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세자에게 경고를 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이 세자의 만행을 고하고 세자는 눈물을 고해서 태종은 마음을 풀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세자를 폐하기를 원했다. 그러자 결국에는 태종은 세자를 폐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충년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충년대군은 세자가 된지 2달만에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자가 조선의 제4대왕 세종대왕이다.

느낀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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