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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조선왕조실록1권

by 명화 posted Jan 1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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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실록[01개국]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고려 후기인 1250년대 전라도 전주에 있는 스무 살 이안사는 자시 밑에 있던 사람들을 대리고 동쪽 끝인 오늘의 삼척시로 간다. 그 이유는 이안사는 한 관기를 사랑했는데 그 사실을 고을 수령이 알자 도망간 것이다. 그래서 삼척시에서 잘 살고 있던중 전주의 수령이 삼척시 신임 사또로 부임해 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려시대의 북쪽 끝인 동북면으로 간다. 당시 동북면은 여진족들이 들어와서 살았던 곳이라서 매우 위험한 지역 이였지만 이안사는 자신을 따라온 170여 가구와 같이 갔다. 동북면에 자리를 잡은 이안사는 오래있지 않아 천여 호의 수장이 되었다. 그 당시 그 일대에는 몽고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몽고 군대가 이안사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이안사는 싸우기 보다는 항복을 택했고 동북면에서 실력자로 성장했다. 그리고 100년이 흐르자 이안사의 증손이고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원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아들 이성계와 함께 개경으로 간다. 개경에서 공민왕을 만난 이자춘은 공민왕에게 임무를 받는데 그 임무는 고려가 원 나라가 뺐어간 동북면을 되찾기 위해서 고려군의 공격에 내응하는 것이였다. 이 임무는 성공하였고 이자춘과 이성계는 고려로 돌아가서 벼슬을 얻게 된다. 공민왕은 원 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고 나라를 부강하개 만들려고 했으나 홍건적이 쳐들어오고 여진과 원 나라 그리고 왜구들이 고려를 침범해 오자 자연스럽게 개혁을 포기한다. 1361년 이자춘이 갑자기 죽는다. 이자춘이 죽자 이성게는 가병 2000을 이끌고 홍건적에게 빼앗긴 개경을 되찾으러 가는 군사 20여 만에 합새한다. 병사수로는 100분의1이지만 가장 먼저 동대문을 돌파하고 홍건적의 수장을 비롯한 여러명의 장수를 죽였다. 홍건적을 물리치자 몇 달뒤 원 나라 장수였던 나하추가 고려에 쳐들어 왓다. 이성계는 이버에도 나가서 싸웠는데 나하추의 선발대를 유인해서 전멸하고 야영하는 본진을 기습공격하거나 이름난 장수를 죽이는등 전적을 올렸다. 이성계는 다른 전쟁애서도 출전을 하면 무조건 이기고 돌아오는 등 엄청난 활약을 했다. 공민왕은 즉위 이전부터 원의 지배를 물리치고 나라안으로는 구문세족을 제압하여 양인의 수를 늘려서 나라 국방을 튼튼히 할려고 했으나 전쟁을 계속되고 권문세족과 신하들의 반란이 이러나는등 매우 힘들어 하고 있었던 도중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고만다. 그후로 아무런 의욕이 없자 신돈이라는 스님에게 나랏일을 맏겻다. 신돈은 새로운 인물들을 관리로 등용했고 힘이 있는 대신들을 정리하고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백성들한태 돌려주는등 개혁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다가 1371년 신돈은 역모 사건에 휘말려서 죽고 말았다. 신돈이 죽으면서 공민왕도 매우 크게 변했다. 오랫동안 해왔던 고려 개혁을 그만두고 방탕하게 삶을 지낸다. 그러다가 자제위들한태 죽음을 당한다. 공민왕이 죽자 이안임이 정국 주도권을 가져간다. 공민왕을 뒤를 이여서 어린나이인 우왕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우왕이 아직 어려서 모든 주도권은 이인임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중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원 나라를 쫓아내고 명 나라를 새웠다. 그러던중 명나라가 고려가 원 나라와도 외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아인임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대신을 암살하였다. 그리고는 원 나라와 다시 외교를 할려고 하는데 공민왕을 따르던 대신들이 반대를 하자 그중 하나인 정도전을 원 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일을 시킨다. 정도전은 다른 사람들한태 그 원 나라 사신을 죽여버리자고 하자 그 사실이 이인임한태 들어가서 전라도로 유배를 보낸다. 유배를 간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만나서 손을 잡았다. 그 시절 왕권에서는 이인임과 그의 세력들의 전횡은 갈수록 심해저 갔다. 그러던중 우왕이 사춘기에 접어들자 탈선 행위를 한다. 이런 우왕의 탈선 행위에 이인임 세력들은 좋아했지만 최영만이 우왕을 막았다. 최영의 말이 점점 마음에 가자 우왕은 최영과 같이 이인임을 죽이자고 한다. 평소에 최영은 부정부패를 좋아하던 이인임을 싫어했지만 인간적으로 싫어한 것은 아니였다. 자신 혼자만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한 최영은 이성계와 같이 이인임일당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은 관비로 삼고 어린 아들들은 임진강에 던져버렸다. 이인임은 최영이 변호해 줌으로써 이인임과 그의 자식들은 살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권력의 외곽에만 있었던 이성계는 권력의 핵심부로 들어갈수 있게 되었다. 우왕은 최영도 자신을 배신할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에 최영의 여식과 결혼을해서 최영을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러던중 명나라의 홍무제가 공민왕 때 되찾은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이 자신의 땅이라면서 상의도 없이 가져갔다. 이에 분노한 최영은 요동을 치자고 우왕한태 말했으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말하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말거나 최영은 우왕을 설득해서 이성계와 이인임 계열의 보수파인 조민수와 같이 요동으로 갈려고 했으나 우왕의 반대로 최영은 요동으로 가지 않고 왕과 같이 있었다. 위화도에 온 요동 정벌군은 장마가 오자 회군을 한다는 글을 올렸지만 최영이 반대를 했다. 간신 최영을 죽인다는 이유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최영은 남아있는 군사로 싸웠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최영은 유배지인 고봉현에서 죽고만다. 자신의 편인 최영이 죽자 왕은 밤에 내시80여 명을 무장시켜서 이성계의 집을 급습했지만 실패하여서 강화로 유배된다. 월래는 이성계가 조민수한태 왕의 아들을 왕으로 새우면 않된다고 말했지만 욕심이 생긴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왕으로 세웠다. 조민수를 도와서 창왕을 왕으로 세운 이색은 이성계가 왕이 될려는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막을려고 한다. 그 방법은 정통성을 굳건히 할려고 창왕과 같이 홍무제를 알현하여 가는 것이였는데 창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재비가 완강하게 반대하자 이색은 이성계의 다섯쨰 아들인 이방원과 같이 홍무제를 만나로 간다. 그 사이 이성계편인 조준은 상소 하나로 조민수를 유배보낸다. 그후 최영의 친척인 김저와 정둑후라는 사람이 강화로 가서 우왕을 만나고 우왕이 믿고 있었던 곽충보와 같이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햇으나 곽충보의 배신으로 정득후는 자살하고 김저는 자백을 받다가 죽는다. 김저가 한 자백으로 창왕이 패위되고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다. 그후 이성계는 토지개혁을 실시해서 다시 백성들의 지지을 받는다. 이성계와 그의 측근들이 세력을 펼칠려고 할 때 정몽주가 이들을 막아서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의 걸림돌이 생겻다. 그러던중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서 다치는 사건이 있었다. 정몽주는 이때를 기회로 생각해서 이성계의 부하들인 조준 남은 등을 유배보냈다. 이 일로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은 이성계한태 정몽주을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이성계는 끝까지 반대한다. 그러나 이런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방원은 13924월에 개경에 있는 선죽교에서 죽는다. 정몽죽자 가지 편이 없어진 공민왕은 1392716일에 왕위에서 내려온다. 공민왕이 패위하자 다른 백관들을 이성계의 집으로 가서 이성계한태 옥세를 넘겼다. 그리고 다음날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느낀점: 내가 좋아하는 역사책 이여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독후감을 쓸 시간이 적어서 시간이 좀 오래 걸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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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한군사5

by 명화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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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한국사5

지은이:강은천

출판사:플빛

내용: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났다. 1945822일에는 소련군이 와서 북위38도에 선을 긋고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정했던 것처럼 북쪽은 소련이 신탁 통치를 하고 남쪽은 미국이 신탁 통치를 했다. 그러던 중 1946년부터 미국과 소련이 냉전 체재로 들어서자 1948510일에 남한만 총선거가 실시되고 815일에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대대통령은 이승만이 되었다. 북한도 19469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50625일 새벽에 북한군 21연대 병력이 38선을 넘어 오면서 6.25가 시작 되었다.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들어온 북한군 21연대는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인민군 절반과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정예 병력인 조선족 군대였다. 인민군들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까지 점령해서 국군은 그곳을 최후 방어선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때 유엔은 예상보다 빨리 반응을 했다. 전쟁이 일어난 그날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해서 북한의 침략을 비난하고 28선 밖으로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인민군의 진격이 계속되자 627일에는 남한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915일에는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애서 인민군을 막았다. 인천에 들어간 유엔군과 국군은 928일에 서울을 다시 되찾고 38선을 넘어서 10월에는 압록강까지 인민군을 밀어 붙였다. 그러자 이미 공산화 되어 있었던 중국은 불안해 지자 인민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을 도와 6.35전쟁에 투입되었다. 인민 지원군이 전쟁에 참여하자 195114일에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 미국은 다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해서 중국을 비난하고 즉각 철수를 요청하려고 했으나 소련이 반대를 해서 못하였다.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서 중국 공산당을 몰아내자고 주장했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판단해서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 자리에서 쫓아냈다. 맥아더를 쫓아내고 국군과 유엔군은 경기도 평택과 충청북도 제천을 잇는 선에서 인민군과 중국 인민 지원군의 공격을 막고 진격해서 진격했다. 또다시 서울을 되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28선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힘으로 상대를 재압할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휴전을 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만에 유엔 주재 소련 대사가 휴전을 권했고 극동 연합군 사령관이 리지웨이는 이 의견을 받아서 북한과 중국에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1953727일이 되자 드디어 판문점에서 휴전 협상이 끝났다. 6.25전쟁은 유럽에서 시작된 냉전이 아시아에서 열전으로 번진 대규모 국제전이었다. 이 전쟁으로 죽은 군인은 160만 명이 넘고 민간인은 100만 명에 가깝다. 이 전쟁이 끝나고 다시 이승만은 대통령을 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친일파의 도움을 받아서 권력을 쥔 사람이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 특위를 못마땅해 했고 결국 해체에 으르는 것까지 방조 했다. 나라가 문단을 되었어도 아직까지는 대한민국에는 이승만을 반대하는 진보적 인사들이나 민족주의 적 인사가 많았다. 1952년에는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이승만이 2대 대통령을 하기 위해서 반대를 한 야당 의원 11명을 체포한 사건이다. 결국 이승만은 2대 대통령까지 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한번더 대총령을 하고 싶어했지만 헌법에 한 사람이 세 번 대통령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서 못하고 있던중 19541127일에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을 철폐한다라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월래 재적 의원의 3분의2가 찬성을 해야 가결되는데 이 개헌안은 딱 한명이 모자랐다. 고로 이 개헌안은 기각되어야 하는 것인데 반올림의 논리에 따라 개헌안이 통과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사사오입 사건이라고 한다. 1960년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승만은 자기의 부하인 이기붕을 부통령의 시키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 전국에 있는 학교를 민주당 후보의 연설을 못듣게 할려고 모두다 학교에 보내개 했고 민주당의 유세장에 모이는 것을 방해했다.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는 315일에 치러졌다. 그런데 이승만정부는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인 명부를 조작해서 없는 사람을 유권자로 등록하고 40%정도의 투표용지에 여당 후보를 찍어서 미리 투표함에 넣기도 했다. 그리고 공무원을 동원해서 유권자들을 협박하고 3인에서 5인씩 조를 짜서 서로를 감시하며 투표를 하게 하는 거의 공개투표를 하기도 하는등 부정을 저질렀다. 이 사건에 대해서 분노한 마산 시민의 시위가 막을수 없어지자 경찰들은 실탄을 발사해서 8명이 사망했다. 그러던중 411일에는 315일에 시위를 하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되었다. 419일에는 경무대로 시위를 하고 있던 시위대에게 경찰이 실탄을 발사해서 104명이 죽었다. 425일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교수들도 시위에 참여했고 그러다가 427일에 이승만은 국회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경무대를 나왔다. 이사건을 4.19혁명이라고 한다, 1961516일새벽에는 박정휘 소장과 지휘관들 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다시 독재국가로 변했다.

느낀점: 이책에서는 내가 재일 좋아하는 현대사가 나와 있어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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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한국사4

by 명화 posted Ja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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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한국사4

지은이:김 정

출판사:풀빛

내용:조선은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와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라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다. 그후 흥선 대원군은 서양 오량캐가 침략했을 당시서양과 회친을 주장하는 것은 서양 오량캐엑세 나라를 파는 것과 다름 없다는 내용의 척화비를 건국 에 세워서 쇄국 정책을 주진하였다. 흥선군은 백성들과 양반들로부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집권10년 만인 1873년 만에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조선의 쇄국을 추진하던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자 조선의 분위기는 끄게 바뀌기 시작했다. 서양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상 개화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안으로는 북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밖으로는 중국의 양무 운동과 일본의 문명 개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북학파는 상공어 진흥의 중요성을 알고 청 나라의 문물과 해외 통상을 주장했다. 통상 개화론자인 박규수는 정조 시대에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작고 주장한 북학파의 대표인 박지원의 손자였다. 할아버지의 영향인지 손자인 박규수도 서양의 문물을 들이자고 했으나 1861년 청에 사신으로 갔다가 애로 호 사건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목격했고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에는 저너럴 셔먼 호 사건을 집적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의 구사적 위력을 깨달은 박규수는 서양 세력을 막기 위해서라도 주체적으로 서양 문물을 수용해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화도 조약의 시작은 1875년 영종도 앞바다에서 운요 호라는 일본 군함의 위험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위험 사격으로 조선 군대는 화포를 발해서 운요 호에 대응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운요 호에 탄 일본군들은 영종도에 상륙해서 백성들의 집을 방화하였고 약탈을 하는등 난동을 피우고 돌아갔다. 이것이 이른바 운요 호 사건이다. 그 다음해의 일본은 다시 군함을 끌고와서 운요 호가 공격을 받은 사실을 들먹이면서 개항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일본에 썻던 반식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다른 점은 미국은 사격을 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실제로 전투를 했다는 점이다. 18762월에 조선은 일본과 일명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의 강요로 맺어진 조약이니 만큼 강화도 조약은 그 자체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과 조약을 맺은 후 조선 정부와 청 나라는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아 나섰다. 그래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은 서양의 여러 나라와도 통상울 맺어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상호 견제를 유도해서 중립을 유지하자라는 것도 있었다. 1882년 조선은 서구 열강 가운데서 최초로 미국과 조 . 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 미 수호 통상 조약도 강화도 조약과 마찬가지로 불평등한 조약이였다. 이 조약에서도 사법권의 독립을 부정하는 치외법권이명시되어 있었다. 조선은 미국과 조양을 맺은 후 연달아서 영국, 독일 등과도 조약을 체결하엿다. 그러나 프랑스와는 천주교 포교 문제가 걸려 있어서 1886년에 공식적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876년 개항으로 시작된 조선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조선의 식민지화의 위험은 한층더 높아져 가고 있었다. 조선은 188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근대화를 위한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1880년에는 통라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화 정책을 전담하게 했다. 그리고 구신 군대였던 5군영을 재편하여 무위영과 장위영인 2개로 통패합했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새로 만들었다. 별기군의 교관은 일본인이 담당했다. 조선 정부도 일본과 같이 외국의 개화 정책을 배우기 위해서 사정단을 파견했다. 먼저 개항을 한 1876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서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1880년에 파견돤 수산서 대표 김홍집이 주일 중국 대사 황쭌셴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조선으로 들어와 논란이 된것도 이 무렵 이였다. 개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점점 켜져가자 1882년에 임오구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은 개로 생긴 신식군대인 별기군 때무에 소애 받았던 구신군인 들이 폭동을 이르킨 것인데 이 사건으로 구식 군대 월급 지급 책임자인 민겸호와 별기군 교관을살해하고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질렸다. 일본인인 별기군 교관이 죽고 공사관이 불타는 피해를 입은 일본은 조선에 배상금을 요구하고 사관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 주둔까지 강요했다. 188412월에는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극진 개화파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하지만 정권 장악은 3일만에 끝났다. 조선은 국내에서 일어나는 쌀 부족 현상 때문에 1889년부터 함경도를 시작으로 다른 여러 지역에도 일본으로 쌀 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내렸다 하지만 한 달 전에 미리 일본에 알려야 한다는 1883년에 맺은 통상 규약을 어겼다면서 일본은 조선에 배상금을 청구했다.

느낀점: 이책은 일재시대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데 그곳까지 다 못써서 매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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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한국사3

by 명화 posted Dec 2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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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한국사3

출판사:풀빛

지은이:노대한

내용: 이성계는 1392년에 새로운 나라인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 나라의 이름인 조선은 은 우리나라가 삼국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있었던 단군 조선을 계승하여 분열성을 극복한다는 뜻이 있다. 조선은 성리학을 신봉한 신흥 사대부의 지원으로 세워진 국가이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장 시절에 유학자의 강의를 듣는 등 성리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이 추구한 목표도 당연히 유교 이념의 구현이었다. 1394년에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대 한양에 있는 4대문에 안 의 예 지의 이념을 반영하여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소지문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은 유교 이념을 실현하면서 불교는 철저히 배척하였다. 정도전은 1398년에 불씨잡변이라는 책을 써서 불교의 교리를 비판하는 19항목을 만들어 비판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불교 통제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태조는 전국에 있는 사팔 가운데서 242개만 사찰로 인정하고 그 나머지의 사찰의 토지는 국가가 돌려받았다. 사원에 소속이 되어 있는 노비8만 명도 양인으로 만들었다. 조선 개국후 초기조선은 개국 공신들과 왕실과의 세력 갈등으로 혼한을 겪었다. 이성계가 개혁 세력의 선봉에 서서 조선을 건국했지만 정국을 주도한 사람들을 개국 공신들이었다. 개국 공신들은 도평의사사라는 기구를 중심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으며 그로 인해서 왕권은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얻기 때문에 왕실은 개국 공신 세력을 누룰려고 했는데 그 일을 한 사람이 나중에 태종으로 즉위하는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은 두 번이나 왕자의 난을 통해서 정도전등 개국 공신과 자신의 형재들 까지 죽임으로서 왕권의 안정을 다졌다. 태종이 악역을 맡았던 덕분에 그의 후계자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황에서 즉위할수 있었다. 태종의 후계자는 세종이었다. 세종은 태종의 3재아들로 왕위 계승권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세종이야 말로 조선을 안정시킬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한 태종의 의도대로 세자로 책봉되었다. 세종이 즉위했을 당시에는 조선은 안팎으로 상황이 좋지가 않았다. 즉위를 하던 해 가뭄이 들었고 한성에 큰 불이나서 2500여 채의 집이 불타기도 했다. 조선의 국경에서는 고려 말부터 계속 괴롭히던 왜구와 야인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중국은 조선이 감당하기 힘든 무리한 조공을 요구해서 조선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세종은 할 일도 많았지만 일단은 유교 이념을 확립하는 일을했 다. 세종은 1420년 일종의 왕립 연구소인 집현전을 개편해서 젊고 능력이 있는 학자들을 집현전 학자로 임명하였다. 이 집현전 학자들은 사헌부의 규찰을 받지 않도록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사가독서라는 휴가를 주어서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세종은 일반 백성들도 유교이념을 쉽게 전파할수 있도록 1443년 한글을 창제하였다. 한글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의미로 훈민정음이라고도 하였다. 세종은 유교 이념도 중시했지만 민본주의를 실천 할수 있는 실용적인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 1429년 농사직설을 간행했다.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온 농상집요 등을 참고해서 농사를 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가 중국과 달라서 효과적이지 못했지만 농사직설은 그러한 단점을 보안하였다. 의학 분야에서는 1433년 항약을 중심으로 증상에 따른 처방을 기록한 향약집성방이 간행되었다. 항약은 우리나라 향토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말한다. 그 동안은 중국의 의학서의 처방전을 보고 약을 지었으며 중국산 약재는 당재를 주로 이용했다. 그러나 당제는 일반백성들이 살 수 없는 비싼 가격과 우리나라사람들 한태는 효과가 적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향약집성방이었다. 천문이나 역법분야에서도 발전을 이루었다. 동양에서는 천문과 역법은 하늘을 살핀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지만 농업을 위한 현실적인 필요성도 있었다.1442년에는 칠정산내외편이라는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었다. 천문쪽으로는 노비출신의 과학자인 장영실이 1434년에 자격루를 발명했으며 1441년에는 우량계를 만들어서 유럽보다 200년 정도 빨리 측우기를 만들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문종이 즉위했다. 하지만 문종은 병약햇던 탓에 재위3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이어서 10살인 단종이 임금자리에 올랐다. 정국은 문종한태 부탁을 받았던 김종서와 항보인 등의 대신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이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김종서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서 세조가 되었다. 세조는 1456년 단종 복위를 조모한 사육신들을 죽이고 친동생인 금성 대국도 죽였다. 세조는 이것에 그치지 않고 단종이 사육신의 복위 운동에 연루되었다고 하여서 노산군으로 강등을 시키고 영월에 유배를 보냈다가 결국에는 살해하였다. 세조는 비정산적인 방법으로 집권을 해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유학보다는 불교쪽에 관심을 기울였다. 1461년 간경도감을 설치해서 유명한 승려와 학자들로 하여금 불경을 변역하고 간행하게 햇다. 사찰의 건립도 많아졌는데 거의 1년간 진행된 원각사 재건 공사에서는 2쳔여 명의 군사가 동원되었고 절터를 확보하기 위해서 2백여 채의 민가를 헐기도 했다. 세조는 집권을 한지 14년 만인 1468년에 죽었다. 시조의 뒤를 이른 예종은 1년만에 죽고 그의 조카인 성종이 즉위했다. 성종은 즉위당시 13살이여서 한동안은 세조비였던 정희 왕후가 뒤에서 정치를 돌보았다. 1471년 간경도감이 폐지되었다. 성종 대에는 문화적인 성과들이 많았는데 의례에서는 1474년 국조오례의가 편찬되었고 음악은 1493년 악학궤범의 편찬으로 정리되었다. 지리지 편찬 사업은 1478년의 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고 1481년에는 동국여지승람이 만들어 졌다. 성종의 뒤를 이어서 1494년에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성종과는 반대로 사림의 비판적인 언론 활동이 연산군을 향하자 연산군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해서 1498년 훈구파 관리들이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제자로 사과 자리에 있던 김일손이 스승이 쓴 조의제문이라는 글을 사초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서 일어났다. 이로 인해서 문제가 되자 연산군은 훈구 대신 편에 서면서 김일손이나 정여창등 수십 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에 처해지는 등 큰 타격을 받았다. 그뒤로 1504년에는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 폐비 사건이 발단이 된 갑자사화가 발생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었던 사림까지 피해를 입게 되었다. 두 번이 사화로 사림이 제거되면서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연산군의 폭정은 도를 넘었다. 백성들에게 2,3년 치의 세금을 미리 거두어 들이기도 하는등 폭정이 도를 넘자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했다. 중종의 재위로 훈구 대신들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훈구 대신들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중종은 훈구 대시들의 눈치를 살필 수 밖에 없었고 훈구 대신들이 정권은 장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종도 훈구 대신들에게 반감이 들어서 그들을 견제하려고 사림파들을 기용했다. 1515년 기용된 조광조가 사람파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조광조가 중종을 도와주자 훈구 대신들은 궁중 나인을 시켜서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고 새기게 하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처음에는 조광조를 신임했던 중종은 조광조가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왕권을 견제하려고 하지 불만을 느껴서 결국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는 38세의 죽었다. 1544년에 인종이 재위를 했지만 즉위 1년 만에 죽었고 1545년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156 5년 정권을 농단하단 문정 왕후가 죽었다. 윤씨 세력이 몰락하자 사림이 징게에 다시 진출했다. 명종다음으로 선조가 본격적으로 사림을 기용함으로써 다시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 수군은 왜군을 저지하는 데 실패해서 왜군은 육지에 상륙했다. 동래성과 부산성의 관군과 백성들은 일본군에 맞서서 항전을 벌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지방관과 군사들은 겁을 먹고 도망을 가버려서 왜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도 않고 한양으로 진격했다. 429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필사적으로 항전했지만 그것도 왜군이 승으로 끝났다. 이걸로써 관군은 사실상으로 궤멸했다. 조선은 전쟁 초반에는 왜군한태 당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상도 옥포에서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과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연합 함대가 수전에서 이겼다는 소식이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 의병들의 의병장들은 대개 지방에서 영향력이 켰던 유명한 집안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1592년에는 명나라에서 원군을 파견했다. 명나라의 이여송 부대는 1593년 평양 전투에서 고시니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을 격파했다. 일본은 임진왜란이 패하자 1597년에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임진왜란의 패배가 수군이 약함을 할고 대형 군선을 건조하고 수륙 연합 작전을 통해서 조선 수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순신이 있는한 수전은 이길수 없음을 알고 간첩을 보내서 이순신을 직위에서 박탈하였다. 이순신이 없자 원균이 조선 수군을 지위했지만 참패를 했다. 이재서야 이순신의 필요성을 알자 이순신을 삼도 수군통제사로 복귀시켰다. 통제사에서 이순신은 13척으로 130여 척선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육지에서도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이 화왕산성 전투에서 승히하는 등 왜군을 견퇴했고 명나라 군대도 일본군을 압박했다. 이런 와중에 1598년에 일본 본토에서 히데요시가 병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7년간의 동아시아 대 전쟁이 막을 내렸다.

느낀점:이책은 목요일에 찾아서 읽는대 매우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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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한국사2

by 명화 posted Dec 2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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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한국사2

지은이:홍영의

출판사:풀빛

내용: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698년에 고구려 장군이었던 대조영이 발해를 세웠다. 발해는 고구려와 비슷하게 넒은 영토와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발해를 당나라는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발해는 한반도 남쪽에 있는 통일 신라와 비슷한 기간 동안 같이 경쟁하고 살아갔다. 이 시대를 남북국 시대라고 한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받아드려서 676년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을 차지해서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을 잃고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한계가 있지만 삼국으로 분열된 700여 년 이래 최초의 통일을 이뤘다. 발해는 동북아시아를 제패하려는 당나라를 막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확장해 나갔다. 698년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 세력을 이끌고 동모산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정했다. 신라는 통일 전쟁 이후 702년부터 765년까지 황금기를 누렸다. 이때의 신라는 부처의 나라를 지상에 세운다는 불국토 이상 속에서 불교의 나라를 만들었다. 불국사나 석굴암 그리고 봉덕사의 성덕대왕 신종 등통일 신라를 대표하는 문화재들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신라는 6689월에 일본으로 사신 김동엄을 파견하여서 끊어졌던 국교를 회복하였다. 당시 일본은 패망한 백제를 구원하러 갔다가 백강 전투에서 패한뒤 위기의식이 커져 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열린 양국 관계는 공식적으로는 779년까지 신라가 46회 일본이 27회의 사절을 상대 나라에 파견했다. 7세기 후반에는 일본은 해외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통로는 신라였다. 인본은 율령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법령이나 불교 한문 사상등 다양한 방면에서 신라를 따라갔다. 발해도 신라만큼은 아니었지만 발해도 일본과 여러 차례 사절단을 주고 받았다. 발해는 일본에 35처례의 공식 사절단을 파견하고 일본은 발해에 13차례 사절을 보냈다. 동해의 풍랑과 조난과 표류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여서 이 48회하는 교류는 매유 힘들었을 것이다. 발해가 일본과 교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신라와 당나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발해와 같은 입장을 이용해서 함께 신라를 침공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발해는 그 대신 발해와 일본의 외교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쪽으로 일본을 이끌었다. 9세기 신라에서는 왕위 쟁탈전으로 귀족들의 분열과 대립이 시작되어서 2년동안 국왕이 2명 죽고 국왕 후보자1명이 죽었다. 장보고는 이시대에 태어 났는데 완도의 평민 출신으로 당나라로 가서 군인으로 활동했다. 당시의 당나라는 안사의 난 후유증으로 지방의 절도사들이 독립적으로 세력을 이루고 있었을 때였다. 장보고는 이러한 절도사의 사병으로 출세를 했다, 서주 무녕군 소장의 지위로 신라에 돌아온 장보고는흥덕왕에게 요청해서 자신의 고향인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해서 황해의 해적들을 물리쳤다. 신라는 9세기 후반에 들어서 왕위 쟁탈전이 잠시 주춤거렸다가 이번에는 왕과 귀족들의 사치 생활이 극에 달했다. 경주의 귀족들은 금으로 기둥을 장식한 화화 주택인 금입택이랑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옮겨 다니는 별장주택인 사절유택들을 마련했다. 귀족들이 이와 같은 사치 생활을 즐기면 그만큼 농민들을 수탈해야 했다. 귀족들의 사치와 방탕을 위해 농민들 한태는 무거운 세금을 먹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봉기를 많이 일으켰다. 농민 반란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고 신라의 왕권이 약해 지자 지방에서는 독립적인 군사를 보유한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신라의 외곽에서 자리를 잡은 세력가들은 주로 장군이나 성주이고 도적들을 막는다는 이유로 사병을 거느렸다. 이런 지방 호족들은 그 지방의 토착 세력이거나 중앙의 왕권 경쟁에서 밀려나와 낙향한중아 귀족 출신들 이였다. 이들은 농장을 경영하거나 자신의 관할 지역에서 마음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으로 경제력을 키웠다. 호족 가운데 가장 먼저 신라와 맞서는 독자적인 정권을 셍누 사람은 농민 출신의 군인 견휜이었다. 해적들을 막기 위해 서남 해안 지역에 배치되었던 견휜은 진성 여황 때 신라가 내란 상태에 빠지자 바로 후백제를 세웠다. 군사 경험이 풍부한 견휜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신라를 위헙했다. 견휜다음으로 나라를 세운 사람은 궁예이다.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정권 다툼의 희생이 되어 지방으로 쫓겨난 인물이다. 궁예도 진성 여왕때의 혼란기에 절을 떠나서 원주지역에서 호족인 양길에게로 가서 그 부하로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궁예가 거느린 군사의 수가 많아지자. 후 고구려를 건국했다. 이걸로 고구려의 멸망으로 삼국시대가 끝난지 200여 년 만에 새로운 삼국시대인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후고구려는 후삼국의 전체 3분의2를 차지한 최대 세력이었다. 905년에 궁예는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다. 둥예는 초기에 병사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세력을 잡으면서 전제적이고 급진적인 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918년에 궁예를 쫓아버리고 왕건을 새로운 왕르로 추대 했다. 왕건은 이 후고구려를 고려라고 이름을 바꾸고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견휜이 세운 후백제의 군대는 후삼구 가운데 가장 강성하여 왕건의 고려군과 여러 차례 혈전을 벌여 군사적으로 우위를 지켰다. 929년 견휜과 왕건은 다시 안동 인군의 고창에서 전쟁을 버렸다, 이때 후백제군은 고려군에게 대패를 당하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후 후백제의 형세는 점점 기울어 유능한 신하들이 모두 왕건한테 투항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934년에는 웅진 이북의 30여개의 성이 고려에게 투항을 했다. 후백제 내부에서는 왕위 계승에서 문제가 생겼다. 견휜은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이것에 불만을 품은 첫째아들 신검이 두 동생 양검과 용검이랑 힘을 합쳐서 93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신검은 견휜을 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죽인 다음에 왕위에 올랐다. 아들의 배신에 분노한 견휜은 금산사에서 탈출을 해서 왕건한테 귀순을 하고 함께 신검을 공격하기를 원했다. 후백제에서 반한이 일어난 그해 10월 신라의 경순왕은 민심이 고려로 기울자 군사회의를 소집해서 고려에 항복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를 했다. 경순왕의 태자는 끝까지 반대를 했으나 신라는 고려에게 항복을 하였다. 신라까지 차지한 오아건은 936년에 견휜과 함깨 후백제를 치로 갔다. 고려와 후백제 간의 최후의 전투는 얼선군에서 벌어졌다. 후삼국은 견휜이 후백제를 세운지 36년 만에 다시 통일되었다

느낀점:역사시간에 배웠던 것을 다시 한번 읽으니까 새롭고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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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화 posted Dec 1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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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전호태

출판사:풀빛

내용;인류의 조상은 동아프리카 좁은 골짜기 지대에서 발견됫다. 그 가운데 에티오피아의 아라미스에서 발견된 뼛조각은 약 440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남긴 것으로 추측된다. 학자들은 그 조상에게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는 유인원들과 달리 두 팔로 아기를 안고 구부정하게나마 서서 걸어 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400만 년 전에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고 이름이 붙여진 원인이 나타났다. 그들도 역시 서서 걸어 다녔으며 양 손을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들같이 초기의 원인들은 뇌의 용량이 지금 사는 사람들 보다 약 1/3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250만 년 전에는 동물을 사냥할수 있고 고기를 잘라내며 뼈를 부수는 대 날카롭개 다듬은 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최초의 석기를 만든 사람들로 소을 자유롭게 쓰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 하빌리스라고 부른다. 이 구석기 시대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뉘는데 10만 년 전을 전기 구석기 시대하 부르고 4만 년 전까지를 중기 구석기 시대라 부르고 신석기 시대가 오기 전까지 1만여 년 전까지를 후기 구석기 시대라고 한다.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처음부터 인류가 살지는 않았지만 이 세 시기의 구석기 유적들이 모두 발견 되었다. 전구 구석기 시대의 유적은 주로 만주나 중국 햐오닝 성 평양 경기도 연천 전곡리 등이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의 유적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연천의 전곡리 유적이다. 이곳에서는 땅 위에서만 1000여 점의 구석기 시대의 우물이 나왔고 땅속을 파자 4000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중국 구석기 시대의 유물은 함경북도나 웅기 굴포리 유적 령안남도 덕천 승리산 유적등이 있다. 덕천 승리산 유적에서는 사람의 어깨뼈와 어금니가 나왔고 평양 역포 구역 대현동 유적에서는 머리뼈가 나왔다. 중기 구석기 시대의 사람들을 긁개 찍개 자르개등 용도에 따라서 구분이 되는 석기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후기 구석기 시대는 충청남도 공주 석장리 유적이나 평양 만달리 유적등이 있고 새롭게 확인되는 유적도 많이 있다. 공주 석장리 유적의 후기 구석기 문화층은 1964년에 발견되어서 1992년까지 계속 발굴을 했다. 여기서는 눌러떼기 기법으로 만든 돌날을 다시 가공해서 만든 격지긁개 새기개 밀개 찌르개 등 작고 정교하며 다양한 형태의 도구들이 나왔다. 1만 년 전쯤부터 빙하기가 가고 지구의 기후는 다시 따뜻해 졌다. 이때부터는 현재와 큰 차이가 없는 기후 환경이 되었다. 동물과 식물의 분포 모습도 빙하기의 추운 시절과는 달라졌고 먹을 거리가 더욱더 풍부해 졌다. 후기 구석기의 특징은 작고 정교하다는 점이었는데 사람들은 여기에서 더욱 섬새한 손짓을 더해 서 한층더 작고 가벼운 석기를 만들어 냈다. 이러한 석기를 흔히 세석기 또는 잔석기라고 한다. 학자들은 이 같이 잔석기를 집중적으로 만들던 시기를 보통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의 중간이라는 뜻에서 중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중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돌에서 더 이상 떼어 낼 부분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잔석기를 사용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들은 활과 화살을 만들어내서 작고 빠른 짐승들을 사냥할수 있게 되었다. 8000년 전에는 신석기 시대인데 이때는 돌을 갈아서 만든 도구들을 사용했다. 돌을 갈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동물들을 잡아서 기르고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지었다. 이로서 떠돌면서 사냥을 하던 사람들이 이제 계절이 바뀌어도 한자리에 머물려 살 수 있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 현상 가운데 하나는 흙으로 빚은 그릇 토기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식석기 시대의 사람들은 한군데에 모여서 살면서 농사지은 곡식을 토기에 담아서 두기도 했고 토기에 넣어서 끓여 먹기도 했다.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신석기 토기는 빗살무늬 토기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밑바닥이 납작한 원시 민무늬 토기와는 달리 대부분의 빗살무늬 코기는 밑이 둥글고 뾰족하여서 전체적으로의 느낌은 반으로 나눈 달걀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빗살무늬 토기는 모래 밭이나 부드러운 흙에 고정기켜서 농사를 짓거나 채집한 곡식을담아 두는데 주로 쓰였다. 움집 안에서는 토기의 밑바닥을 떼어 내고 거꾸로 땅에 묻어 불씨를 보존하는 용도로 쓰거나 저장 구덩이로 쓰기도 했다. 빗살무늬 토기는 시베리아에서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됫다. 고조선은 기원전7세기경부터 중국의 문헌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고조선은 축추 시대를 대표하는 제나라와도 교역을 했다. 당시 고조선은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던 중국의 제후국과는 다른 나라였다. 이 시기의 고조선 지역에서 만들어진 강상 무덤에서는 비파형동검과 같은 동이계 유물이 나왔다. 고조선의 건국 신화는 단군 신화이다. 이 신화에 따르면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된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 신화에서 등장하는 세 개의 천부인이 바로 청동이 문화를 상징한다. 이 천부인은 종교적 상징물인 청동제 거울과 방울 검이다. 이런 물건들은 청동기 시대의 제사장이 하늘의 신과 의사소통을 하고자 할때 쓰던 도구들이다. 삼국시대의 시작은 고구려인데 이 고구려는 기원전1세기 주몽이 만든 나라이다.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처음부터 한의 군현과 군사 대결을 벌여 한 군현의 관리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고구려가 만들어 진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졸본 부여의 완자였던 비류와 온조 현제는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갔다. 그들은 낙랑을 거쳐서 한강 하류 지역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나라를 새운 것이 바로 백재이다. 신라는 남부에 있는 영남 지역에서 나라를 새웠는데 이 지역은 비교적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토착 세력들이 서서히 뭉쳐 지면서 큰 나라를 만들어 갔다.4세기 초에 낙항과 대방이 멸망하면서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백제로 들었다. 그때 백제는 한족 계통의 사람들로부터 바닷길을 이용해서 중국과 접촉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후에는 대륙으로부터 전수된 문물이 백제를 거쳐서 일본 열도로 들어갔다. 신파는 4세기 까지 진한의 대부분 지역을 통합했다. 그러나 신라는 한반도 남부의 일부 지역을 차지한 지역 국가 수준에 있었다. 신라는 주로 변한 소국 동맹인 가야 연맹이나 왜와 자주 싸웠다.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 연맹의 나라들은 하나씩만 놓고 보면 신라에 비해 국력이 열세했다. 그러나 금관가야는 서로 간에 유기적인 연합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가 가야 연맹의 나라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구려가 남족으로 진출할려고 하자 보호국 신세에서 벗어나려던 신라와 백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가까워졌다. 신라는 고구려군이 다시 백제를 침공하면 군사적으로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백제도 신라에 비상사태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군대를 보내겠다고 보장하였다.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 하자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적극적인 외교 교섭에 나서기 보다는 대규모 전쟁에 대비하는 데 힘을 모았다. 요동성을 비롯한 랴오허 강 동쪽의 대중국 방아 거점들에 군량미를 비축하고 병사들의 무장과 무기 체계도 재점검하고 군사 훈련도 강화 하였다. 598년 고구려가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해서 요서를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나라는 이러한 고구려의 요서 침공을 수나라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욱해군 30만 명을 동원해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수나라의 대군은 고구려와 싸우기도 전에 큰 홍수와 태풍등으로 병사의 80~90%를 잃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회군했다. 수나라는 612년에 1133800명으로 고구려 2차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고구려 군은 수나라를 이겼다. 그러나 수나라는 345차 정벌을 나섰지만 한번도 이기지를 못하고 귀족 세력의 반란으로 멸망한다.

느낀점: 이책은 한국사만 있는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역사도 있는데 그 부분은 복잡해서 쓰지 못했지만 읽어보니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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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3.12.16 00:00
    우리 정우가 독후감 쓰는 실력이 날로 좋아진다. 잘 썼네.... 요약하기 어려운 책인데

정우

십대를 위한 동아시아 교과서

by 명화 posted Nov 3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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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를 위한 동아시아 교과서

지은이:김무신

출판사:뜨인돌

내용:항왜

항왜는 임진왜란때 조선군한태 항복을 해서 넘어온 일본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은 전쟁 포로와는 다른 것으로 조선군과 같이 적극적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일본군들을 가리킨다. 황왜와 반대로 조선인이면서 일본군한태 투항한 사람들을 순왜라고 한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항복한 일본군 포로들을 살려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1594년부터 중국이 포로들을 살려두는 것을 보고 조선군들도 포로들을 살려 주었다. 조선군은 항복한 일본군들 한태 조총과 화약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조공

조공은 약소국이 강대국들한태 예물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동아시아의 강대국이었던 중국이 다른 나라들한태 조공을 받고 왕들한태 벼슬을 주었다. 이러한 것을 책봉이라고 한다. 중국은 조공을 받으면 받은 나라한태 준것의 몇 배나 되는 선물을 보냈다. 이것은 중국 스스로 강대국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것으로 중국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지기도 했다. 고려와 조선은 각각 송나라와 명나라 한태 조공을 보냈다. 중국은 3년에 한 번만 조공을 보내라고 했는데 고려와 조선은 굳이 1년에 세 번이나 조공을 했다.

아편전쟁

아편은 opium을 한자로 옮긴 말인데 이것은 중독성이 매우 강한 마약이다. 아편을 만드는 방법은 양귀비의 어린 열매에 상처를 내면 유액이 나오는데 그것을 햇볓에 말리면 아편이 된다. 월래 아편은 통증을 완화 시켜주는 의약품이였는데 영국은 이것을 중국을 함략시키는데 약용했다. 그 이유는 17세기에 동인도회사에서 중국의 차를 수입했는데 그 인기가 엄청나서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국은 아편을 중국으로 수출해서 흑자를 만들었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영국과 아편 전쟁을 했지만 졌다.

돈가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아시아의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일본은 유렵인들을 닮아 갈려고 육식 금지령을 폐지했다. 일본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아서 체격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일본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거부했다. 육식 권장이 쉽지가 않차 정부는 궁중 식단에 프란스 요리를 도입하고 신하들과 같이 서양 식당에 가서 고기를 먹는 시범을 보였다. 육식 권장의 핵심은일단 고기의 비린내를 없애고 육식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을 제거하는 것이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스키야키나 샤브샤브이다. 그리고 돈가스를 만들었는데 돈가스는 돼지고기에 밀가루와 계란 빵가루를 입혀서 튀긴 음식인데 이러면 고기가 고기처럼 보이지 않아 거부감을 없에고 바삭바삭한 식감 때문에 고기 특유의 식감이 덜했다.

소토코모라 족

소토코모리족은 밖을 뜻하는 소토와 틀어박히다를 뜻하는 코모리가 합쳐진 말로 외국에 틀어박혀 있는 족속이라는 뜻이다. 소토코모리 족은 대부분이 안정된 직업이 없는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보통 3~4개월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서 돈을 모아 방콕이나 프톰펜 같이 생활비가 싼 나라로 가서 8~9개월동안 머물리다가 생활비가 떨어지면 다시 일본으로 와서 돈을 벌고 다시 나가는 것을 반복한다. 소토코모리의 어원은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의 의미를 가진 히키코모리이다.

느낀점: 책이 매우 재미있었고 아는 내용도 있었지만 모르는 내용도 있어서 제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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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3.12.01 23:39
    정우 독후감은 그 때 읽어서 알고 있었어. 근데 정우야 '~한테'라고 할 때는 한태가 아니라 ~한테라고 써야 맞는 거야. 알았지? 정우 요약능력은 많이 좋아졌다. 잘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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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2013.12.02 16:40
    네 ^^>

정우

여섯 색깔 모자

by 명화 posted Nov 2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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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색깔 모자

지은이:에드워드 드 보노

출판사:한언

내용:사전 감지 기능은 모든 동물들한태 중요한 부분이다. 사전 감지 기능은 무슨일이 있자마자 모든 신경이 활발해 져서 무언가를 빨리빨리 감지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사람은 한꺼번에 많이 사전 감지 기능을 쓸수가 없다. 사람의 두뇌는 각각의 상황에서 필요한 방향으로만 예민해 지도록 그 기능을 극대화 시킨다. 그러므로 한번에 많이 최대한 예민해 지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이런점을 위하여 여섯 색깔 모자 사고 기법이 있다. 여섯 색깔 모자 사고 기법은 생각하는 방향에 대한 상징으로 모자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인데 어떤 특정한 모자를 쓰고 있으면 그것에 따른 특정한 역할이나 정신작용을 할수 있는 것이다. 왜 하필 모자를 사용 했냐면 모자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친숙한 물건이기 때문에 사람들한태 어떤 방향의 사고를 집중하라고 하는 것 보다 어떤 색깔의 모자를 사용하라고 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여섯 색깔 모자 사고는 모두다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색깔은 하얀색 빨간색 검은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이 있다. 왜 색깔을 썻냐면 사람들이 모자를 시각화 하기애는 색깔이 가장 좋아서 이다. 이 각자의 색깔은 자기만의 상징을 가지고 있다. 하얀색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다. 따라서 하얀 모자는 데이터나 정보을 담당하고 있고 객관적인 사실과 숫자를 나타낸다. 빨간색응분노와 노여움과 감정을 암시한다. 따라서 빨건 모자는 느낌 직관 정서 감정을 나타낸다. 검은색은 암울하고 진지하다. 따라서 검은 모자는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주의 경고 잠재된 위험을 상징한다. 노란색은 밝고 긍정적이다. 따라서 노란 모자는 이익 이점 가치와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관점을 의미한다. 초록색은 풀 채소을 상징하고 풍성하고 풍부한 성장을 나타낸다. 따라서 초록 모자는 창조성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의미한다. 파란색은 냉철하다. 또 모든 만뭉의 위에 이쓴 하늘의 색깔이기도 한다. 따라서 파란 모자는 생각하는 계획 및 순서를 짜는일 그리고 다른 모자드르이 사용을 통제하는 일을 상징한다. 이 여섯 색깔의 모자의 의미와 기능은 빨간색과 흰색이 서로 대비하고 있고 검은색과 노란색, 그리고 초록색과 파란색이 서로 대비한다. 이 여섯 색깔 모자를 실제 회의에 대입하면 모자들의 기능에 대한 언급이 없이 모든 일을 색깔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야 한다. 그 이유는 감정적인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크게 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자의 색깔은 가치 중립적인 언어 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수 있다.

느낀점:나는 이책이 너무 재미 있어가지고 두세번 정도 읽었는데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재미 있는 책이다. 요약은 많이 하지 못했지만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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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3.11.24 00:43
    명화씨!! 다음부터는 시간에 쫓기지 말고 좀 여유 있게 독후감 쓰시길....

정우

시인을 찾아서

by 명화 posted Nov 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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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을 찾아서

지은이:신경림

출판사:우리교육

내용:김종삼 시인

김종삼은 50년대에 시인들한태 많이 영향을 끼친 시인중 한명이다. 김종삼은 언론기관인 동아방송에서 일을 하면서도 매스컴을 싫어 했다. 김종삼은 다방도 많이 갔는데 거기에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밖으로 나와 버렸다. 김종삼은 술을 많이 좋아 했는데 김종삼과 만나는 사람은 극히 한정적이여서 같이 술을 마시는 사람도 적었다. 김종삼은 동아방송에서 일해서 번 돈은 모두 자신이 썼다. 그는 후배 시인들 한태도 술을 많이 사주고 용돈을 주는 일이 많았다. 그는 생활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서 살림이 좋지 않았다. 그는 술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는데 한번 먹으면 사흘정도는 모든일을 놓고 술만 먹었다. 그는 동아방송에서 정년퇴임을 한 후 그가 좋아 하는 사치는 하지 못했지만 폭음은 계속 됬다. 그 정도는 김종삼은 거의 1년마다 이사를 가는데 김종삼은 그 집이 몇칸짜리 집인지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김종삼은 그렇게 10년을 살다가 간경화로 죽었다.

신동엽 시인

신동엽은 1930818일에 부여고을 동남마을에서 태어 났다. 신동엽의 생가는 동암리에 있는데 원래는 다른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던 집을 인병선 시인이 사서 옛날의 모습으로 복원해 놨다. 이 집의 별체에서는 방명록이 있어서 온사람들을 알수 있는데 유명한 사람도 많이 왔다 갈 정도이다. 신동엽은 빨갱이라고 오해를 많이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쓴 시의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였다. 그런 이유로 인해서 신동엽의 시집은 분온문서로 판금이 되었다. 신동엽의 시를 읽어 보면 알수 있겠지만 시를 읽다보며는 그런 오해가 생길수도 있을겄 같다.

박인환 시인

박인환은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다. 박인환의 가족은 가난했기 때문에 박인환은 옷을 깔끔히 입는 버릇이 생겼다. 해방 후에는 낙원동에서 마리서사라는 고서점을 하였다. 박인환은 기질적으로 진포주의자였는데 잘못하면 오장환 시인과 같이 북한으로 월북을 할수도 있었다. 그 당시 남한은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가 그는 지식을 행동으로 옮길 만한 용기가 없어서 그냥 남한에 남아 있었다.

느낀점: 오레전에 쓴 책이여서 중간중간에 한자도 들어있고 내용도 어려워서 많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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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2013.11.19 22:19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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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3.11.19 22:25
    마이 늦었다 .우선 -1점하고 시작한다. 우리 정우 이번주에 분발하기를.... 알았지? 그래서 꼬옥 +1점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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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2013.11.20 19:13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ㅠㅠ

정우

무한동력 드라마로 나왔다!!!

by 명화 posted Nov 1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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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요즘들어서 왜이리 좋은일만 일어나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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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엽 2013.11.16 13:29
    혹시 웹툰 원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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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2013.11.17 10:09
    ㅇㅇ

정우

아스팔트8

by 명화 posted Nov 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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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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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진표 2013.11.07 23:10
    재미있어 보이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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