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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

여행기행문 2.20~2.23 빠이, 치앙콩. 훼이싸이, 루앙프라방, 방비엔

by 김정인 posted Feb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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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빠이, 치앙콩
 전날 늦게 잤더니 오늘 10시 40분에 일어났다. 일어나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갈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빨리 준비를 마치고 인소를 보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시내로 갔고 그곳에서 쌀국수를 먹었다. 쌀국수를 먹은 뒤 우리는 기행문을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러 갔다. 태국어가 써져있는 키보드는 신기하였다. 19일 것을 한번 날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난하게 기행문을 올린 뒤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사지는 굉장히 시원했고 만족스러웠다. 그 후 우리는 40분을 남겨두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나랑 지원이 언니는 파인애플 볶음밥을 시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고 볶음밥은 나오지 않았고 출발시간인 6시가 되서야 나왔다. 우리는 재빨리 볶음밥을 먹어치우고 차를 타는 곳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우리는 벤을 빌려서 늦게 가도 괜찮았다. 그렇게 우리는 벤에 탔고 새벽 1시쯤 더 리버 하우스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3명이라 3인실을 써야했는데 방이 2인실에 비해 안좋았다. 일단 제일 안 좋았던 것은 방안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샤워실이 괜찮아서 샤워는 잘 끝낼 수 있었다. 

2.21 치앙콩, 훼이싸이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으로 빵, 햄, 계란, 소세지를 먹고 산책으로 강가를 걸었다.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하고 놀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그 다음 툭툭을 타고 국경으로 갔다. 그 후 툭툭을 다시 타고 또 다른 곳으로 갔다가 툭툭을 타고 훼이싸이로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벤을 타고 루앙프라방으로 가기 시작하였다. 중간에 먹은 쌀국수와 밥은 굉장히 맛있었다. 특히 밥이랑 같이 있던 족발은 한국에서 먹던 족발보다도 맛이 있었다. 또 화장실 때문에 잠시 멈추었을 때 본 하늘에는 별이 굉장히 많이 떠 있었다. 벤을 13시간동안 타서 힘들기는 했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2.22 루앙프라방
 루앙프라방에 도착하고 숙소를 찾기 위해 헤매서 3시~4시쯤  숙소앞에 도착하였다. 잠깐 엎드려 자고 일어났더니 5시가 되어있었고 시간은 천천히 지나가 추위에 계속 떨어야 했다. 날이 점점 밝아왔고 스님들이 항아리 같은 것을 들고 탁발행진을 하기 시작하였다. 가게가 하나 둘 열기 시작하였고 우리는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빵, 쥬스, 계란등이 었는데 맛있었다. 그리고 숙소에 들어갔는데 또 별로 안좋은 숙소가 걸렸다. 그 때 규진이 오빠가 방을 바꿔주겠다고 하였고 우리는 방을 바꾸었다. 바꾼 규진이 오빠의 방은 매우 좋았다. 천장이 엄청 높고 방은 넓었으며 화장실도 넓고 욕조도 있었다. 좋은 숙소에 묵게 되서 기분이 좋았다. 한편 우리는 툭툭을 타고 꽝시 폭포에 갔다. 물 색깔이 굉장히 예뻤는데 민트색이었다. 물이 차가워 많이 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안 좋은 일도 있었는데 툭툭을 운전하는 사람이 사기를 친 것이다. 처음에 흥정할때는 왕복 440000낍이라고 해서 탔는데 갑자기 숙소에 도착하고 난후 갈때 440000 올때 440000이라고 돈을 더 달라고 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돈을 더 주기는 했지만 기분이 굉장히 나빴다. 그 후 저녁으로 돼지고기 볶음밥을 먹은 뒤 야시장으로 갔다. 진표오빠와 나는 체스판을 사려고 했지만 못찾아 결국 못 샀고 도장도 파 보려 했지만 하루가 걸린다고 해서 결국 아무것도 안샀다. 그런데 거기서 파는 물건들이 다 똑같이 코끼리가 들어가 있어서 신기하였다. 또 지원이 언니가 산 팔찌를 보고 예뻐서 나도 따라 샀는데 사기를 잘한 것 같다. 

2.23 루앙프라방, 방비엔
 아침에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시간이 늦어져서 아침을 시킨다음 허겁지겁 먹고 약속장소로 뛰어가 툭툭을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탔다. 외국인 중에는 입석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바닥에서 자는 모습을 보니 절대로 입석을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힘들어보였기 때문이다. 6시간 후 우리는 방비엔에 도착하였고 잠미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하였다. 방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고 우리는 넓고 좋은 5인실을 선택하였다. 이번 숙소는 참 마음에 드는 것 같다. 그 후 자전거를 빌려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바퀴를 돈 뒤 스무디를 사서 팀원끼리 돌려 마시고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이번 마사지도 꽤 마음에 들었고 져녁으로는 오랜만에 피자와 스파게티를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그 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체스와 신발을 사기 위해 가게에 들렸는데 바가지를 안 씌우고 정가를 불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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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실 2014.02.25 21:17
    정인이 글을 읽으니 이모가 라오스를 여행하고 있는 듯 하다^^ 건강하게 잘 다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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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27 17:36
    치앙콩에서의 맛사지가 시원했다니 좋네~~~
    광시폭포의 민트색 물색깔도 그려지구~~~
    정인이의 글을 읽으며 그 상황을 그려보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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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 2014.02.28 00:35
    하늘의 별... 민트색의 물..
    나도 세부에서 봤는데 참 예뻤어..
    팔찌도 궁금하다. ^^

정인

여행 기행문 2.19 치앙마이, 빠이

by 김정인 posted Feb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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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치앙마이, 빠이
 아침에 늦게 일어난 후 아침으로 계란 후라이와 소세지 2개를 먹은 후 산책으로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그런데 다른나라에 와있다는 느낌이 안들고 시골마을에 와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후 벤을 타고 빠이로 이동했는데 우리끼리만 티고 있으니 재미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흔들리는 차 안에서 인소를 보았더니 머리가 아팠다. 앞으로는 차안에서 글을 안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이는 치앙마이와 비슷한 시골마을 같았고 우리는 레인보우 하우스에서 묵게 되었다. 레인보우 하우스에는 동물들이 많이 있었는데 잉꼬, 개, 멧비둘기, 잉어, 메기, 구피등이 있었다. 동물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니 시간이 빨리 갔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시장으로 갔다. 우리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꼬치를 많이 먹었는데 그중 돼지고기 꼬치가 가장 맛이있었다. 저녁은 샤브샤브같은 것으로 먹었는데 체크를 잘못해서 이상한것도 나왔지만 맛있는것도 있어서 괜찮았다. 
지금까지 먹은 저녁식사중 가장 특이한 저녁식사였다. 식사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왔는데 레인보우 하우스는 방갈로 형식으로 되어있어서 화장실이 있는 방도 있었고 없는방도 있었다. 우리는 방을 잘못뽑아서 화장실이 없는 방이 되었지만 1인실인줄 알았던 다은이 언니의 방이 6인실이여서 좋은 다은이 언니의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다은이 언니의 방은 방갈로가 아니였는데 그래서 더욱 깔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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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유 2014.02.21 01:45
    와 여행의 향기가 여기까지 전해지네~~ 정인이는 동물들과 함께해서 더 집같이 느껴졌겠다 ^^ Safe trav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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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 2014.02.28 00:22
    동물들이 많은 숙소..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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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행문 2.16~2.18 방콕, 치앙마이

by 김정인 posted Feb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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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서울,방콕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씻고 교회를 출발하였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5시였다. 지금까지 예정된 시간보다 빠르게 장소에 도착해 있었던적이 없어서 신기하였다. 기차를 타니 졸려 금새 잠에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인천공항에 도착해있었고 여유있게 짐을 부치고 아침을 먹으니 비행기를 탈 시간이 딱 되어 있었다. 아침은 버거킹에서 먹었는데 왠일인지 배가 금방 불러서 조금밖에 못 먹었다. 비행기를 탔더니 잠이 쏟아졌고 결국 나는 잠을 자느라 기내식을 못 먹고 말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기내식이 무척맛있었다고 해서 좀 아쉬웠다. 우리는 경유지인 중국 푸동 공항에 도착하였다. 중국에 와본건 처음이라 기분이 묘했고 왠지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중국 공항을 한바퀴 돌았다. 비록 돈이 없어 아무것도 사지 못하였지만 재미는 있었다. 어느새 2시간이 지나갔고 갈아탄 비행기에서는 기내식을 꼭 먹을거란 다짐을 하였다. 결국 나는 기내식을 먹을 수 있었고 기내식은 먹을만 했지만 왠지모르게 우리 강아지의 통조림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 뒤 나는 다시 자다 깨다를 반복해서 시간을 보냈고 드디어 태국에 도착하였다. 공항은 생각보다 좋았고 우리는 빠르게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택시를 타려 했지만 줄이 너무 길었고 우리는 1시간 가까이 기다린 후에야 택시를 탈 수 있었다. 우리는 호텔에 도착하였고 좋을 줄 알았던 호텔은 매우 안 좋았다. 일단 화장실이 방 안에 없었으며 에어컨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갔고 꽤 좋은 곳에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돼지고기 볶음밥을 먹었는데 맛있기는 했지만 좀 짰다. 특히 햄은 짜고 신맛이 함께 나 특이하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편의점에 들려 과자와 음료수를 사와 다같이 모여서 먹었다. 물건가격이 다 싸서 좋았고 맛이 있었다. 특히 오랜만에 먹는 세븐업은 더 맛있었다. 나는 그 후 차가운 물로 힘들게 사워를 끝냈고 어쩌다가 보게 된 밤하늘에는 별이 많이 있었다. 
2. 17 방콕
 아침에 일어났더니 어젯밤 귀에 꽂고 잤던 이어폰이 목에 감겨있었다. 신기하였다. 일어난 후 지원이 언니와 같이 샤워를 하러갔다. 익숙해져서 그런지 어제보단 덜 힘들었다. 물도 어제보다 덜 차갑게 느껴졌고 말이다. 샤워가 끝난 뒤 우리는 아침을 먹으러 갔다. 너무 많이 걸어서 힘들기는 했지만 맛있어서 좋았다. 볶음국수를 먹었는데 새우가 맛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난 뒤 지하철을 타고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는데 지하철이 있는 것이 신기했고 시원해서 좋았다. 지하철에서 내린 뒤 버스를 탔는데 창문이 없어 바람이 들어와 시원하였다. 우리는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쉬다가 지하철을 타고 쇼핑센터로 이동하여 점심을 먹었다. 비싸기는 했지만 맛있는 볶음밥이었다. 그 후 팀별로 구경을 했는데 우리팀은 이어폰, 헤드폰을 구경하였는데 재미있었다. 그렇게 구경이 끝난 뒤 우리는 약속장소인 스타벅스로 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다른 팀이 오지 않았고 알고보니 백화점 안에 스타벅스가 3군데나 있었다. 다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쉬다가 다시 버스 터미널로 이동해서 케이에프씨에서 세트를 사서 저녁을 먹었다. 살짝 맵긴 했지만 맛있었다. 그 후 우리는 슬리핑 버스를 탔는데 우리가 알던 슬리핑 버스와는 조금 달랐다. 그래도 의자가 푹신하고 티비에서 영화도 틀어줘서 좋았다.
2.18 치앙마이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5시 30분 정도에 깼다. 화장실에 갔다와서 다시 자려고 하는 순간 버스가 치앙마이에 도착하였다. 뭔가 아쉽기는 했지만 뭔가 기대되었다. 버스에서 내렸더니 새벽이라서 그런지 서늘하였다. 너무 일찍 도착한 탓에 숙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기다렸는데 카운터 근처에서 만난 고양이가 매우 순해서 쓰다듬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치즈태비와 검은 고양이였는데 매우 귀여웠다. 아침은 맥도날드에서 먹었는데 햄버거는 짜고 사이다는 달았지만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9시 쯤 되었는데 마침 수영장이 있어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이 약간 차갑고 짰지만 재미있었다. 수영릴레이도 했는데 선우가 구멍이었다. 수영을 11시까지 하고 나니 방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서 방에 들어와 샤워를 하고 쉬었다. 아침일찍부터 돌아다녔더니 오후 2시쯤 된 듯 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가정식같이 나와서 색다르고 맛있었다. 그 후 숙소에서 쉬다가 지원이 언니와 같이 근처에 있는 슈퍼로 과자를 사러갔는데 꽤 샀는데도 싸서 좋았다. 두봉지 정도를 샀는데 90바트 정도 3000원정도 나와서 좋았다. 그리고 신기하였다. 마사지도 받으러갔는데 지금까지 받았던 마사지 중 제일 시원하였고 특이한 자세도 많이 하였다. 기분좋게 마사지를 받고난 후 저녁으로 볶음밥과 망고주스를 먹었는데 볶음밥은 살짝 짰지만 내가 원하던 맛이 났고 망고주스도 마찬가지여서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간식을 사서 숙소로 돌아와 쉬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너무 좋았다. 치앙마이에 개와 고양이가 많아서 좋고 숙소도 수영장도 있고 시원해서 좋은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무이네 느낌도 난다. 이곳에 2,3일 쯤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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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4.02.23 01:44
    참 재미있어 보이는 여행이다. 함께 있으면 언제나 즐거운 대기명당이 눈에 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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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27 17:42
    정인이가 섬세하게 써주어서 잘 감상했어. 고마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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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 2014.02.28 00:11

    스타벅스 3개에 사이좋게 하나씩 들어가다니..ㅎㅎ


정인

(독서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by 김정인 posted Feb 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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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1 광해군일기, 경험의 함정에 빠진 군주 2014.2.7.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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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왕과 세자

정비인 의인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선조의 마음은 후궁으로 기울었고 이때 공빈 김 씨가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네 살 임해군 세 살 광해군을 남기고 산후병으로 죽고 말았다. 공빈 김 씨가 죽은 뒤 왕의 마음을 차지한 후궁이 있었는데 인빈 김 씨이다. 자연히 임해군 광해군은 왕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인빈 김 씨가 낳은 왕자가 왕의 사랑을 받았다. 한편 광해군은 모범생으로 자라났고 임진왜란이 터져 분조를 하는 바람에 세자가 되었다. 그는 도망간 왕과 달리 자신의 임무를 멋지게 해치웠고 그를 세자로 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신성군에게 마음이 있었던 선조는 계속 그것을 미루었다. 선조는 결국 왕비가 낳은 아이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하며 재혼을 하였고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영의정도 적자를 세자로 해야 한다 하였고 세자의 처지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2장 초기의 광해군

어느 날 갑자기 왕이 쓰러졌고 선조 41215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이 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겨우 2살이었다. 중전은 세자의 환심을 사기로 하였고 선조가 죽은 다음날 바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광해군은 숱한 장애를 넘고 마침내 보위에 올랐다. 그는 임진왜란 때 분조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돌아온 것은 미움과 견제였고 중국은 책봉을 거부하였으며 조정의 실세들은 노골적으로 영창대군한테 줄을 섰다. 그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조심하였다. 그렇게 왕이 된 그는 많은 기대를 받았다. 그가 왕이 되자 앞장서서 영창대군을 옹호했던 유영경을 몰아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그는 계속되는 요구가 조금씩 처벌수위를 높여갔다. 결국 유영경은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고 죽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형인 임해군이 역모를 꾀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결국 임해군도 죽고 말았다.

 

3장 꼬리를 무는 옥사

황해도에 김제세라는 위인이 있었는데 그는 엉터리 문서를 만들어 관아 앞에 두었고 군수한테 걸렸다. 그 때 군수는 신율이었는데 출세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어 좀도둑을 잡아도 큰 도둑으로 만들고는 했다. 그는 잡혀왔고 그는 자신이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둥 횡설수설하며 말을 하였다. 그 사건은 조정에 보고되었고 광해군은 그 일을 가볍게 넘기지 않고 그와 관련된 인물들 진술에서 나온 인물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는 고문으로 진술을 얻었고 그렇게 얻은 진술은 의심하지 않았다.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잡혀와 감옥을 가득 메웠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 사건은 7개월을 끌고서야 마무리 되었고 그동안 340명이 끌려왔고 100여 집안이 파멸하였다.

 

4장 고독한 중립외교

광해군은 명나라 군에게 병사를 보내주었고 명나라는 조선과 원수져서는 득이 될게 없다고 생각하며 중립을 유지하겠다고 하는 조선에게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5장 모래 위의 성

세자 시절의 불행했던 경험 때문인지 왕은 미신을 크게 신봉하였고 늘 점쟁이들 풍수가들을 가까이 하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돈을 많이 쓰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와 관련된 인물들은 다 죽여 버렸다. 폐세자와 부인 박시는 교동에 따로 안치되었는데 탈출을 시도하다 잡혀서 결국 자살을 하였다.

 

느낀 점: 광해군이 불쌍하였고 단종이 생각이 났다. 책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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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2014.02.09 00:55
    항상 성실히 열심인 정인이를 보면 이모가 기분이 참 좋다. 중 1,2는 정인이가 모범이 되니 잘 따라 올거라 믿는다. 요즘 같이 수업을 못해서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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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by 김정인 posted Feb 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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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 선조실록, 조선엔 이순신이 있었다 2014.2.6.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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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림의 집권과 분열

인순왕후 심씨는 7개월만에 섭정을 거두었고 대신들이 정권을 휘어잡는 것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 기대승이 낙항한 후 신진 사림의 이데올로그로 떠오른 이는 이이였는데 그는 세 살에 시를 짓고 일곱 살에 경서를 섭렵하였으며 열세 살에 진사시에 장원한 천재였다. 그가 경연에 임하게 되면서 경연장은 그의 독무대로 바뀌었다. 그는 권신 척신세력이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고 사림이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이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구제하려 애를 썼지만 세상은 그의 말에 귀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는 왕에게 자신의 주장을 말하였고 왕은 그의 주장에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는 지체없이 사직하여 부르면 사양하다 다시가 주장하다 사직하다를 반복하였다. 그는 학문과 교육에 힘썼으며 늘 중앙정치의 흐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결국 탄핵으로 사직하고 물러난지 석달뒤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2장 당쟁의 격화와 기축옥사

한편 선조는 의인왕후 박씨와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었다. 대신 그는 후궁에게서 13명의 왕자를 보았는데 그중 광해군이 세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3장 일본의 침략, 무너지는 조선

정여립 사건으로 조정에 피바람이 불고 북인의 반격으로 긴장된 정국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조선을 둘러싼 주변의 정세는 격변을 거치고 있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통일을 이루었는데 그는 중국까지 삼키려는 대담한 구상을 세웠다. 그는 조선에 길을 빌려줄 것을 청하였고 조선은 상대의 말이 너무 무례하다 생각하여 무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일본은 결국 조선에 침략하였고 정발 이하 군민은 잘 싸웠다. 그러나 성은 함락되었고 동래부사 송상현은 끝까지 싸웠다. 결국 동래성도 반나절만에 함락되었고 조선의 매운맛은 거기까지였다. 경상 좌병사 이각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도망가버렸고 군대가 거의 흩어졌다. 그로부터 사흘 뒤 왕에게 일본군이 침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왕은 부랴부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피난길에 나섰다. 한편 일본은 상륙 20일만에 서울에 도착하였고 다시 북진을 계속하였다.

 

4장 이순신과 무적수군

조선이 그렇게 일본에게 짓밟혀가고 있을 때 이순신이 나타났다. 그는 조선수군은 약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전략으로 일본군을 이겼다. 그는 적선 26척을 파괴시켰고 수많은 적들을 수장시켰다. 그럼에도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부상 1명외에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많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원균은 공을 인정받고 싶어했고 내용을 조작해 선조에게 글을 올렸다. 그렇게 그는 선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5장 올려라 구국의 깃발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사대부들은 의무가 적었고 권리는 무한하였다. 그 많은 것을 누리던 사대부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도망가버렸다. 하지만 그중에 사대부의 명예를 지킨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의령의 선비 곽재우이다. 그는 치밀한 전략으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낙동강 서쪽일대는 완전히 수복되었다.

 

느낀 점: 이순신과 곽재우가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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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25 21:02
    정인아~^*^ 나도 너덕분에 재미있게 잘 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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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09

by 김정인 posted Feb 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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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9. 인종.명종 실록 문정왕후의 시대, 척신의 시대 2014.2.5. 김정인

1장 기대를 뒤로하고

인종은 태어나자마자 친모를 잃었고 신하들은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는 신동이었고 남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관례보다 빠른 여섯 살의 나이에 궁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은 불안하기만 했고 그 환경에 걸맞게 기이한 사건이 그의 주변에서 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정왕후가 왕비에 책봉된지 17년 만에 아들을 낳았고 문정왕후는 숨겨왔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중종 3817일 밤 궐에서 불이 났다. 세자를 노리고 지른 불이었지만 그들은 세자를 제거하지 못하였고 세자를 교체하지도 못하였다. 중종이 기대했던 만큼 오래 살아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세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가 제 12대 임금 인종이다. 그는 자신의 계모 문정왕후를 효성으로 대했고 이복동생 경원대군을 우애로 대했다. 한편 그는 부왕이 죽고 난후 금식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병에 걸려 결국 31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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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을사사화

인종이 죽고나자 대위는 동생인 경원대군에게로 넘어왔고 그는 12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으며 그가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이다. 그녀는 대윤을 제거하려 하였고 결국 그의 친인척, 벗들, 종들을 데려와 고문을 당하였다. 그들의 진술이 거짓이든 진실이든과 상관없이 사건은 구체성을 띄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의 가족들은 노비가 되거나 유배되었다. 그렇게 문정왕후는 승리하였다. 세자 나이 스무살에 낳은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10년의 정적이었던 대윤세력을 일망타진해 버렸다.

 

3장 문정왕후의 시대

문정왕후는 정치 투쟁에 능하였으며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인수대비만큼이나 사서, 경전을 두루 읽었으며 때문에 당대의 석학인 대신들과 마주하고도 논리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명종 8년 명종의 나이가 스물이 되었는데도 수렴청정은 계속되고 있었고 그 해 7월 그녀는 명종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물러났다. 물러났어도 그녀는 여전히 막강하였다. 명종 203월 대비가 병에 걸렸고 4665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4장 명종의 길은?

그는 대군시절인 열 살무렵부터 보디가드들과 함께하였다. 그는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것을 잘하였고 친정을 하게된 이후에도 여전히 절제를 하면서 살아갔다. 한편 문정왕후 시절 20년 가까이 최고 실세를 군림해온 윤원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뇌물을 많이 받았으며 그로인해 재산이 많았다. 그는 최고의 권력을 누렸지만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 시작된 탄핵으로 자살을 하였다. 명종은 부인 심씨와 하나의 아들을 두었을 뿐 후궁으로부터도 아들을 얻지 못하였다. 세자에 책봉되고 혼례까지 치른 하나뿐인 아들 순회세자는 열세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고 감정을 잘 절제하던 명종도 이것만은 참을 수 없었는지 과음을 하거나 작은일에도 성을 내기 시작하였다. 한편 왕위는 덕흥군의 세 아들중 막내아들인 하성군이 물려받는 것으로 확정이 되었고 그는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5장 시대의 표상들

한편 이 시대엔 임꺽정이라는 도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힘들게 잡는것에 성공하였다.

 

느낀 점: 재미있었지만 5장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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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조선왕조실록 07

by 김정인 posted Jan 2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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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7.연산군일기 절대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 2014.1.22. 김정인

 

1장 대간권력VS연산

빡빡한 군주수업을 경험했던 성종은 세자 교육을 느슨하게 시켰다. 세자시절의 연산은 문제아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모범생도 아니였다. 그는 크면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알게 되었고 충격을 받았다. 한편 그는 그의 아버지가 신하들한테 휘둘리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안되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신하들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신하들은 사직서를 내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그들의 의견대로 해주었다가 안들어주었다를 반복하여 연산 즉위 후 4년까지 사직 복직이 몇 달에 한번씩 이루어졌다. 이 때 신하들은 11일 동안 연속으로 합사하여 반대하는 기록도 남겼다.

 

2장 무오사화와 왕권의 회복

성종의 3년상이 끝나자 그는 폐비 윤씨의 이장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시의적절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 줄도 알았고 경연에 빠지는 날이 많기는 했지만 세조처럼 아주 폐하지는 않았다. 그는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을 가진 유능한 군주가 될 것처럼 보였다.

 

3장 평온속의 불안

취향에 관하여 연산은 성종과 많이 닮았짐나 다른 것이 있었으나 연산은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싶은 것은 다 했다는 것이다. 연산은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것을 매우싫어하였고 그래서 궁궐 주변의 민가는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다. 연산의 이런 행동은 많은 무성한 소문들을 낳았다. 또한 그는 물건을 마구 낭비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지켜보던 대신들은 상소문을 올렸다. 연산 99개월 그는 술자리에서 실수한 것을 빌미로 이세좌에게 벌을 내렸다. 하지만 모두 그것이 그것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세좌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간 사람이었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연산의 복수는 점점 더 심해져 갔고 성종의 후궁을 죽이는데 까지 이르렀다. 그는 윤씨를 죽이는데 관여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피바람이 불기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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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03 11:23
    간단, 명료하게 쓴 글을 읽으며, 촌철살인의 화음님이 떠오르는걸~^*^ 후후~~~ 밝고 미소띤 너의 얼굴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건강하고 예쁘게 멋진 아가씨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주어서 고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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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조선왕조실록 06

by 김정인 posted Jan 2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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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 박시백의 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6. 예종. 성종실록, 대신권력에서 대간권력으로 2014.1.21. 김정인

 

1장 짧았던 예종의 치세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면서 급부상한 종친과 무장세력들, 즉 신공신들은 세조가 시존에 있던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키운 것으로 핵심인물로는 영의정인 구성준 이준과 병조판서 남이가 있었다. 구성군 이준은 겸손하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남이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미움을 받고 있었다. 결국 예종은 그를 좌천시켰고 그는 성급히 측근을 조작하려다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예종은 세조의 차남으로 형인 의경세자가 스무살에 나이로 요절하면서 세자가 되었으며 조용한 성품과 신중한 판단으로 대신들을 만족스럽게 하였다. 그러나 그 기대는 금방깨졌다. 강경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세자시절부터 여러번 앓아온 그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그는 1128일 재위한지 14개월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2장 대신권력의 시대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은 겨우 네 살이었고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의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이 되게 되었다. 그가 원자와 형을 제치고 후계자가 된 이유는 그가 한병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막강한 후원자인 대비가 셋씩이나 있었고 그 중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공을 늘 손자에게 돌렸고 과는 자신이 떠맡으며 손자를 위했다. 한편 성종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모든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타고난 자질에 각고의 노력이 더해지니 성종의 군주수업은 가속도가 붙었다.

 

3장 왕권을 되찾다

성종은 스무살이 되었고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중단하는 언문교지를 내렸다. 62개월에 걸친 수렴청정은 무리없이 잘 마무리한 정희왕후는 7년을 더 살고 6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성종은 그녀를 최상의 예우로 장사지냈다. 군주수업은 애초의 의도대로 성종을 도학군주로 만들어냈다. 그는 그림애호가였으며 매도 좋아하였다. 하지만 그는 유학자들의 반대로 취미활동을 즐기지 못하였다. 그는 비판을 받으면 언제나 그 비판을 받아들였는데 모범생이여만 된다는 강박증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한편 후계자에서 밀려난 월산대군돠 제안대군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잘 지냈는데 왕자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죄를 덮어쓰고 화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4장 다시 온 태평성대

성종의 시대는 조선왕조 최고의 태평성대로 평가된다. 그는 신념이 투철한 유학자였고 신하들을 아꼈기 때문이다. 규모있는 외침도 내부반란도 없었다. 그는 세종을 여러모로 닮았지만 군사분야에서는 허점을 보였다.

 

느낀 점: 성종는 참 책임감이 투철한 왕인 것 같다. 책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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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조선왕조실록 03

by 김정인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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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 박시백의 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3. 태종실록, 왕권을 세우다 2014.1.16. 김정인

 

1장 전설이 된 태상왕

태종 이방원은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물리치고 서른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정치가이다. 그에게도 문제가 있었는데 왕이 되는 과정이 충효를 앞세우는 유교국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태조를 자주 찾아가 문안인사도 드리고 잔치를 베풀어 드렸다. 한편 태조는 태상왕이란 그럴듯한 존호를 받았지만 허수아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가 개경으로 바뀌었고 그의 슬픔은 점점 깊어져갔다. 그는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태상왕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하룻밤사이 군사들이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는 아들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태종은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수도는 다시 한양으로 옮겨졌고 그로부터 6년 뒤 1408514일 그는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무덤은 함흥의 흙과 억새로 덮였다.

 

2장 사냥이 끝난 후

태종은 신하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신하들을 잘 다루었다. 한편 태종에게는 원경왕후 민 씨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이방원을 왕을 되게 만든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모든 것을 걸었지만 남편은 왕이 된 후 바람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태종이 그녀의 친정인 민 씨 가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왕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하였고 세자와 신하들이 나서서 막았다. 그 소동이 끝난 후 태종은 민 씨 가에게 잘 대해주기 시작하였다.

 

3장 공신의 운명

그는 신하들이 민 씨가의 힘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민 씨 가에게 왕자들을 제거하려하였다는 죄목으로 그들에게 벌을 내렸다. 처음에는 가벼운 처벌이었지만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알게 모르게 처벌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는 결국 민 씨 가를 몰락시키는 것에 성공하였다. 왕비도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것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결국 민 씨 가문 사람들은 다 죽었고 그 후에야 태조는 안심하였다.

 

4장 현실주의자 태종의 개혁

태종은 사냥을 좋아하였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은 단 하루도 참지 못하였지만 권력과 관련된 일은 몇 년이고 내색을 인할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양면적인 얼굴을 보여준 이유는 그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5장 양녕과 충녕

양녕대군은 세자였지만 공부하기를 싫어하였다. 태종은 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엇나가기 시작하였고 여자와 사냥을 좋아하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간접적으로 그에게 처벌을 내렸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태종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그 중 셋째인 충녕은 어려서부터 영특한데다 공부를 좋아했다. 결국 세자의 일탈행동이 점점 심해지자 왕은 참다못해 세자를 충녕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 후 2개월 뒤 1418810일 충녕대군한테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느낀 점: 2권에 비해 재미있어서 좋았고 충녕대군이 세종대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녕대군이 불쌍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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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조선왕조실록02

by 김정인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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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그린 박시백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2. 태조. 정종 실록, 정도전의 개혁과 왕자의 난 2014.1.15. 김정인

 

1장 개국과 역성의 세월

이성계는 왕이 되었다. 하지만 민심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고 그는 조심스럽게 처신함과 동시에 신속하고 빈틈없게 권력 인수과정을 밟았다. 또한 반란을 대비해 왕 씨들을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 살게 하였다. 그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고 예전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풀어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정도전은 그들을 은밀하게 죽이려 하였고 결국 8명이 죽고 말았다. 한편 그는 개국 공신을 한 사람들을 뽑았고 포상을 주었다. 그한테는 아내가 둘이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신의왕후로 불리는 한 씨로 62녀를 두었고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둘째 부인은 신덕왕후 강 씨로 21녀를 낳았다. 강 씨는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랐고 결국 둘째 아들인 방석을 왕으로 세우는 것에 성공하였다. 모두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였지만 한 씨의 다섯째 아들 방원은 유력한 세자 후보였기에 좋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한편, 왕 씨들을 모두 처단하기로 투표로 결정이 났고 그들은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말을 듣고 배에 탔다 죽고 말았다. 요행히 살아남은 왕 씨들은 성을 바꾸고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2장 새 술은 새 부대에

태조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았으며 우유부단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 빚어진 것이 바로 한양천도이다. 그는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하였고 모든 일이 착착 맞춰서 진행되었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왕 씨들의 혼령이 가득한 개경을 하루빨리 뜨고 싶어 했다. 궁궐은 1년 만에 다 지어졌고 정도전은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 정도전은 나라를 세운 것은 태조가 아닌 자신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임금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고 나라의 중요한 일들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한편 이방원은 희망을 가지고 불만세력들과 접촉해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3장 변수 홍무제

조선과 명나라긴 외교 갈등이 생겼고 명나라에서는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을 보내라고 하였다. 태조는 믿음직한 방원을 명나라로 보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명나라 왕인 홍무제는 그에서 매우 잘 대해 주었다. 환대를 받으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신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명나라는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정도전을 데려오라 하였다. 때마침 강 씨는 세상을 떠났고 세자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한편 명나라는 정도전을 막 대하고 이방원을 계속 잘 대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계속 도전을 감싸주었다.

 

4장 왕자의 난

방원은 반란을 일으켰고 정도전을 죽이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성공하였다. 방석, 방번도 죽게 되었다. 결국 태조는 하룻밤 사이에 너무도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5장 임시군주 정종

난이 있은 후 여드레 만에 태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방원은 자신이 왕이 되지 않고 방과를 왕으로 내세웠다. 그는 아우의 눈치를 보며 왕 자리를 지켰다. 방원이 왕이 되지 않은 이유는 쿠데타시 내세운 명분 때문이었다. 22개월 후 그는 세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느낀 점: 방원이 세자가 됐더라면 저런 일이 안 일어났어도 됐을 것 같아서 아쉬웠고 태조가 왠지 불쌍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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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by 김정인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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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내 아이를 해치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안병수 2014.1.10. 김정인

 

20세기의 걸작? 라면

라면은 일본인이 개발되어 우리나라로 수출된 것으로 1인당 연간 소비량 80여개 연간 총생산량 약 40억 개로 우리나라가공식품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스턴트라면 산업은 이미 라면 종주국인 일본인들을 크게 앞질렀다. 이런 라면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전문가들은 라면의 주 구성 원료인 흰 밀가루와 첨가물에 있다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라면을 먹으면 여러 가지의 첨가물을 한꺼번에 섭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이라도 라면을 3주간 계속 먹게 되면 뇌와 정신에 문제 생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라면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표면적인 폐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양의 탈을 쓴 이리,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 받는 기호식품이다. 아이스크림은 인기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아이스크림의 원료를 살펴보자면 주원료는 당류와 지방, 물이다. 이 원료의 좋고 나쁨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가져야 되는 의문은 어떻게 물과 기름을 섞는다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회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유화제를 사용한다. 아이스크림은 사실 첨가물 덩어리 이다. 맛을 내기 위한 향료, 먹음직스럽게 하기 위해 들어가는 색소 등 여러 가지의 첨가물들이 아이스크림에 들어간다. 요즘 아이스크림이 유제품으로 분류된다고 해서 몸에 좋은 식품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양의 탈은 쓴 이리와 같다.

 

포텐거의 고양이

지금으로부터 양 50여 년 전, 내과 의사 프랜시스 포텐거 박사는 고양이를 2개조로 나누어 실험을 했다. 한 쪽 고양이에게는 정상적인 사료를 주었고 다른 한쪽에게는 영양적으로 다소 결함이 있는 사료를 주었다. 정상적인 사료를 먹고자란 고양이들은 2, 3대 그 이후까지도 건강에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결함이 있는 사료를 먹은 고양이들은 2대에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대에 이르자 건강문제는 더욱 심해졌다. 신체적 장애와 함께 정신적 장애도 함께 나타났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4대째에 나타났다. 영양문제가 건강은 물론 생식에까지 지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실험은 음식물이 건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동물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똑같은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생활을 건강히 해야 한다.

 

인공조미료, 그것은 퇴보다

일본 도쿄대학의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는 음식 맛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는 어느 날 두부 국에 다시마를 넣었을 때와 안 넣었을 때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마에 어느 특수한 성분이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고 그 성분을 추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바로 MSG이다. MSG는 아무리 요리를 못하는 사람도 맛있는 국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MSG시장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천연 양념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 후 새로운 맛을 찾는 인간의 노력은 멈추었다.

 

느낀 점: 요리수업때 배운 MSG에 대한 정보가 이 책에 나와서 더욱 자세히 알게 되어서 좋았고 앞으로는 가공식품을 안 먹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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