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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조선왕조실록 15

by 명화 posted Mar 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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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경종,영조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 거대한 그늘을 남긴 경종4

경종은 3살 때 세자로 책봉되고 33년동안 실수하지 않으려고 살다가 결국 왕이 되었다. 경종이 왕이 되는 것을도운 것은 소론이여서 노론의 힘이 컸다. 경종은 매사에 무기력 했고 세자 대처럼 말도 더듬거렸다. 노론은 애초에 왕을 폐하는 것아였는데 경종은 그뜻을 알고 노론 대신들을 없애고 월례 있었던 소론대신들을 등용하였다. 경종과 형재인 영조는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영조를 페세하지 않았더. 그러다 그 후에도 경종은 영조를 경계했다. 그러다가 경종 3년에 아프다가 재위한지 4년만에 죽었다.

2장 신원에서 탕평으로

영조가 왕이 되자 소론과 노론이 싸우자 영조는 탕평을 했다. 그러자 소론인 이유익과 심유현 이사성등이 반란을 을으켰다. 영조 4년에 충청도에서 이인좌가 먼저 거병을 하면서 청주성을 점령했다. 그자 소론인 오명항이 토벌을 한다. 그리고 나서도 각 지역의 책임자들 간에 연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반군의 거사일이 모두 달랐다. 그러자 난은 빨리 진압이 되었다.

3장 탕평에서 신원으로

영조는 계속해서 탕평을 노력했지만 민심은 영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괘서 사건이 생기고 역모 사건도 계속 되었다. 영조 4년에 효장세자가 갑자기 죽었는데 그다음 화순옹주가 하혈하는 일도 있었다. 이모든 일은 순정이라는 여자가 한일이라는 것이 영조 6년에 드러난다. 그리고 그다음에도 어린 내시가 대궐을 불지르려고 한 일도 일어났다.

4장 영조 52

영조는 옛날에 성종처럼 유학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책도 많이 봤고 책도 많이 썻다, 그리고 영조는 각종 제사도 많이 참여했고 다른 왕들의 능을 보수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는 입이 거칠어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수 있었다. 그리고 가혹한 형벌을 완화 시키는 데에도 관심을 가져서 압슬형과 낙형 자자형을 없앴다. 그리고 영조는 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는데 그를 막는 사람들을 유배보내기도 했다

5장 사도세자의 비극

영조는 마흔둘에 사도세자를 얻었는데 어려서부터 몸집이 컸고 총명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공부보다는 무예를 더 좋아했고 그나마 공부도 경전보다는 잡학쪽에 더 관심을 보였다. 영조가 사도세자한태 질책을 많이하자 사도세자는 병을 얻었다. 사도세자는 병을 핑계로 여러 가지 공부를 하지 않았다. 점차 영조는 사도세자를 멀리하고 그의 아들인 세손을 더 좋아했다. 세손은 사도세자와 달리 공부를 싫어하지도 않았고 질문을 하면 깝짝 놀랄 만한 답을 내놓았다. 사도세자에 대한 유언비어가 많아지자 영조는 사도세자한태 자결을 할 것을 명했으나 승강이 끝에 뒤주에 가두었다. 그후 사도세자는 8일후에 뒤주 안에서 죽었다.

느낀점:책이 약간 어려워서 조금 엉성하게 쓴겄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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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심득

by 명화 posted Mar 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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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심득

지은이:위단

출판사:에버리치 홀딩스

내용:1장 천지인의 길

논어를 너무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세상의 진리는 언제나 소박한 데 있다. 논어의 핵심은 어덯게 하면 마음의 행복을 꾸준히 영위해 나갈수 있을까 하는 것뿐이다. 논어는 2500여 년 전 공자와 제자들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제자들이 단편적으로 기혹해온 어록이다, 공자는 성인이라고 하는데 성인은 휼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솔선수범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공자같은 성인은 우리에게 신념을 준다. 사람의 존재 가치는 하늘과 땅과 같으므로 천지인을 아울러 삼재라고 부른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란 공경하고 중시할 가치가 있으며 또한 스스로 준중해야 한다고 여겼다. 서양과 달리 중국 철학에서 숭상하는 것은 장엄함과 이성 그리고 운유하고 돈후한 아름다움이다. 논어에 나타난 공자상은 바로 심미적 이상의 화신이다. 공자의 이 이미지 안에는 그의 마음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힘이 응축되어 있다. 훗날 공자의 사상을 계승한 맹자는 이 힘을 호연지기라고 불렀다.

2장 마음의 길

공자에게는 수제자 72명을 포함하여 무려3천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들 역시 갖가지 힘든 일로 고민에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그들은 인생의 난관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죽고 사는 것과 부귀영화는 모두 운명에 달려 있다. 사람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인정하고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진실 되고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여 자기 언행의 잘못을 줄이며 남들을 존중하고 겸손한 태도로 대한다면 오히려 자기 수양을 쌓을 수 있다. 사람은 먼저 자신의 운명을 정확히 인식하고 가능한 빨리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이를 마음속에 계속 담아 둔 채 원망을 늘어놓는다면 고통을 더 가중시킬 뿐이다.

3장 처세의 길

논어는 우리에게 다양한 처세 방법과 행동 규범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이런 원칙들은 얼핏 너무 단순해 보여 임시변통의 방법이 아닐까 의심이 들 때도 있다. 논어에서 일러 주는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틀이 되는 일처리 원칙과 함께 그 안에서 약간씩 차이가 나는 행동 요령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공자는 지나침과 모자람은 적극적으로 피해야 한다고 했다. 공자는 인애를 제창했지만 원칙을 잃은 인애의 마음으로 모든 잘못에 대해 관대한 것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공자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절대 월권행위를 하거나 주제넘게 나서서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특히 강조되는 직업의식이다. 위의 공자의 말 속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 직위에 있으면 그 직무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먼저 자기가 맡은 일을 오나벽하게 해 내야지 남의 일에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일의 원칙을 세워야 한다.

4장 군자의 길

군자는 공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격의 기준이다. 200만여 자밖에 되지 않는 논어에 군자라는 단어는 100번이 넘게 나온다. 공자가 군자를 정의한 모든 언어 범주 묘사를 중합해 보면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군자의 조건은 바로 선량한 마음이다. 군자의 힘은 인격과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이 완전무결하고 넉넉하며 먼저 자기 수양을 이룬 뒤라야 여유로운 풍모를 지닐 수 있다. 공자는 매우 겸손하게 자신은 근심이 없고 미혹됨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진 사람은 근심이 없다란 넒은 도량을 가진 사람은 마음이 비할 데 없이 인자하고 너그러워 작은 이해득실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누릴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됨이 없다란 무엇을 버릴지 명확히 알고 있다면 고민도 없어진다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란 마음속에 넉넉한 용기와 도량을 가지고 과감하게 전진한다면 저절로 두려운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진정한 군자는 인자함 지혜로움 용기로 건정 의혹 두려움을 해결한다.

5장 교우의 길

공자는 사람의 성장 과정에서 친구의 역할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유익한 친구를 사귀어야지 해로운 친구를 사귀지 말라고 가르쳤다. 첫째 정직한 친구를 사귀어라 이런 친구는 진실하고 솔직하며 성품이 강직해 아부를 모른다. 또 성격이 밝고 남에게 잘 보이려고 절 때 꾸미지 않는다. 이런 친구는 당신의 인격 형성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둘째 성실한 친구를 사귀어라 이런 친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친구와 사귀게 되면 마음의 안정을 얻으며 정신이 깨끗이 정화되고 한층더 성숙해짐을 느낀다. 셋째 견문이 넓은 친구를 사귀어라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바로 견문이 넓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다. 이런 친구가 읽은 책과 간접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만들었다.

느낀점:내가 썻지만 무슨 소리를 쓴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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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3.10 09:54
    ㅋㅋㅋㅋㅋ~~~ 잼나는데~~~
    우리 나이는 차이가 나지만 좋은 친구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 표현하며 살아있는듯이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는
    감히 교회안에서는
    친구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친구가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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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열매 2014.03.11 15:19
    정우야 멋지다. 논어심득도 읽구.....^^ 울정우 보고 싶다.

정우

배낭여행 기행문 2/20이부터 2/24까지

by 명화 posted Feb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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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0일
오늘은 아침에 다같이 아야 샌터로 가기로 했는데 재현이가 다른방에서 자고 있어서 약간 늦었다. 아야샌터에  짐을 맏기고 인터냇 카페로 가서 우리가 쓴 기행문을 올렸는데 한글 자판이 아니여서 힘들었다. 기행문을 다썻는데 2번정도 날라가서 힘들었다. 나는 기행문을 다쓰고 노래를 다운받았다.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들은 마사지를 받을때 나는 카페에서 쉬고 있었다. 카페에서 쉰 다음에는 저녁을 먹었는데 치앙콩으로가는 배이 6시에 출발하는데 음식이 늦게 나와서 힘들었다. 그리고 동우가 반대방향으로 뛰어가서 찾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2월21일
새벽에 치앙콩에 도착해서 숙소에 들어가서 일단 잣다. 자고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봤는데 모든것이 더빙이여서 힘들었다. 아침을 먹고 강가에 가서 놀았다.놀다가 툭툭이가 와서 라오스 국경까지 대려다 주었다.거기에서 비행기에서 쓴 종이를 한번더 썼다. 힘든 것이여서 매우 짜증이 낫다. 하오스에 들어온 다음에는 회이싸이에서 14시간 짜리 밴을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갔다. 매우 힘들었다.
2월22일
밴을 타고 비앤티앤으로 왔는데 새벽에 와서 숙소가 열릴때까지 기다렷다. 그러는 동안 수도승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다. 숙소가 문을 열기 전까지 우리는 마을을 구경하고 있다가 카페에서 쉬었는데 거기에서 재미있는 게임을 했다. 숙소에서 쉰다음에 꽝시폭포를 갔는데 매우 재미 있었다. 그런데 툭툭이 운전사가 갑자기 돈을 더 달라고 해서 좋지가 않았다. 폭포를 간 다음에는 야시장을 갔는데 거기에서 친구한태 줄 염주와 해골 팔지를 샀다.
2월23일
아침에 일어나서 간식을 산다음에 방비앵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산길로 갔는데 경치가 좋아서 지루하지 않았다. 방비앵으로 왔는데 숙소가 거리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그래서 자전거를 빌렸다. 나는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해서 재미 있었다. 그리고 마사지를 받았는데 나는 마사지가 싫어서 그동안 자전거를 타고 동내를 돌아 다녔다. 저녁은 서양식당으로 갔는데 맛이 있었다. 그리고 숙소로 와서 2시까지 포커를 했다.
2월24일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조식을 먹고 불루 라군으로 갔다. 거기는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미 있었다. 나는 7미터 정도에서 2번 떨어졌는데 무서웠다. 나는 점심도 않먹고 계속해서 놀았다. 불루라군을 갔다온 다음에는 저녁을 먹을 때까지 쉬는 시간이였는데 나는 그시간 동안 계속 카드쌋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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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2014.02.24 22:05
    조영희 목사님 서기록은 여행 갔다온 다음에 올리갰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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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실 2014.02.25 21:10
    정우가 너무너무너무 재미있었다는 불루 라군에 이모도 가 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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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2014.02.26 00:21
    재미있게 놀았다니 너무 너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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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27 17:38
    명화 정우야~~~ 너도 기행문이 2번이나 날라가다니~~~ 정말 아쉬웠겠다.
    나도 블루라군에 대해서 이야기 듣고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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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 2014.02.28 00:20
    블루라군이 타잔놀이 할 수 있는 곳??!! 재밌어 보였어..
    나도 가보고 싶다.. 가자, 치타~! 아~~~~ ^o^

정우

배낭여행 기행문 2/16 에서 2/19

by 명화 posted Feb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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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6일 

오늘은 방콕으로 여행을 갔다. 그런데 출발하기전에 머리띠가 없어져 가지고 머리를 묵지 못했다. 비행기를 탔는데 기내식이 맛이 있었다. 경유를 해서 중국을 들렸다 갔는데 중국 공항도 좋아서 구경을 하고 왓다. 비행기를 한번더 타고 방콕공항으로 왔는데 너무 습했다. 그리고 택시중도 길어서 좀 힘들었다. 숙소로 왔는데 나와 선우가 제일 좋은 방을 썼다. 저녁을 먹으로 갔는데 거기서 사람들이 고추와 바나나 껍질을 멱여서 토를 했다. 오면서 음료수와 과자를 사갔는데 싸서 좋았다. 숙소로 와서는 사람들과 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2월17일

오늘은 아침을 먹으로 엄청나게 걸었다. 그런데 거기는 엄청 시끄러워서 좋지는 않았다. 밥을 머꼬 지하철을 탓는데 에스칼레이터기 엄청 빨랏다. 지하털을 타고 77번 버스를 타고 치앙마이로 가는 버스를 예매했다. 버스도 시골 느낌이 나서 좋았다. 버스예약을 한다음에는 시암스퀘어에가서 구경을 했다. 구경을 하고나서 스타벅스로 모이기로 했는데 스타벅스가 3게나 있어서  모이기가 힘들었다. 구경을 하고 숙소로 가서 진표형은 머리를 깎으로 갔는데 그 사이에 외국인이 와서 우리들의 글씨를 모아갔다. 그리고 버스를 탔는데 영화가 나와서 보고 잤다

2월18일

버스에서 깬 다음 숙소찾으로 갔는데 계획에는 도보로 10분이였는데 엄청멀리 있었다. 숙소는 엄청좋아보였다. 그런데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아서 짐을 두고 아침을 먹엇다. 치앙마이에는 개가 엄청 많이 잇었다. 나는 개를 무서워해서 듬직한 정인이 옆에 있었다. 아침을 먹고 체크인시간이 될동안 수영장에서 놀았다. 숙소에 들어와 보니까 저번 숙소보다 좋았다. 빨래를 맏기고 현지 음식을 먹었다. 음식을 먹고 쉬다가 마사지를 받았다. 근데 나는 좋지가 않았다. 마사지를 받고 저녁을 먹었다 . 당구대가 있어서 포캣볼을 치고 놀았다. 

2월19일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텔레비전을 보고 놓았다. 놀다가 진표형이 와서 같이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고 쉬다가 빠이로 가는 밴이 와서 밴을 타고 빠이로 갔다. 근데 그 밴은 엄청 더웠고 산길로 가서 멀미를 했다. 중간에 쉴때먹은 볶음밥은 엄청 맛있었다. 빠이로 와서는 해가 질때까지 쉬다가 시장으로 갔다. 시장에서 나는 가방을 삿다. 거기에서 간식을 엄청많이 먹어서 배가 불렀다. 저녁은 샤브샤브 비슷한 것을 먹었는데 어덯게 먹는지 몰라서 이상하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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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4.02.23 01:54
    그래도 우리 명화가 자주자주 글 올려줘서 잼 나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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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 2014.02.28 00:13
    글자 크기가 크구나..ㅋㅋ
    고추와 바나나 껍질.. 음... 웩할만 할 듯..^^

정우

마인크래프트로 교회짓기

by 명화 posted Feb 1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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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끝나고나서 1주일동안 쉬는데 심심해서 만든것 입니다.

계획없이 만들어서 좀 부족한 부분도 있습니다.

교회(4층).png교회(목사님방).png교회(주차장).png교회.png교회(예배당).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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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르는돌 2014.02.14 23:40
    머쪄 부러... 정우야 좀더 크게 만들어서 섬세한 느낌이 나게 하면 ...힘들겠니?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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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인 2014.02.15 12:16
    구름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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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 2014.02.15 17:09
    와~~ 대단하다.. ^o^ 멋지다. 정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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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열매 2014.02.18 19:08
    우와 겁나게 멋지당~~~ 정우한테 이렇게 멋진 능력이 정우야 내 집도 만들어 주면 안되것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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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림 2014.02.19 12:48
    오우 정우야! 멋지다 마인크래프트가 아닌 니가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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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27 17:44
    명화 정우야~!!! 멋진걸~^*^
    이런 재주가 있다니~~~
    새로운 건축사 명화 짱~!

정우

조선왕조실록13

by 명화 posted Feb 06,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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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효종 현종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산당의집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는 과정을 보았으나 그 둘의 생각은 달랐다. 소현새자는 청나라의 문물을 받들어야 된다는 생각이였고 봉림대군은 반청을 주도 했다. 청나라를 싫어한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이고 반청의식이 투철한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워서 봉림대군은 효종이 되었다. 그는 용맹스럽고 검소했고 갑자기 세자가 된 만큼 술을 끊고 겸소해 졌다. 효종은 즉위한 다음날 바로 김집과 송시열등 유명한 선비들을 불렸다. 그당시 선비들은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는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그런데 이런 유명인사들이 한꺼번에 벼슬을 하게 되니 그 당시 영향이 있던 김자점은 위험을 느꼇다. 사람들이 김자점을 파직하자는 소리가 높자 김자점은 아들과 같이 번역을 하려 들다가 걸려서 유배를 당한다. 그러다가 또다시 사건에 휘말려서 아들과 같이 죽고 만다.

2장 북별의 길?

효종은 왕이 되고 나서도 반청 정신이 투철 했는데 그는 국방력을 강화 하고 나선 정벌등으로 북벌을 준비했다. 효종은 아성보다는 현실을 더 가깝게 했다. 효종8년에도 의복에 대해서 말한 적도 있었다. 효종은 군사부문에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군대의 규모를 늘리고 이완을 어영대장,훈현대장으로 삼아서 정예화시키기도 했다. 효종5년에는 청나라가 같이 러시아를 정별하자고 하자 효종은 조총수 100명을 포함해서 150명을 파병했다. 4년뒤에 청나라가 또 파병을 요청하자 이변에는 조총수 200명을 포함해서 265명을 파병하고 큰 승리를 거두 었다.

3장 효종과산당

효종이 즉위하고 나서 송시열이나 송준길이 조정에서 일을 했던 기간은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효종의 스승이기도 한 송시열을 올라오자 마자 사직을 할 것을 원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송시열은 사모와 관복을 벗고 조정을 나갔다. 그러다가 효종이 벼슬을 내리며 올라올 것을 명했으나 송시열을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효종 9년에 다시 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효종과 뜻이 같지 않았던 송시열은 10계월만에 다시 내려 갔다.

4장 기해예송

효종 10년에 효종의 머리에 종기가 생겼다. 이때 왕세자도 병이 있었는데 왕은 자신의 병보다 세자의 병을 걱정하엿다. 그러다가 종기의 독이 얼굴로 퍼져서 눈을 뜰수도 없게 되자 어의인 신가귀가 머리에 침을 놓자 피가 쏟아지면서 정신이 들었지만 피가 멈추지 않아서 효종은 죽고 만다. 효종이 죽자 효종의 앋르인 현종이 임금이 된다. 이때 효종보다 다섯 살 어린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어던 상복을 입는가에 대해서 엄청난 논쟁이 일어난다.

5장 왕권회복의 길

현종은 효종에 비해 많이 허약 했다. 눈병이 심했고 부스럼도 계속 났다. 현종은 곤장의 크기와 현태를 바꾸어서 가혹함을 완화시켰고 권세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땅을 찾아서 백성들한태 나누어 주었다. 현종도 효종과 비슷하게 군사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때 군대의 규모를 키우고 군사훈련에 관심을 가졌다.

6장 위기의 산당

현종 15년에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가 죽었다. 예조는 대왕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입을 상복으로 기년복을 정해놨는데 이겄 때문에 한번더 산당 중심과 임금사이의 논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현종은 현종 15년에 갑자기 몸이 않좋아 지더니 죽고 만다.

느낀점:재미 있었고 이번 요약은 어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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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4.02.09 01:00
    정우가 독후감을 열심히 써서 고마운데, 사진이 없네.... 그리고 조선왕조 실록은 1~20까지 블로그에 모두 올려줘. 없는 것들이 엄청 많은데?

정우

조선왕조실록7

by 명화 posted Jan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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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 대간권력vs연산

왕은 자신의 경험이나 군주가 되기 전의 경험은 새 임금의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린시절 빠각한 군주수업을 경험했던 성종은 여덟살에 들어가는 성균관은 연산은 열두 살에 들어가게 하고 여름에는 조강만 하게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성종의 군주수어 시절에 모범적인 모습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태도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종 같은 모범생도 아니었다.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칭찬을 받을 만한 행적도 별로 없었다. 다만 얼굴에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이 걸리는등 잔병치레도 잦았다. 연산이 즉위하고 얼마 뒤 성종의 묘지문을 읽고 자신의 친 어머니의 존재와 죽음을 알게 되었고 밥을 먹지 않았다. 성종이 죽자 대간들은 연산군을 길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과감없는 행동을 보고 대간들은 성종과는 전혀 다른 군주임을 확인했다. 그러자 대간들은 연산 즉위 후 4년까지 매번 사안이 있을 때마다 사직을 하고 다시 복직을 하는등 연산군을 길들이려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2장 무오사화와 왕권의 회복

성종시절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주연급의 유자광은 김종직을 따르는 대간들의 상소로 소인으로 불리며 귀양을 당햇다. 유자광은 김종직을 무척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전에 함양땅에서 갔다가 시를 짓고는 판자에 새겨 학사루에 걸어두었는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왔을 때 헌판을 떼어서 불살라 버렸다. 그러던중 실록청 당상인 이극돈은 사초를 살피다가 자신에 대한 민망한 기록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후배인 김일손한태 수정을 요구했으나 김일손을 거부했고 그러자 이극돈은 김일손이 쓴 세조를 모욕하는 글을 찾아서 유자광과 같이 연산군한태 말하였다. 이일로 김일손이 체포되었고 유자광이 국문을 계속했다. 이일의 연루자들이 많아졌고 국문을 책임지던 유자광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중대한 기록을 발견한다. 그것은 조의제문이라는 글로 김종직이 쓴 글인데 유자광이 연산군한태 이것은 불신의 뜻으로 생각하여서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했고 김일손을 격려하거나 정보를 준 이목과 허반을 참수당했다. 이 일로 유자광은 힘을 얻었다

3장 평온속의 불안

성종과 연산군은 취향이 많이 닮았다. 둘다 시를 좋아했고 그림애호가였고 사냥을 좋아했다. 그러나 모범생 콤플랙스가 있는 성종은 대간들의 말을 들어서 시를 쓰지 못하고 심하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연산군은 시를 지어올리게도 하고 지어 내리기도 했다. 송정은 좋아하는 매를 기르는 것까지 대간들의 눈치를 봐야 했지만 연산은 매에다가 사냥개까지 마음것 길렀다. 그리고 연산군은 자신이 하는 일을 밖으로 알리지 않게 할려고 궁궐 주변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고 궁궐을 보는 것을 금지했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연산은 1504320일저녁에 성종의 후궁은 엄숙의와 정소용을 몽둥이질 했고 그들의 아들들을 대려와서 몽둥이질을 하게 했다. 그녀들을 계속 그렇게 맞다가 죽었다. 그리고 연산은 장검을 들고서 자신의 계모인 정현왕후의 침소로 가서 정현왕후를 부루다가 중전인 신씨가 말려서 가고 말았다. 그리고 대왕대비전으로 가서 왜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냐고 따지자 한 달뒤에 죽었다. 이것이 갑자사화의 시작이였다. 연산은 어느날 임사홍의 집으로 가서 임사홍한태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이유를 듣는다. 엄숙의와 정소용을 때려 죽인다음날 연산은 곧바로 폐의 추숭을 다시 제기한다. 대간들의 다수는 반대의견을 냈지만 신하들과 의논후 시호는 제헌왕후, 능호는 회릉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세좌와 윤필상등 많은 대신들을 죽였다. 이런 일로 감옥이 모자라서 잡아온 사람들을 바깥에 두었고 날마다 새로운 얼굴이 장대에 걸렸다.

5장 무너진 절대군주

연산은 유교삭 견제장치를 제거해 나갔다.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사간원을 폐지하고 사헝부도 축소하였고 홍문관도 폐지했다. 성균관과 사학의 활동을 정지시켰고 과거도 경전 대신에 울시로 대체했다. 이런일이 계속되자 박원종과 성희안과 신윤무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신수근과 형제들이 죽었고 임시홍도 죽였다. 점점 이 반란의 가담한 사람들은 많아졋고 결국에는 연산군을 패위시켰다.

느낀점: 독서시간에 좀 자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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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03 11:14
    명화야~^*^ 대기명당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왕을 넘어서는 수업을 받고 있는 너가 정말 대단하고 위대하게 보인다~!!! 암기하면서 너의 삶의 새로운 장이 열릴거야~! 앞으로 암기의 왕으로 성장하는 너의 모습이 그려지는걸~!!! 짱이다~^*^

정우

조선왕조실록6

by 명화 posted Jan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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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예종,성종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 짧았던 예종의 치세

예종이 즉위했을때에는 구공신들과 신공신들이 있었는데 구공신은 전부터 있었던 공신들이고 신공신들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사람들 이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구성군인 이준과 남이등이 있다. 이 두새력들은 갈등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남이를 좋게 보지 않았는데 구공신들의 힘으로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좌천시켰다. 그러나 유차광의 모함으로 남이는 죽고만다. 그리고 나서는 예종은 강력한 왕권을 만들려고 했지만 족질이 악화되어서 제위한지 14개월만에 죽고 만다. 예종이 죽는 바로 그날 대왕대비의 뜻으로 3순위자인 자을산군이 성종이 되었다.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한다. 어린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전에 반란으로 세조를 왕으로 만든 훈구대신들을 구성군을 주시했다. 구성군의 상황이 세조때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성군은 왕권의 욕심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모함으로 강원도로 유배당한다. 성종은 더 좋은 임금으로 성장할려고 하루에 세 번이가 경연을 했다. 시간이 지나서 권력이 있는 훈구대신들은 거의다 죽고 성종은 20살이 되었다. 그러자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성종의 목표는 조선을 완벽한 유교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였다. 그레서 뷸교를 탄압하기도 했다. 그리고 새조때부터 한 경국대전을 완성시킨다. 성종 세종처럼 부지런하고 온화하며 법과 제도와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였으나 세종처럼 다 잘하지는 못하였다. 성종은 무보다 문을 좀더 중히 여겼으며 그래서 군대가 약해졌으며 왜구의 약탈도 많아졌다. 장수들은 거의다 무능했다. 성종의 후궁인 윤씨는 가난한 집 선비인 윤기견의 딸로 윤기견이 일찍 죽어서 환경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던중 대비들의 눈에 띄어서 후궁이 되고 연산군을 낳았다. 그러나 국모가 된뒤 대비들한태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여자들을 모함하려 하는 사건이 있는등 일이 많아져서 폐비되었고 그러다가 사약을 받아서 죽는다. 성종은 어린때부터 훌륭한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서 대간들의 비판을 무조건 받아들이다가 대간들의 대한 불만이 쌓여가자 대간들의 말을 않듣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성종은 천식이 있엇다가 배꼽 밑에 종기가 생겼는데 그 종기가 점점 악화되다가 1494년 죽는다.

느낀점: 이번 요약은 좀 많이 잘못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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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조선왕조실록4

by 명화 posted Jan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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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와조실록[단종,세조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단종은 조선의 6대임금으로 열두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아직 왕이 어리자 실질적인 권력은 의정부가 가지고 있었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종은 금세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은 책들을 많이 읽고 풍수도 전문가 수준이였고 음악에도 능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진짜 자랑은 무인적 자질이였다. 힘이 쎄서 강궁을 두루었고 활솜씨도 좋았다. 그러나 둘째라는 이유로 왕이 되지 못했다.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은 수양과는 달리 시와 그림에 능했고 당시의 명필이였다. 자존심도 수양처럼 강해서 둘 사이에는 형재에보다는 경쟁의식이 컸다. 자연스럽게 이 둘한태는 사람들이 붙었고 친 수양파과 친 안평파가 생겻다. 그리고 그 합법적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한 대신들이 있었는데 대군들의 힘이 켜져 가자 그들은 수양보다는 덜 위험한 안평의 손을 잡았다. 그러던중 수양대군한태 한명희라는 권력욕이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한명희는 사람들을 모았고 수양의 힘은 더더욱 커져 갔다, 수양대군은 다른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단종한태 국혼을 주장하고 명나라로 사행길을 가는등 역모를 할 마음이 없는 것 쳐럼 만들었다. 그러던중 단종 1년인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정승인 심종서와 아들인 김승규를 죽이고 한명희가 만든 살생부를 따라서 많은 대신들을 죽이고 안평대군과 그의 다들을 강화도로 유배하였다가 죽인다. 숙부인 수양대군이 많은 대신들을 죽이자 단종은 왕위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조심스럽게 행보를 넓혀나갔다. 조회 참석하고 윤대를 시작했고 경연도 열심히 참석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이키고 며칠후 단종한태 국혼을 주장했다. 단종은 반대했으나 강제로 부인을 맞게 하였다. 단종이 스스로 왕위를 넘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수양대군은 단종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유배보내거나 죽였다. 더 이상 있으면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을 알고 단종은 수양대군한태 왕위를 넘긴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은 1455년 세조가 된다. 단종이 폐왕이 되어도 세조는 가끔씩 문안을 오거나 사냥을 같이 갔다. 그러던중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등이 단종을 다시 왕위로 올릴려고 하였다. 이들은1457년 거사를 할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다음날 거사에 동참하기로한 김질의 고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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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2014.01.21 10:54
    반정도가 날아가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빠른시일내 복귀하갰습니다

정우

조선왕조실록3

by 명화 posted Jan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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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

지은이:벅사뱍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태종인 이방원은 결국 왕이 되었다. 그렇지만 태종에게는 정통성이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태종이 왕이 되면서 태조를 몰아내고 형제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에 태종은 태조한태 용서를 구해야 했지만 어떠한 짓을 해도 채조는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태종은 더욱더 태조한태 미움을 살 짓을 한다. 그것은 바로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기는 것인데 그 일로 인해서 태종은 더더욱 마음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민심이 태종한태 않좋은 쪽으로 쏠리자 태조는 자신감이 생겼다. 태조는 금강산이나 오대산등 개경으로 내려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태조는 분노를 식히지 않았고 결국에는 1402년 금강산에서 최정예 부대인 별시위와 같이 동북면으로 가서 동북면 사람들과 같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태조는 이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반란이 실패하자 태조는 평양에서 있다가 태종의 부름으로 다시 개경으로 갔다. 그러다가 태조는 1408514일에 죽었다. 태조가 죽자 태종은 140510월에 다시 한양을 도읍으로 삼고 창덕궁을 지었다. 원경왕후인 민씨는 질투가 심해서 태종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면 다거 잔소리를 많이 해서 결국에는 태종이 즉우한지 한 달도 않되서 경영청으로 거처를 옮겻다. 원경왕후의 질투에서 상관없이 태종은 아홉 명의 후궁을 들였다. 1404년 태종은 아들인 이제는 열한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동된다. 그러나 세자는 부응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가 1406년 태종은 세자한태 왕위를 물려준다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에 다시 옥세를 세자궁으로 갖다 놓았다. 또다시 세자가 다시 옥세를 인정전에 갖다 놓는등 이런 일을 몆번이나 계속하다가 열흘만에 이일을 멈추었다. 태종은 세자을 결혼시킬려고 하고 있다가 김한로라는 태종의 과거 동기의 딸을 골랐다. 그러나 공부와 이현이라는 사람들이 명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하지는 이야기를 원경왕후의 아버지인 민제와 이야기를 했는데 이 이야기가 태종한태 보고 되면서 공부와 이현을 벌하고 사건은 끝났것 같았다. 그러나 태종은 이 사건에서 민제가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민제의 아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혐의를 씌어서 유배 시켰다. 그러다가 민무구와 민무질을 죽게 하였다. 태조는 사냥을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 때문에 대신들과의 논란이 많았다. 그 이유는 왕이 사냥 행차를 하면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사냥 지역이 결정되면 그 해당지역은 빨리 가을 걷이를 끝내야 했고 야산의 덤블이나 높은 풀들도 정리해야 했다. 왕을 호송하는 신하들과 갑사들고 수천 명에 달했고 사냥을 위한 몰이꾼은 오천명 정도 필요했다. 태종은 이러한 일 때문에 대신들을 벌하거나 유배도 많이 보냈지만 청년 유한자인 언관들을 좀처럼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유학자들은 세자인 양녕대군은 훌륭한 임금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요구했지만 세자는 공부 체질이 아니였다. 세자는 나이를 먹어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대신 활쏘기나 사냥을 즐겨했다. 그러다가 세자가 열일곱살이 됫을 때 잔치에서 봉지련이라는 여자를 만나자 태종은 봉지련을 가두어서 처반에 버릇을 고칠려고 했지만 세자는 금식투쟁을 해서 결국에는 봉지련을 풀어 주었다. 그 뒤에도 세자는 계속 공부를 게흘리 하고 장안에 있는 건달들을 궁 안으로 불러들여 어울렸다. 태종한태는 네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제는 양녕대군이고 둘째인 효령대군은 말수가 적고 웃음이 많았다. 나중에는 불교로 귀의 했다. 넷째인 성녕은 단정한 용모와 총명하고 반듯해서 왕과 왕비의 귀여움을 얻엇다. 셋째인 충녕대군은 1397년 생으로 이름은 이도이고 양녕과 달리 영특했고 공부를 좋아했다. 태종은 이도의 재주를 아까워해서 하고싶어하는 것을 마음껏 하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이도는 양녕대군한태 도발적인 행동을 몇 번 했다. 그러다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이도를 세자로 올렸다가 세자가 된지 두달만인 1418810일에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되었다.

느낀점:이번에는 전편인 태조.정종실록보다는 재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 있었다. 다음편이 세종실록인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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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조선왕조실록2

by 명화 posted Jan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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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태조 정종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이성계는 왕이 되고 나서도 민심을 잡기 위해 나라이름을 바꾸지 않고 고려라고 계속하고 조심시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나서 왕족이였던 왕씨들을 거의 모두다 거제도와 강화도에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나라이름을 고쳤는데 조선이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남은 정몽주의 사람들을 죽일려고 했다. 그러나 태조는 용서해 주자고 했고 결국 곤장형으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곤장 100대를 맞은 사람이 살아있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정몽주 세력인 이숭인은 곤장이 허리를 쳐서 곤장을 맞다가 죽는다. 그렇게 하여서 죽은 사람은 8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난다음에는 태조는 개국 공신들을 선정하였다. 그런데 아무런 한일이 없는 사람들을 1등 공신으로 책봉을 한 일이 있었느데 이것은 태조가 조선은 자신의 편들만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엿다. 그런데 태조가 왕이 되는 것을 도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한태는 별다른 보상이 없었다. 태조는 부인이 두명이 있었는데 첮째 부인인 한씨는 이방원을 비롯해서 62녀를 낳았지만 태조가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두 번째 부인인 강씨인 신덕왕후는 21녀를 낳았다. 그녀는 왕비로 살았지만 욕심이 많아서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려고 했다. 신덕왕후는 태조를 설득해서 어린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었다. 그러던중 박위라는 사람이 점쟁이한태 왕씨들의 운세를 물어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사건은 박위가 왕조 교체를 할려는 사건으로 간주되어서 신하들을 왕씨들을 죽이라고 태조한태 권하였다. 태조는 투표를 통해서 사건을 해결할려고 했지만 왕씨들을 제거하자는 의견들이 너무 많아서 결국 왕씨들을 강화나루나 거제도 앞바다서 죽었다. 그리고 나서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죽였다. 이 사건으로 전국에는 왕씨들을 찾아서 죽이는 수색 작업이 시작되었고 살아남은 왕씨들은 성을 전씨나 옥씨로 바꾸어서 살아갔다. 왕씨들의 도읍인 개경이 싫어진 태조는 도읍을 옮기는 일을 시작하였다. 중간에 하륜이란 신하가 반대를 하여서 잠시 중단 되었다가 1394년에 다시 도읍을 옮기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서 새로운 도읍은 한양이 되었고 공사한지 1년만에 종묘와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경복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완공 축하연에서 즉석으로 낸 이름이다. 그러던중 명나라의 황제인 홍무제가 황제를 알현하로 간 신하를 거의 죽도록 맞은 일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조선 조정은 분노하였지만 홍무제는 다시 조선인 쳔여 명이 명나라 군사시설을 불태워서 조선의 왕자들이 와서 직접 해명하라는 억지 주장을 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인 방우는 술을 좋아하다가 개국한 이듬해에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태조는 생각한 끝에 이방원은 당나라로 보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방원은 명나라에 가서 국빈으로서의 최상의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1398524일에 홈무제가 죽었다. 홍무제가 죽기 전부터 요동을 칠려고 생각하고 있던 태조는 진법훈련을 강화하였고 왕자들이나 종친,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모든 사병들을 관군으로 편입시켜버리고 무기를 빼앗았다. 이 사건으로 이방원은 더욱더 불리한 입장이 되었다. 1398826일 이방원은 정도전이 반역을 할려고 했다는 것을 빌미로 사람들을 모아서 정도전을 죽이고 다른 정도전 편에 있엇던 사람들도 죽였다. 그리고 나서 방원의 형인 이방과를 세자로 새우자고 했다. 그리고 나서 방원은 패세자인 방석과 그의 형인 방번을 죽엿다. 이방원이 정종인 이방과를 왕으로 세운 이유는 자신이 왕이 되면 반란이지만 방과가 왕이 되면 적장자가 왕이 된다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종도 이런 이방원이 뜻을 알았는지 나라의 중대사는 방원과 대신들한태 맡기고 자신은 격구를 하면서 왕위를 이여갔다. 그러다가 넷째 아들인 이방간은 자신이 왕이 될려고 1400129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그러나 방간은 쉽게 잡혀서 유배를 당했다. 그리고 셋째인 이방의는 권력욕이 없어서 조용히 살았다. 이리하여 정종은 이방원을 세자로 삼고 왕이 된지 22개월만에 방원하태 왕위를 물려 주었다. 그리하여서 이방원은 조선의 3대왕인 태종이 된다.

느낀점: 이번에 한 요약은 너무 빨리 쓴겄 같다. 다음인 3권은 좀더 재대로 써야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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