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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son of God Whom I lo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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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어떻게 짜여지는가?

- 교회 : 다양한 사랑의 공동체들로 직조되는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 -

 

 


1. 

교회의 본질은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1 장. 구약성경

1.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토대는 구약성경이다. 당연하게도 예수님은 신약성경을 한줄도 보신적이 없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 구약성경의 이름은 ‘타나크’라고 하는데, 이는 토라, 네비임, 케투빔의 앞글자를 따서 부르는 것이다. 토라는 율법을, 네비임은 예언서를, 케투빔은 기타 문서를 뜻한다. 

3. 토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주시기까지의 과정과, 율법의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4. 네비임은 토라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이야기 한다. 즉,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토라를 어떻게 적용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기록한 책이다.  

5. 케투빔은 시문과 이야기등으로 신앙 고백과 교훈등을 표현한 기타 신앙 문서로서, 그 중요도는 토라와 네비임에 비해 떨어진다. 

6. 구약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믿는 초월적인 신과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

7. 첫째는 노예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8. 율법의 첫머리는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출 20:2)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 세상의 초월적인 신들은 왕, 영웅들과 가까운 존재들이다. 그에 비해 노예들을 도와 해방하는 신, 노예들과 가까운 신의 존재는 충격적이다.

9. 둘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10. 이 세상의 초월적인 신들은 왕의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들인 거대한 석상으로 깎아지거나, 혹은 어마어마한 돈을 들인 금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신상들은 말하지 못한다. 율법은 한편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형상을 볼수 없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한다. 형상과 말씀의 강한 대비가 있다. 

11.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출 20:4-5a)는 신의 형상을 본따온 우상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어서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출 20:6)는 것은 말씀과 순종을 강조하고 있다. 형상과 말씀의 강한 대비는 율법의 처음부터 분명하다. 

12.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노예들의 하나님과 잘 어울린다. 거대한 석상을 깎는 것도, 금상을 만들 돈을 위해 착취당하는 것도 모두 노예를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상제작을 금하는 것은 왕의 노예착취를 금하는 것이다.  

13. 요컨대 구약의 하나님에 관해서는, 노예들의 하나님이 말씀 하신다는 것이다. 

14. 사람이 노예로 살지 않다가, 노예로 전락하는 두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이고, 둘은 전쟁에 패하는 경우이다. 

15.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왕과 부자들에게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의 빚을 탕감하라고 한다. 노예와 부를 얻기 위해 전쟁을 일삼는 왕의 의욕을 근본적으로 꺾기 위해서 전리품도 노예도 획득하지 말라고 한다. 

16. 이 세상의 왕들에게 우상은 매우 쓸모 있고, 필요한 물건이다. 거대한 우상은 왕의 위대한 힘을 보여준다. 게다가 말을 못하니, 제사장들이 왕의 구미에 맞추어 백성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왕은 거대한 우상의 힘과 신의 이름을 빌어, 거짓말로 백성을 자기 뜻대로 주무를 수 있다.

17. 우상을 만들 수 없으니, 왕의 입장에서는 백성을 압도할 힘을 과시할 수도 없다. 율법을 통해서 그 말씀을 기록까지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대로 거짓말을 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노예들의 편이기까지 하니 세상의 어떤 왕이 구약성경의 하나님을 싫어하지 않겠는가?

18. 구약성경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분명한 대비가 드러난다.

노예들의 하나님 vs 왕의 신

노예를 도와 해방하는 하나님  vs 왕을 도와 노예를 만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 vs 말 못하는 신

토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 vs 우상으로 나타나는 신

왕의 뜻대로 말하지 않는 하나님 vs 왕의 뜻대로 말하는 우상

19. 하나님과 토라 :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풀어주신,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것이 바로 토라이다.

20. 이스라엘과 토라 :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로 통치되는 나라,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이를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21. 네비임의 기록은 토라 대신 우상을 선택한 이스라엘의 왕들에 관한 기록이라해도 조금도 지나침이 없다. 

22. 이스라엘의 왕도 이 세상의 왕들과 조금도 다름 없다. 그들은 권력을 즐겼으며, 자신의 통치에 장애가 되는 토라를 치워버리고, 토라의 자리에 우상을 세웠다. 

23. 네비임에 등장하는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은 토라를 왜곡하여 왕의 맘에 드는 이야기를 신의 이름으로 제공하였다.

24. 네비임은 토라를 토대로 왕에게 말하는 예언자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많은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왕이 듣지 않았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이 망했다고 전한다. 

25. 왕들은 자기의 뜻을 거스리는 예언자들을 비참하게 죽였다. 예컨대 이사야는 톱으로 썰렸다고 전해진다.

26. 네비임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 곧 토라를 벗어난 이스라엘의 왕들과 권력자들을 고발하는 데에 중심을 둔 책이다.

 

2 장.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나?

27. 예수님은 토라의 핵심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집중함으로써, 토라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되찾아 주었다.

28. 토라에는 수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무식한 처지에 있는 백성으로서는 말씀하신 까닭과 목적을 쉽게 알 수 없었다.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29. 그런데, 그 율법 선생들은, 흑심을 품은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토라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고, 왕이 합법적으로 백성을 오도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 하였다.

30.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토라도 두껍고 복잡한데, 토라의 해석집인 미트라쉬까지 더하여졌다. 토라를 가르치는 권력자들에 의해 토라는 그 핵심에서 벗어나고, 그 힘을 상실했다. 그들은 교묘한 해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토라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31. 잘못된 해석의 폐해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말한다.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받으실 것이 고르반(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만 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그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너희가 물려받은 전통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며, 또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한다.”(막 7:9-13)

32. 예수님은 율법 가운데 있는 모든 계명의 으뜸을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신6:4-5)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레19:8)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막12:29-31)

33. 이해하기 어려운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는 말씀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단연코 없다.

34.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는 말씀이 이해하기 어려운가? 그럴수 있다. 당신은 하나님을 본적이 없고, 알지도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35. 토라의 두 기둥이 되는 법전은 신명기와 레위기이다.

36. 예수님은 신명기에서 ‘하나님 사랑’을, 레위기에서 ‘이웃 사랑’을 그 핵심으로 뽑으셨다.

37. 신명기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살 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 30:19)

38.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목숨을 다해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얻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에 목숨을 다해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는 것이다.

39. 레위기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주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레 11:45)

40. 하나님은 이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분이다. 그 것이 신성이다. 

41.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여 이 세상과 구별되는 것은 인간에게 신성에 참여할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42. 세상에서 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방식은 ‘힘’이요, 그 기원은 ‘출생’이다. 왕과 영웅은 신의 아들로 추앙받는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그 신성함으로 지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한다. 사람들은 그들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추앙한다.

43. 그러나, 레위기를 통해서 신성에 참여하는 길은 ‘출생의 신분’이 아니라 ‘사랑함’이다. 그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은총가운데 은총이 아닐 수 없다.

44.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자기의 삶을 통하여 나타내는 것이다.

45.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토라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말씀에 순종하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순종하라.

46.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헛된것으로 전락해버린 토라가 다시 살아났다. 말못하는 벙어리가 되고, 권력자들을 지켜주는 우상이 되어버린 토라는 폐기되었다. 

47.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렇게)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이미 들었던 것은 헛된 토라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참된 토라이다. 

48. 예수님은 토라를 살리고 완성하시고자 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마5:17-18) 이 말씀은 토라가 다시 살아났다는 선언이다.

 

3 장. 너무나 쉬운 토라

49. 그 두꺼운 토라, 그 무거운 미트라쉬 대신,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가!도대체 잘못 해석될 여지도 없고, 오해할 여지도 없다.

50. 토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신 30:11)

51. 네비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럽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꼬집어 말한다.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을 너희가 다시는 써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그런 말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 말이 그에게 정말 부담이 될 것이라고 하여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만군의 주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여라.”(렘 23:36)

52.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따르는 것이 쉬운 것이라고 선언한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 11:28-30)

53.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은 우리의 능력으로 실천하기  쉬운 일이요편하고 가벼운 길이다.

54. 그런데, 이 세상의 왕들은 이 말씀에 순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는 왕의 모든 권력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55. 그러므로 사랑은 이 세상 모든 권력의 무덤이다. 그리고, 권력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사형선고와 같은 말씀이다.

56.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따라서 살아가는 길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이해하기 쉽고, 실천하기 쉬운 것이며, 가벼운 것이다.

 

4 장. 바울을 통해 더 분명해진 ‘사랑’

57. 바울에게 처음부터 사랑이 핵심이었다는 것은, 그 첫 서신인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부터 ‘사랑’을 강조한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58.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1:3)

59.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을 사모하여,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도 기쁘게 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살전2:8)

60. “그런데 지금 디모데가 여러분에게서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살전 3:6)

61.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여러분끼리 서로 나누는 사랑과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고, 넘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우리 주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잡힐 데가 없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살전 3:12-13)

62. “교우들에 대한 사랑을 두고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겠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는 가르침을 받아서,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것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더욱더 그렇게 하기를 권면합니다.”(살전 4:9)

63. 바울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이 말씀이 율법의 모든 것이라고 선언한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 5:14)

64.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롬 13:8-10상)

65. 최종적으로 바울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하)

 

5 장.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66.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나라, 그 나라를 위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세우셨다.

67.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 나라는, 토라가 완성되는 나라였다. 

68. 그리고 예수님을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나라 역시 토라가 완성되는 나라였다. 

69. 그리고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에 토라가 완성되는 나라를 세우는 왕으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메시아이다.

70.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말씀은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라는 바울의 선포이다. 

71. 사랑은 토라의  완성이며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사랑함으로써 구현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72. 사랑의 선포야 말로 예수님의 선포의 핵심이며, 사랑을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구현되며, 완성되는 것이다. 

73. 두꺼운 토라를 뚫고, 무거운 미트라쉬를 깨부수고, 가볍고 쉬운 ‘사랑’을 선포하신 예수님, 그리고 자신의 몸으로 그 사랑을 살아내신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메시아이며 하나님 나라의 현존인 것이다.

 

6 장.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다

74. 예수님은,  “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을 가르치셨고 말씀을 자신의 몸으로 살아가셨다기독교는 바로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75.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말씀에 집중할 때, 자신의 정체를 경험하며 드러낸다. 

76.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의 몸으로 구현될 때, 교회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다.

77.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에는, 교회는 예수님과 무관한 종교단체일 뿐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감추어진 비밀이며, 교회는 자신의 정체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지도, 예수님을 증언하지도 못하는 종교단체로 전락할 것이다.




 

2.

사귀고,

함께 먹고,

서로 먹이고,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생활이다.

 

1 장. 사랑하는 것 뿐이다.

1.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에 율법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고, 그 말씀이 율법의 요약이며 율법의 완성임을 믿는다면, 가야 할 길은 오직 한 길 뿐이다. 사랑하는 것이다.

2.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고,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구하지 말아야  것이다. 

3.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이라고 가르치면서 뼈저리게 깨달은 점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전부라는 말씀을 듣고도, 성경에서 다른 것을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4. “사랑하라는 말씀이 옳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해서 하는 말인데, 성경에 사랑하라는 말씀 말고 중요한 다른 말씀은 없습니까? 제가 성경을 읽어보니 많은 말씀이 있던데….” 라고 묻는 부류가 그들이다. 특히 성경공부 시간마다 빠지지 않고 열심인 사람들 중에 이런 부류가 제법 있다. 

5. 사랑하려는 사람은 성경에 관한 그  밖의 질문이 적고사랑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성경에 관한  밖의 질문이 많다. 

6.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는데, 나는 아직 내 몸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먼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7.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할 때에는 분명히, ‘내가 거짓말쟁이’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내가 나를, 내가 얼마나 나만을 사랑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8. 한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하는 절망과 자기혐오조차도, 그 뿌리는 자기를 사랑하는데에 두고 있다.

9. 아직까지 그것을 모른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을 오직 당신만을 철저히 미워하십시오.” 과연 자신을 혐오할 힘은 어디서 샘솟는 것인가?

10. “사랑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은 예수님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나 하는 것 아닙니까?  나도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되질 않네요. 라고 볼멘 소리를 하는 최악의 부류도 제법 있다.

11. 골프 선수가 되려는 사람에게, 타이거 우즈는 꿈이다. 타이거 우즈는 골프 천재이다. 누구나 우즈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꿈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많은 시간을 들여 타이거 우즈의 플레이를  배우려고 애쓴다그리고자기도 일생에   쯤은 우즈와 같은 플레이가 이루어질  있다고 믿으며결코 좌절하지 않는다타이거 우즈는 골프선수들에게 희망일 결코 절망이 되지 않는다. 

12.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꿈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천재이다. 누구나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꿈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 많은 시간을 들여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려고 애쓴다. 그리고 우리도 일생에 한 번 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일 뿐, 결코 절망이 되지 않는다. 

13. 사랑이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 하는 것이다. 그들은 ‘부담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다. 

14. 한 사람의 박세리가 한국의 수 많은 여자 골프 선수들을 낳았다. 

15. 한 사람의 예수님이 이 세상의 수 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낳았다.

16. 봄이 오기 위해 수 많은 제비 떼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한 마리의 제비로 봄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17.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의 말씀이요, 몸으로 행하기 쉬운 말씀이다. 

18.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삶이 귀한 까닭이 이것이다. ‘예수님이 하면, 나도 한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희망이다.

19.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예수님의 삶을 믿고, 예수님의 삶을 소망하며, 예수님의 삶처럼 사랑하는 길을 가는 것 뿐이다.

 

2 장. 사랑하기 어렵게 만드는 생각들

20. 사랑을 관념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생각하기는 쉬우나,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관념이 나를 지배한다해도, 내 몸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21. 사랑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해야 마땅하다.’ 라는 말은 심히 경계해야 한다. 

22. 사랑이 옳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보다 ‘옳음’이 먼저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라”는 말씀보다는, “옳게 살아라”는 말씀이 참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하라”로 요약된다.

23. 세상에서는 올바르게 사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며, 세상을 이끌어가는 가치 있는 일이며, 그런 점에서 보람된 일이다. 

24. 그러나, 사랑하는 일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일도 아니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가치 있는 일도 아니며, 보람 있는 일도 아니다. 

25. 사랑하라는 말씀을 믿고 살면, 당신이 생명을 누릴 뿐이다.  

26.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당신이 사망의 깊은 계곡을 헤매며, 생명의 갈증을 느낄 뿐이다.

27.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삶의 길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시금 이념과 권력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념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억압하며, 권력을 창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28. 사랑을 ‘베푸는 것’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베푸는 것’은 선행이다. 사랑을 선행과 착각하는 것은 사랑을 이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29. 사랑 받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빚을 진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는 이 세상의 교훈이다.  

30. 거꾸로,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받는 사람에게 빚지는 것이 사랑의 핵심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오히려 ‘빚지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 받는 것이 빚이 아니라, 사랑 하는 것이 빚이다.  

31. 바울은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라고 가르쳤다.(롬 13:8)

32. 바울은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받을 삯이라고 말하였다.(고전 9장)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삯으로 느끼는 것이야 말로, 사랑하는 느낌의 본질이다.

33. 아가페, 필리아, 에로스 운운하며 사랑을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분류법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을 난해하게 만드는 부작용이 크다.

34. 연애할 때,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 것이다.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말은, 자기 희생이나, 선행, 베푸는 보람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참으로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사랑을 받아주기만을 간절히 원할 뿐이고, 나의 사랑을 받아주는 것이야말로, 결코 잊을 수 없는, 당신에게 진 빚이다.  타산적이지 않은 사랑만이 우리를 생명의 열정으로 타오르게 한다.

35. 100일도 안된 자식의 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열망을 느껴본 일이 있는가?그 열망은 당신을 힘있게 만들고, 당신을 전투적인 삶의 한복판에 희망으로 뛰어들게 만든다. 그 때 당신이 느꼈던 그 기쁨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면, 당신의 자식에게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자식을 안았던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최상의 시간이었다.

36. 당신의 말을 믿고, 지지하고, 함께 하는 친구를 기억하는가? 어린 시절 아무 타산 없이 함께 놀던 그 친구들 중에 분명히 한 사람 쯤은 있을 것이다. 그 친구가 보고 싶어 아침에 눈 뜨면, 그의 집 앞에서 함께 학교 가자고 기다렸던 그 친구. 함께 도시락을 까먹으면, 밥맛이 달았던 그 친구. 학교 끝나자마자 찾아가서 함께 놀던 그 친구. 그를 그리워하는 열정이 당신의 기다림을 기쁘게 했던 그 순간. 당신의 기다림을 받아준 그 친구에게 얼마나 큰 빚을 졌었는가.

37. 조금 나이가 들면, 인생의 같은 길을 가는 동지로서의 친구도 있었다. 인생을 논하고, 함께 꿈꾸고, 서로 도우며, 어깨 걸고 함께 했던 그 친구.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서로에 대한 믿음만으로도 큰 재산이었고, 배부름이었던 그 친구.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이 험한 인생길을 지금까지 헤쳐 올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때에 그 친구에게 얼마나 큰 빚을 졌는지….

38. 어떤 부류의 사랑이 되었든, 사랑하는 그 시간들 만큼 행복한 시간은 없다. 그 어떤 물질적 소유로도 채워질 수 없는 그 충만함의 시간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것을, 나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주기를 간절히 원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시간, 곧 사랑의 시간이다.

39. 물론, 그 시간은 지나고, 그 사랑도 지나간다. 남녀의 사랑은 소유욕으로 썩어버리고, 자식 사랑은 성취욕으로 변질되며, 죽마고우의 사랑은 자아에 눈 뜨면서 사라지고, 동지들의 사랑은 상호 이익을 위한 윈-윈 게임으로 타락하면서 소멸된다.

4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느꼈던 느낌의 공통분모가 바로 사랑의 힘이다. 우리를 살게 하고, 힘 있게 하고, 기쁘게 했던 힘. 그 큰 세상도 작아 보이고, 그 추한 세상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었던 힘.

41. 사랑에 사로잡혀 사랑하던 그 순간이야 말로 최상의 시간이었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사랑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

42. 또 다시 사랑에 사로잡히는 그 순간이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3 장. 사랑은 사귀면서

43. 사랑은 구체적인 사건이다.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을 보면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샘 솟는가? 그런 사랑은 없다.

44. 만나고, 낯익히고, 좋은 느낌이 생기고, 같이 차 마시고, 같이 밥 먹고, 친해진다.

45. 같이 영화보고, 같이 수다 떨고, 같이 놀고, 뭔가 함께 하고 싶고, 뭐든 함께 하고 싶고, 좋아하게 된다. 

46. 떨어지면 그리워하고, 만나면 반갑고, 무엇이든 도움이 되고 싶은 것. 사랑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싹트고 자라는 것이다.

47. 이런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처음엔 어렵지 않다아니너무 쉽다만나고 사귀고 함께 먹고 함께 마시고함께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눈다절대로 어려울 것같은 구석이 없어 보인다.

48. “나는 기독교의 사랑은 자기 희생과 헌신과 십자가의 길, 뭐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의 길이 그런 거라면 정말 쉽겠네요.” 

 

4 장. 미움도 사귀면서

49. 그렇다면, 세상에서 사람 만나서 사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여태껏 살면서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사귀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그렇다면 당신 주위에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로  차있어야  텐데과연 그런가?

50.  처음 만나면 새롭다는 느낌에 들떠서 금방 가까워진다내가 그를 좋아하면서나의 허전함이 메워지는 느낌이 든다좋은 느낌이 순식간에 밀려온다.

51. 시간은 빨리 지나가고, 더 이상 새로운 느낌으로 들뜨지 않는다. 그 느낌이 차분하게 가라앉을 때 쯤,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안보이던 결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52. 내가 그에게 하는 것과, 그가 나에게 하는 것을 비교하게 되고, 보면 볼수록 결점도 커져 간다.

53. 그리고, 어느 순간 좋은 느낌은 작은 미움으로 변질된다. 집착이 없으면 시들해 진다.  집착이 있으면  미움으로 진행되고오히려 싸우는 관계로 변질된다. 

54. 이런 과정 속에서 오래도록 살아남는 관계는 흔치 않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로 발전해야 지속된다. 그러나, 이해 관계로 변하고 나면, 처음의 그런 설렘은 사라져 버린다.

55. “내가 좋아?” 오래 사귄 그의 질문에 솔직히 답한다면, ‘글쎄…. 처음의 그 느낌은 아니지만,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쪽 아닐까? 오래된 습관을 버리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더 쉽고, 그만 사귀기는 더 어렵고, 그래서 당신의 결점도 어느 정도는 눈감기로 한 거…. 뭔지 모르지만 당신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랄까…. 이 정도면 좋은 쪽이겠지?’

56. 나를 채우던 처음의 그 좋던 느낌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허전함이 다시 메운다.

 

5 장. 사랑하는 것, 사랑 받는 것

57. 사랑하라는 말씀을 믿고 시작했으나, 사랑이 커져서 찬란한 사랑의 목표인  십자가의 길로 접어들기는 커녕피로만 쌓인다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58. 기적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도한다. “하나님, 그가 밉습니다. 미운 마음을 없애주세요.” 기도할 때는 미운 마음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일 때도 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59. 사랑하는 것과 사랑 받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낱말들이다. 돈을 주는 것과 돈을 받는 것이 전혀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60. 처음 만나 서로 사귈 때에 일어나는 사건은 서로 사랑하는 느낌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느낌은 상대방에게는 사랑 받는 느낌으로 느껴진다. 당신을 채우는 처음의 그 느낌은 사랑하는 느낌에서 온 것일까, 사랑 받는 느낌에서 온 것일까?

61. 세상의 학자들은 사랑 받는 느낌에서 온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하는 느낌에서 온다고 한다.

62. 세상의 이론에 따르면, 사랑은 자아를 비우는 것이다. 자아를 비우는 것이 어떻게 자아를 채우겠는가? 맞는 말이다.

63. 사랑하는 느낌은 욕심이 없는 느낌이다. 사랑 받는 느낌은 욕심이 있는 느낌이다. 

64. 자아를 채우겠다는 것은 욕심이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욕심이 없는 느낌은 ‘채워야 할 필요 자체’를 없애는 느낌이다. 채울 필요를 채우는 것과 채울 필요 자체를 없애는 것, 둘 중에 어느 쪽이 강력한가?

65. 세상의 학자들은 당신의 허전함이 ‘무엇으로’ 채워진다는 느낌은 잠시일 뿐,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66.  그러나당신이 사랑할 때에 놀랍게도당신의 허전함이 사라진다당신의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워야겠다는 느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67. 당신 집의 마당에 끝이 안 보이는 구멍이 있고, 메워도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다고 하자. 계속 메워 볼 것인가, 아니면 구멍이 없는 집으로 이사할 것인가? 

68. 사랑할 때에, 당신의 존재의 집을 바꾸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69. 사랑하기 전에 당신은 메워질 수 없는 구멍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사랑하면서 당신에게는 구멍이 없는 집이 새로 생겼다. 그 때부터 당신은 두 집에서 동시에 살아가게 된다.

70. 전에 살던 집에서 당신은 허전함을, 새로 생긴 집에서 당신은 충만함을 느낀다.

71. 서로 만나 사귀면서 사랑이 시작될 때의 그 좋은 느낌은 당신의 구멍이 메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의 구멍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72. 당신이 여태껏 살아오던 습관과 지식에 따라, 상대방이 당신의 구멍을 메운 것으로 판단한다면, 상대방은 당신의 욕심을 메울 재료로 전락하게 되고, 사랑은 사라진다.

73. 처음의 그 좋은 느낌의 근거는 그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를 사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미워할 일이 아니라, 내가 그를 사랑할 기회를 준 것을 감사할 일이다.

74. 당신의 존재를 구멍이 뚫린 집에 두고 있는 한, 아무리 기도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75. 하나님께서는 “사랑 받아라” 하지 않으셨다. 오직 “사랑하라” 하셨다.

 

6 장. 사랑은 기도로만 가능하다

76. 기도는 몸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77. 사랑 받아야 만족하던 몸을, 사랑해야 사는 몸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기도이다.

78. 기도하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희망해야 하고, 기도함으로써 사랑하는 몸으로 바꾸어야 한다. 

79.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하라’ 이다. 하나님은 ‘사랑’ 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화신’ 이다‘사랑’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사랑’은 하늘에서  ‘거룩한’ 것이다. 

80. 성령은 이 세상에 속한 영이 아니다. 더러운 영이 아니다. 거룩한 영이다. 하나님의 영이다. 예수님의 영이다. 그리스도의 영이다. 사랑의 영이다.

81. 서로 사귀면서 느끼는 갈등은 아직 나의 몸이 사랑 받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82. 사랑 받기를 요구하는 생각은 육신에 속한 생각이요, 이 세상의 영이요, 더러운 영이다.

83. 기도는 사랑하려고 생각만 해도 온 몸이 기뻐서 전율하게 만든다. 이것이 성령으로 채워진 몸의 느낌이다.

84. 처음 만나서는 각각 음식값을 낸다. 다음에는 서로 음식값을 내겠다고 한다. 내가 계속 음식값을 내게 되면 만나는 것이 피곤해진다. 함께 먹는 것은 즐거운 사귐이다. 내가 먹이는 것도 즐거운 사귐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가 몇번 먹였는가를 셈하게 되고, 그때부터는 피곤한 사귐으로 변한다. 

85. 얻어 먹은 것은 매우 구체적인 빚이다. 얻어 먹은 것을 갚을 길이 없으면, 탕감해 줄 것을 공손히 부탁할 일이다. 그리고 그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을 용서라고 한다.

86. 어쩔 수 없어서 마지못해 탕감해 준다면, 내가 얻을 삯이 없다. 그러나 사랑함으로 기꺼이 즐겁게 탕감해 준다면, 바로 그것이 내가 얻을 삯이다. 그 삯이 사랑이며, 나의 느낌은 충만함이다.

87. 기도는 얻어 먹기를 좋아하는 몸을 거둬 먹이기를 좋아하는 몸으로 변화시킨다. 

88. 변화된 몸은, 내가 먹이는 것을 기쁘게 먹는 사람에게, 자랑대신 감사함으로 응답한다.

89. 만나서 사귀는 일이 사랑으로만 커져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사랑하는 마음이요, 둘째는 용서이다.

90. 이 두 가지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핵심이다. 누가복음서는 성령 받는 일, 곧 사랑하는 마음을 받는 일에 중심을 두었고(눅 11:13), 마태복음서는 용서, 곧 용서 하는 일에 중심을 두고 있다(마 6:14-15).

91. 사랑함으로 살고자 하는 교회의 사귐에 가장 중요한 구체적인 요소는 화해 — 죄의 고백과 용서이다. 교인들은 용서함을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큰 사랑으로 전진한다.

92. 사랑하지 않는 삶, 그래서 용서하는 기쁨도 없는 삶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삶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막 9:29)

93. “사랑하라”는 말씀이 전부임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으로 사귀는 교회가 힘쓸 일은 오직 하나,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하는 일’ 뿐이다.

 

7 장. 교회의 경계

94. 교회의 경계는 “사랑하라”는 말씀에 있다. 요한복음서는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계명이라고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계명을 받은 사람들의 무리이며, 계명은 교회의 경계가 된다. 계명을 떠나는 사람들은 파계한 사람이며, 더 이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95.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은 만나서 사귀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96. 그런데, 만나서 사귀는 일은 교회 밖의 세상에서도 늘 일어나는 것이다.

97. 그러나 이 세상의 사귐은 사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사랑 받는 것이 목적이다. 나를 채우기 위해 그 사람을 사용하는 것이 목적이고, 사랑하는 것은 수단일 뿐이다. 사랑하는 것이 수단으로 변질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다.

98. 교회와 교회 밖의 사귐의 차이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사랑하는 것이 목적인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하는가 이다.

99. 그렇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할까? 가능하다. 다만,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은 당신을 수단으로 삼고자 할 것이다. 당신이 그들의 수단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도리어 미워할 것이다. 당신은 사랑하라. 그러나, 그들이 미워하면 떠나라. 

100. 사랑을 믿고, 사랑을 희망하고, 사랑하는 삶. 사랑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사귀고, 함께 먹고, 서로 먹이고, 기도하는 것. 바로 이것이 교회의 생활 양식이다. 

101.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대로 나누어 주었다.”(행 2:42, 45b)

102. 사랑하는 삶의 결과는 기쁨의 찬양으로 귀결된다. 날마다 룰루랄라 콧노래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밖의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겠는가?(행 2:47)

 




3.

교회는,

다양한 사랑의 공동체들로 직조되는,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사랑은 지금 여기나와 너의 사건이다.

1. 사랑하는 것은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내 몸을 통해서 구현되는 매우 구체적인 사건이다.

2. 마틴 부버의 표현을 빌어 본다면, 사랑하는 사건은 ‘나-너 관계’에서 일어난다.

3. 사랑하는 사건은 ‘지금-여기’ 에서 ‘나-너’의 1:1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4. 사랑하는 사건은 철저히 2자 관계이다. 개인적인 차원으로 분석되지 않으며, 3자 이상의 다자관계로 종합되지도 않는다.

5. 사랑은 결코 익명의 차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함으로 드러나는 자아는 늘 특수한 자아이며, 결코 보편화 되지 않는다.

6. 이러한 점에서 다중 속에서 익명적인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반 기독교적이다.

7.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다중 속에서 익명적인 종교 생활을 영위하도록 보장 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반 기독교적이다.

8. 기독교의 경험은 어떤 심리상태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경험은 삶의 구체적인 모든 요소들을 수반한다.

9.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 근거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과의 1:1 교류와 그로부터 고양되는 각성된 느낌에서 찾고, 그로부터 확산되는 현상에서 나타난다는 식의 주장은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

10. 사랑하는 사건은, 그 시작 단계에서, 비록 지금은 자신의 짝과 대면하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의 짝을 요청함으로써만 시작되며, 구체적인 한 사람을 만나서 사랑할 때까지 그 시작과 분리되지 않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11. 개인적인 차원의 종교생활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다중 속에서의 익명적인 종교생활조차도 불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 기독교라는 종교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2 장. 사랑할 수 있는 규모

12. 사랑하는 것은 1:1의 사귐에서 구현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 공동체의 규모는 구체적이고 제한적이다.

13. 최소 단위는 두 명이다.

14. 최대 단위라도, 익명을 유지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어야 한다. 몇 만 명, 몇 천명은 분명히 아니다.

15. 인간관계를 연구한 사람에 따르면,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살면서 친하게 관계를 맺는 사람의 숫자는 250명 정도라고 한다. 나중에 관계가 깨지는 경우를 포함해서 말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250명 정도의 규모가 최대 단위가 될 것이다. 

16. 인간의 현실은 평생 동안 떠나는 사람과 새로 들어오는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 사별하는 경우 외에 아무도 떠나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보다 앞서 사별하는 사람을 절반이라고 한다면, 170명의 규모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대 단위가 될 것이다. (170명 중에 평생 동안 85명을 사별하고, 85명이 새로 들어온다면, 총 255명이 된다.)

17. 이 경우에 170명 규모의 공동체가 사랑으로 채워지는 경험에 이르기까지는 평생이 걸린다.

18. 더 짧은 기간에 사랑으로 채워지는 공동체를 경험하려면, 규모는 더 적어진다.

19. 하나의 공동체가 사랑으로 채워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기간을 2년으로 정해보면 최대 규모는 어느 정도가 될까?

20. 한 사람이 사귈 수 있는 기간을 70년 정도라고 할 때, 1년에 사귈 수 있는 사람의 총 수는 3~4명이다. 따라서, 2년 동안에 한 공동체가 무리 없이 사랑을 구현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 최대 규모는 6~8명 정도가 된다.

21.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보자. 1주에 1번씩 시간을 내어서 1:1로 만나는 것을 전제하고, 10번을 만나서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한 사람을 자연스럽게 사랑하기까지 10주가 소요된다. 

22. 이 경우에, 2년 동안 같은 공동체에서 살아간다면, 10주의 10배인 100주 정도의 기간이 주어진다. 따라서, 사랑을 구현할  수 있는 최대 규모는 10 정도가 된다.

 

3 장. 단위 공동체와 예수님의 새 가족

23. 예가교회는 2년 정도의 기간에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규모의 공동체를 단위공동체로 하고 있다.

24. 이러한 점에서 예가교회는 단위공동체의 최대 규모를 6~10명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

25. 예가교회의 단위 공동체는 2년 동안에 사랑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한다. 

26. 예가교회의 경험에 비추어, 6~10명 정도의 단위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로 성장하기까지의 기간은 2년이면 짧은 편이고 5년이면 넉넉한 편이다.

27. 예가교회는 이 단위 공동체를 ‘가족모임’ 이라고 부른다. 

28. ‘가족’은 그 양적인 규모에 있어서, 한 사회를 구성하는 단위 공동체일 뿐 아니라, 부모와 형제의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라는 질적인 점에 있어서도 교회의 단위 공동체를 잘 표현하는 말이다.

29.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새로운 가족으로 부르셨다.

30.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 바깥에 서서, 사람을 들여보내어 예수를 불렀다. 무리가 예수의 주위에 둘러앉아 있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바깥에서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어머니다.’”(막 3:31-33)

31.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요 19:26-27)

32.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구현되는 공동체를 가족—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33. 예수께서 제자들을 새 가족의 형제로 여기시고 사랑하셨으므로, 교회는 처음부터 서로를 형제라고 불렀다. (행 1:15)

34. 바울도, 교회를 가족—형제들—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롬 8:29) 예수님은 새 가족의 맏형이시다.

35. 사랑을 몸으로 구현하는 공동체를 가족으로 이해하는 것은 막연히 사랑하자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다. 우리는 누구나 가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36. 그리고, 사랑이 이루어 내는 공동체를 가족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랑하는 삶이 구현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게 준다. 

37. 사람들은 이 땅에 속한 혈연 가족에 잇대어 100년의 삶을 누린다. 그러나 우리는 저 하늘에 속한 영의 가족에 잇대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어떠한 가족이 더 중요한가?교우를 사랑함이 적어도 혈연가족을 사랑함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38. 혈연 가족은 이 땅에서는 사랑의 공동체에 가장 가깝지만, 형제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영의 가족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형제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살면 살수록 사랑이 커져간다.

39. 성경의 시인은 영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복이라고 노래하였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시 133편)

40. 가족의 기능 중의 하나는 가족의 재생산이다.

41.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고, 예수님을 맏형으로 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일 뿐 아니라, 예수를 잉태하고 낳고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공동체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하는 무리를 향하여 어머니라고 부르셨다.(막 3:33)

42. 제 2, 제 3의 예수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신부로 표현하기도 한다.(계 21:2) 고대 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는 많은 자식을 낳아 잘 기르는 어머니가 될 여자이다.

43. 사랑의 공동체를 가족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 공동체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것은 제 2, 제 3의 예수를 잉태하고 낳고 기르는 것이다. 

44.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자신을 어머니로 표현하였다.  “나의 자녀 여러분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4:19)사랑은 하늘에 속한 사람을 낳아서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때까지 기르는 것이다.

45.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실존을 그리스도의 삶으로 표현하였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 2:20중)

46. 하나의 가족인 사랑의 공동체에서 성장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삶을 이어가는 제 2, 제 3의 예수로 다시 태어나고 새롭게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4 장. 몸과 지체로서 완성되는 사랑

47. 바울은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가족보다 더 긴밀한 관계인 몸에 비유한다. (고전 12장)

48. ‘가족’이 사랑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데 반해서, ‘몸’은 사랑하는 삶을 비유적으로 지시한다.

49.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토라의 완성이라고 선언한 바울이, 사랑이 구현되는 공동체를 ‘몸’에 비유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50. 몸이란 ‘나’를 구현하는 것이다. 

51.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새로 태어나고성령으로 숨쉬며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중심은 사랑이며 사랑에서 그들은 하나이다. 

52.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존재의 근거가 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영이 나의 중심이 되면, ‘나’는 ‘사랑’이 되고, 나와 함께 새 가족의 형제들은 한 ‘몸’을 이룬다. 

53. 새 가족의 형제들은 나와 함께 ‘사랑’을 구현하는 한 몸의 지체들이다. 

54. 몸의 부분임을 강조하는 지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새 가족의 형제들은 ‘나의 몸’인 것이다.

55. 그러므로 나는 새 가족의 형제들을 나의 몸으로 여겨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56. 내가 간절히 원하나, 나의 몸이 부족해서 이루지 못하는 사랑의 구체적인 부분들을 새 가족의 형제들이 나의 몸을 대신하여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들의 사랑을 볼 때마다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57. 한 몸의 여러 지체로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는 한 몸인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룬다. 이것으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이 구현된다.

58. 이러한 점에서 고린도전서 12장을 은사론으로 보는 것은 핵심을 빗겨간 것이다. 

59. 몸과 지체의 이야기인 12장에 이어서 ‘가장 좋은 길’로서 사랑을 제시하는 13장을 함께 연결하여 읽는다면, 고린도전서 12장은 13장과 함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길” 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핵심에 가깝다.

 

5 장. 다양한 공동체들

60. 몸과 지체의 비유는 사랑의 공동체의 일치와 다양성에 관한 분명한 원칙을 제공한다. 

61. 공동체의 구성원 각각은 사랑에 있어서는 일치를, 그 밖의 모든 것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이룬다.

62. 더 나아가 몸과 지체의 비유는 사랑의 공동체들의 일치와 다양성에 관한 원칙을 제공한다.

63. 한 몸을 이루는 모든 공동체들 각각은 사랑에 있어서는 일치를 그 밖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이룬다.

64. 새 가족으로서 살아가는 단위 공동체는 사랑에 있어서의 일치를 이루는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형성한다. 

65. 각각의 몸으로 구현하는 사랑하는 삶의 느낌들의 일치는 하나인 공동체의 몸을 이루는 구체적인 기반이 된다. 

66. 한 몸으로서 살아가는 단위 공동체는, 사랑으로 구현되는 삶의 다양성을 함께 기뻐함으로써, 또 다시 사랑의 일치를 구현한다.

67. 사랑의 일치와 그 밖의 다양성을 함께 기뻐하는 사랑은, 사랑이 다층적인 공동체에 어떻게 공통으로 적용되는가를 보여준다.

68. 개인과 공동체를 대립적으로 보는 모든 시각은 사랑 안에서 와해된다.

69. 사랑은 모든 개인을 자유케 하는 공동체의 능력이다.

70. 그러므로 교회는 다양한 개인들이 사랑함으로써 직조되는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71. 마찬가지로, 교회는 개인들의 다양함을 기뻐함으로써 개인들을 자유케 하는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72. 공동체의 층위를 하나 높여도 동일한 명제가 성립한다.

73. 교회는 다양한 사랑의 공동체들이 사랑함으로써 직조되는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74. 이것은 하나인 수 많은 다양한 개교회들을 품은 하나인 보편교회가 놓일 수 있는 틀이다.

75. 마찬가지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들의 다양함을 기뻐함으로써 그 공동체들을 자유케 하는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76. 이것은 각각의 개교회의 삶을 통해서 하나인 보편교회의 특성이 나타날 수 있는 틀이다.

 

6 장. 예가교회의 경우

6.1. 가족모임

77. 가족모임은 교회를 구성하는 원자와 같은 단위 공동체이다. 가족모임은, 새 가족의 사랑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매우 중요한 공동체이다.

78. 가족모임에 속한 성원들은 신앙적 지도에 따라서, 사랑하는 삶을 시작한다. 8주를 하나의 단위로,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고 구현한다.

79. 가족모임을 통해서 개인들은 사랑이 구현되는 하나의 공동체를 경험한다.

80. 가족모임에서 체득하는 사랑과 그 느낌을 서로 나눔으로써 하나가 된다. 사랑과 그 느낌의 일치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81. 단위 공동체는 교회의 성원들이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로 직조될 수 있도록, 매우 구체적인 사랑의 일치를 생성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6.2. 예배공동체

82. 예배 공동체는 하나인 예가교회 전체의 모임이다. 성찬에는 모든 아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83. 리마 예전에 기초한, 매주 성찬이 있는 예전으로 예배한다. 사랑하라는 말씀이 선포되는 말씀 예전과, 사랑의 구현으로써의 성찬 예전이 중심이 된다. 여기에 뿔뿔이 흩어져 다양한 일상들 살던 개인들이 모이는 개회예전과, 예배를 통하여 하나된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파송의 예전을 덧붙여, 모두 4개의 예전으로 구성된다. 

84. 예배예전의 꽃인 성찬은 내 살을 주어 먹이고, 내 피를 흘려 용서하는 것을 예전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이는  “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성찬을 통해완성됨을 나타낸다따라서 성찬 예전은 사랑의 완성이며하나님 나라의 현존이고구원의 현존을 의미하며예전을 통해서 선취하는 것이다. 

85. 예배 공동체는 성찬의 일상화를 목표로 참여한다. 

86. 예가교회는 예배공동체에 주일 사랑의 식탁을 포함하는데, 이는 예배를 통해서 선취한 성찬의 느낌을 사랑의 식탁까지 연장함으로써, 성찬의 일상화를 지원하는 것이다.

87. 교회는 그 사귐에서 함께 먹고 함께 마시는 것이 일상화 되기 때문에, 성찬의 일상화는 사랑하는 삶을 구현하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6.3. 주일식탁 공동체

88. 주일 사랑의 식탁을 함께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주일식탁 공동체는 남녀노소로 구성된 또 다른 단위공동체이다. 다양한 세대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혈연 가족과 가장 비슷한 느낌의 공동체이다.

89. 주일식탁 공동체는 세대간의 사귐을 목표로 한다. 그 구성원들은 서로를 아들, 딸, 엄마, 아빠 등으로 호칭하며, 그 호칭에 걸맞게 섬기고 돌보면서, 혈연과 세대의 벽을 넘어서는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며 구현한다.

90. 전 교인이 참여하는 행사는 주일식탁 공동체를 단위로 조직된다. 따라서 교회단위의 행사는 대가족의 행사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6.4. 공동육아 공동체 - 자녀양육모임

91. 공동육아 공동체인 자녀양육모임은 부모들로 구성되어 있다. 혈연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고, 혈연 외의 자녀들을 친 자녀 같이 사랑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92. 그 안에서 부모들은 혈연을 넘어서는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고 구현함으로써, 영적인 관계의 사랑을 경험한다.

93. 자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이루는 새 가족을 경험하며 자란다.

6.5. 대안학습 공동체 - 대기명당

94. 학생들의 자율 공동체인 대안학습공동체는 자아를 형성하는 사춘기를 함께 보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느낌인가를 경험한다.

95. 그들은 자신의 일상과 경제적인 문제들을 함께 협의하고 나누며, 함께 놀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쉬고, 갈등하고 화해하며, 서로 양보하고, 서로 도우면서, 몸으로 사랑을 익히며 성장한다.

96. 대안학습공동체의 부모들은 자녀들의 인격적인 성장에만 집중함으로써, 한 인간으로서의 자녀들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97. 대안학습공동체의 학생들은 부모들에게 자신이 하나의 인격으로 사랑 받는 경험을 통해서 개성 있게 성장한다.

98. 부모들은 자녀들의 개성 있는 성장을 보면서 기쁨을 누린다.

99. 학생들이 스스로 정한 공동체의 이름은 ‘대기명당’인데, ‘통 크게, 밝게, 당당하게’ 의 줄임말이다.

6.6. 다양한 공동체들

100. 교인들이 살면서 느끼는 필요에 따라 다양한 공동체들이 형성되고, 필요에 따라 해체된다. 창업지원 모임, 대입지원 모임 등이 가장 최근에 해체된 모임이고, 다이어트 모임과 초등학생의 인격적 성장을 지원하는 모임은 현재 활동 중이다. 

101. 이 주보를 발행하는 편집부를 비롯하여 교회를 지원하는 상비부서 모임도 있음은 물론이다.

102. 다양한 공동체들은 참여하는 사람들이 각각 사랑을 구현함으로써 기능하며,  공동체들 각각의 목표 역시 사랑을 구현하는  있다.

6.7. 생활공동체

103. 생활공동체는 경제적인 수입을 함께 모아서, 필요한 만큼 나누어 쓰는 소비공동체이다.

104. 성경은 경제와 관련된 공동체에 관하여 필요한 만큼 나누는 소비 공동체를 다룬다. 뜻밖에도 공동생산, 공동거주는 다루지 않는다. 

105. 교회 밖의 많은 공동체들이 사랑하는 것 외에도 많은 항목의 일치를 요구하는 것은 생산, 거주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다양성과 자유’보다 ‘통일성과 평등’이 중요한 가치로 대두되고, 개인과 공동체는 대립적으로 작동된다. (개인과 공동체의 대립의 조절을 담당하는 것이 가치, 정의, 이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에 무게 중심을두고 권력을 창출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게토화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106. 생활공동체는 예가교회에서 우선순위가 가장 하위인 공동체이다. 믿음에 있어서는 가장 초보적인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107. 생활공동체를 통해서 사랑하는 일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108. 다른 공동체들을 통해서 구현되는 사랑의 결과로서 생활공동체가 생성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7 장. 예가교회는 어떻게 짜여졌나

109. 가장 작은 단위공동체인 가족모임과 가장 큰 예배공동체를 제외하고는, 모든 공동체들이 구성원들의 생활에서 필요한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또 해체되어 왔다. 

110. 예가교회의 공동체들의 다양성은 일하고, 밥 먹고, 쉬고, 놀고, 수다 떨고, 아이 키우며 살아가는 일상의 다양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상의 다양성은 공동체들 속에 녹아 들어 사랑으로 재생산된다.

111. 공동체들의 다양성을 통해서 개인들의 다양성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교회 밖의 삶보다 훨씬 더 큰 자유를 누리며, 사랑의 일치가 높아질수록, 더욱 그러하다.

112. 예가교회는 다양한 공동체들이 사랑의 일치를 통해서 씨줄 날줄로 단단하게 직조된 천과 같다.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귈 수 있도록 촘촘하게 짜여져서, 사랑하는 기쁜 삶을 구현한다. 

 

8 장. 교회는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다

113. 교회는 다양한 사랑하는 사람들로 직조된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114. 교회는 다양한 사랑의 공동체들로 직조된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115. 교회는 이 세상 안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전적으로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이다. 

116. 교회는 사랑함으로써 기쁨을 누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존재들의 공동체이다.

117. 교회는 사랑함으로써 그 성원들의 자유를 기뻐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공동체이다.

118. 교회는 사랑함으로써 '너'를 자유케하는 공동체이다. 인간을 전적으로(wholly & totally) 참되게(truly & thoroughly) 자유케하는 유일한 공동체이다. "너희는 진리를 알게될 것이며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것이다."( 8:32) 사랑의 공동체를 기반으로 선포된 것이다.

119. 교회는 사랑함으로써 수 많은 '나'들이 하나가 되는 공동체이다. 하나로 뭉쳐도 지배권력이 되지 않는 유일한 공동체이다.

120. 교회가 누리는 그 (개인적인 차원에서) 깊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넓고, (신적인 차원에서) 높은 사랑의 기쁨은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