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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

by 류재현 posted Feb 0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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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 2014.2.1 유재현

제1장 기대를 뒤로하고

인종은 태어나자 친모가 죽고 궐 밖에 재상가에서 키워졌다. 그리고 여섯 살의 나이의 세자로 책봉되어 궁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왕위의 올렀더. 이가 조선의 12대 임금 인종이다. 인종은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지세며 부왕을 간호하였다. 그리고 부왕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였다. 그리고 인종은 증종사후 두어달간 미음만 먹고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종은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하면서 하루 다섯 차례의 곡립을 직접 행하는 등 상례를 모두 챙기는 왕 이였다. 그래서 신하들은 약과 고기반찬을 드셔야한다고 간곡하였고, 왕은 거절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은 청하고 왕은 거절하고를 5개월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니 체력이 떨어지고 허약한 몸에 병이 찾아 왔다. 그리고 병세는 점점 악화 되었고, 인종은 생을 마감하였다.

제2장 을사사회

인종이 죽고 대위는 동생인 경원대군에게로 넘어왔다. 문정왕후의 소생으로 조선의 제13대 임금 명종이다. 즉위할 때 나이는 겨우 열두 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았다. 명종이 즉위를 하였지만, 거의 모든 결정은 수렴청정인 문종왕후가 하였다. 윤원로를 유배를 보내고 많은 대신,대간들을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대윤을 몰락 시켰다. 정희,정욱,나식 등은 유배되었고, 윤임,유관,유인숙,이덕응은 3일동안 효수되었다. 그들의 아내,첩,나이어린 아들들은 노비로 전략했으며, 형,아우,숙부,조카들은 유배되었다.

제3장 문정왕후의 시대

문정왕후는 피바람을 불어 이르켯다. 유관이 역모를 꾸밀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 사람은 현장에서 맞아 죽었고, 권벌은 삭탈관직 되었다. 다시 명종 2년 3월에는 이중열,성자택,김저가 사사된다. 그리고 명종3년 작은 옥사가 있었는데, 사초를 거두어 보니 난감 해졌다. 그래서 문정왕후는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렇게 문종왕후는 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명종20년 2월 문종왕후는 병에 걸리고 결국에는 생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문종왕후는 욕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그리고 서울에 묻히지도 못하였다.

제4장 명종의 길은?

대군 시절 명종은 주변의 건장한 보디가드와 함께 다녀야 했다. 한밤중에 잠자리가 바뀐적도 많았다. 하지만 명종은 어린나이에도 알고 있었다. 명종은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도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것은 어느덧 습관이 되었다. 열두살의 대위에 올랐지만, 강력한 어머니의 수렴청정으로, 여전히 조심하고 절제해야했다. 그렇게 8년이 지나고 명종은 성인이 되어서 진정한 왕이 되었지만, 명종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모후때문이 아니라, 노회하고 강성한 대신들, 입을 열면 청산유수인 대간들 때문이였다. 최고 권력자는 임금이지만, 그보다 대간,대신들이 힘이 더 많았다. 그리고 명종 22년 6월 명종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성군이 뒤를 이으니 이가 바로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이다.

제5장 시대의 표상들

개국 이래 계속된 공신 책봉과 권세를 가진 자들의 탐욕으로 토지 소유의 양극화는 계속 심화되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질수록 고을 수량들의 횡포는 심해져 간다. 백성들의 재산을 모두다 자신이 가져가고, 사냥을해서 호피를 바쳐야하는데 사냥을 해서 얻은 호피는 자신일 쓰고 백성들한테 돈을 받아서 호피를 사서 바친다. 명주나 칠,왕골 같은 공물도 마찬가지 였다. 그리고 히없는 사람을 군대에 배속시키고, 미리 뇌물을 쓴 사람은 관속에 소속시켜 허드렛일을 맡기니, 고을에는 뇌물이 넘쳐 났다. 그렇게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워져 갔다.

느낀점:문정왕후는 연산군이랑 비슷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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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조선왕조실록 07

by 김정인 posted Jan 2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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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7.연산군일기 절대권력을 향한 위험한 질주 2014.1.22. 김정인

 

1장 대간권력VS연산

빡빡한 군주수업을 경험했던 성종은 세자 교육을 느슨하게 시켰다. 세자시절의 연산은 문제아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모범생도 아니였다. 그는 크면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알게 되었고 충격을 받았다. 한편 그는 그의 아버지가 신하들한테 휘둘리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그렇게 안되리라 결심하였다. 그는 신하들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신하들은 사직서를 내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그들의 의견대로 해주었다가 안들어주었다를 반복하여 연산 즉위 후 4년까지 사직 복직이 몇 달에 한번씩 이루어졌다. 이 때 신하들은 11일 동안 연속으로 합사하여 반대하는 기록도 남겼다.

 

2장 무오사화와 왕권의 회복

성종의 3년상이 끝나자 그는 폐비 윤씨의 이장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시의적절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 줄도 알았고 경연에 빠지는 날이 많기는 했지만 세조처럼 아주 폐하지는 않았다. 그는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을 가진 유능한 군주가 될 것처럼 보였다.

 

3장 평온속의 불안

취향에 관하여 연산은 성종과 많이 닮았짐나 다른 것이 있었으나 연산은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싶은 것은 다 했다는 것이다. 연산은 자신의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것을 매우싫어하였고 그래서 궁궐 주변의 민가는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다. 연산의 이런 행동은 많은 무성한 소문들을 낳았다. 또한 그는 물건을 마구 낭비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지켜보던 대신들은 상소문을 올렸다. 연산 99개월 그는 술자리에서 실수한 것을 빌미로 이세좌에게 벌을 내렸다. 하지만 모두 그것이 그것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세좌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간 사람이었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연산의 복수는 점점 더 심해져 갔고 성종의 후궁을 죽이는데 까지 이르렀다. 그는 윤씨를 죽이는데 관여한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하였고 그렇게 피바람이 불기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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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03 11:23
    간단, 명료하게 쓴 글을 읽으며, 촌철살인의 화음님이 떠오르는걸~^*^ 후후~~~ 밝고 미소띤 너의 얼굴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건강하고 예쁘게 멋진 아가씨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주어서 고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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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조선왕조실록 06

by 김정인 posted Jan 2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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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 박시백의 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6. 예종. 성종실록, 대신권력에서 대간권력으로 2014.1.21. 김정인

 

1장 짧았던 예종의 치세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면서 급부상한 종친과 무장세력들, 즉 신공신들은 세조가 시존에 있던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키운 것으로 핵심인물로는 영의정인 구성준 이준과 병조판서 남이가 있었다. 구성군 이준은 겸손하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남이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미움을 받고 있었다. 결국 예종은 그를 좌천시켰고 그는 성급히 측근을 조작하려다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예종은 세조의 차남으로 형인 의경세자가 스무살에 나이로 요절하면서 세자가 되었으며 조용한 성품과 신중한 판단으로 대신들을 만족스럽게 하였다. 그러나 그 기대는 금방깨졌다. 강경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세자시절부터 여러번 앓아온 그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그는 1128일 재위한지 14개월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2장 대신권력의 시대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은 겨우 네 살이었고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의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이 되게 되었다. 그가 원자와 형을 제치고 후계자가 된 이유는 그가 한병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막강한 후원자인 대비가 셋씩이나 있었고 그 중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그녀는 공을 늘 손자에게 돌렸고 과는 자신이 떠맡으며 손자를 위했다. 한편 성종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모든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타고난 자질에 각고의 노력이 더해지니 성종의 군주수업은 가속도가 붙었다.

 

3장 왕권을 되찾다

성종은 스무살이 되었고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중단하는 언문교지를 내렸다. 62개월에 걸친 수렴청정은 무리없이 잘 마무리한 정희왕후는 7년을 더 살고 6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성종은 그녀를 최상의 예우로 장사지냈다. 군주수업은 애초의 의도대로 성종을 도학군주로 만들어냈다. 그는 그림애호가였으며 매도 좋아하였다. 하지만 그는 유학자들의 반대로 취미활동을 즐기지 못하였다. 그는 비판을 받으면 언제나 그 비판을 받아들였는데 모범생이여만 된다는 강박증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한편 후계자에서 밀려난 월산대군돠 제안대군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잘 지냈는데 왕자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죄를 덮어쓰고 화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4장 다시 온 태평성대

성종의 시대는 조선왕조 최고의 태평성대로 평가된다. 그는 신념이 투철한 유학자였고 신하들을 아꼈기 때문이다. 규모있는 외침도 내부반란도 없었다. 그는 세종을 여러모로 닮았지만 군사분야에서는 허점을 보였다.

 

느낀 점: 성종는 참 책임감이 투철한 왕인 것 같다. 책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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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조선왕조실록 03

by 김정인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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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 - 박시백의 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3. 태종실록, 왕권을 세우다 2014.1.16. 김정인

 

1장 전설이 된 태상왕

태종 이방원은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물리치고 서른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정치가이다. 그에게도 문제가 있었는데 왕이 되는 과정이 충효를 앞세우는 유교국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태조를 자주 찾아가 문안인사도 드리고 잔치를 베풀어 드렸다. 한편 태조는 태상왕이란 그럴듯한 존호를 받았지만 허수아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가 개경으로 바뀌었고 그의 슬픔은 점점 깊어져갔다. 그는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태상왕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하룻밤사이 군사들이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는 아들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태종은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러는 사이 수도는 다시 한양으로 옮겨졌고 그로부터 6년 뒤 1408514일 그는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의 무덤은 함흥의 흙과 억새로 덮였다.

 

2장 사냥이 끝난 후

태종은 신하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신하들을 잘 다루었다. 한편 태종에게는 원경왕후 민 씨라는 부인이 있었는데 이방원을 왕을 되게 만든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모든 것을 걸었지만 남편은 왕이 된 후 바람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태종이 그녀의 친정인 민 씨 가를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왕자리에서 내려오겠다고 하였고 세자와 신하들이 나서서 막았다. 그 소동이 끝난 후 태종은 민 씨 가에게 잘 대해주기 시작하였다.

 

3장 공신의 운명

그는 신하들이 민 씨가의 힘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민 씨 가에게 왕자들을 제거하려하였다는 죄목으로 그들에게 벌을 내렸다. 처음에는 가벼운 처벌이었지만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알게 모르게 처벌의 강도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그는 결국 민 씨 가를 몰락시키는 것에 성공하였다. 왕비도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다는 것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결국 민 씨 가문 사람들은 다 죽었고 그 후에야 태조는 안심하였다.

 

4장 현실주의자 태종의 개혁

태종은 사냥을 좋아하였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은 단 하루도 참지 못하였지만 권력과 관련된 일은 몇 년이고 내색을 인할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양면적인 얼굴을 보여준 이유는 그가 철저한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5장 양녕과 충녕

양녕대군은 세자였지만 공부하기를 싫어하였다. 태종은 그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엇나가기 시작하였고 여자와 사냥을 좋아하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간접적으로 그에게 처벌을 내렸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태종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그 중 셋째인 충녕은 어려서부터 영특한데다 공부를 좋아했다. 결국 세자의 일탈행동이 점점 심해지자 왕은 참다못해 세자를 충녕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 후 2개월 뒤 1418810일 충녕대군한테 왕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느낀 점: 2권에 비해 재미있어서 좋았고 충녕대군이 세종대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녕대군이 불쌍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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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조선왕조실록02

by 김정인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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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그린 박시백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2. 태조. 정종 실록, 정도전의 개혁과 왕자의 난 2014.1.15. 김정인

 

1장 개국과 역성의 세월

이성계는 왕이 되었다. 하지만 민심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고 그는 조심스럽게 처신함과 동시에 신속하고 빈틈없게 권력 인수과정을 밟았다. 또한 반란을 대비해 왕 씨들을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 살게 하였다. 그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고 예전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을 풀어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정도전은 그들을 은밀하게 죽이려 하였고 결국 8명이 죽고 말았다. 한편 그는 개국 공신을 한 사람들을 뽑았고 포상을 주었다. 그한테는 아내가 둘이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신의왕후로 불리는 한 씨로 62녀를 두었고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둘째 부인은 신덕왕후 강 씨로 21녀를 낳았다. 강 씨는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랐고 결국 둘째 아들인 방석을 왕으로 세우는 것에 성공하였다. 모두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였지만 한 씨의 다섯째 아들 방원은 유력한 세자 후보였기에 좋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한편, 왕 씨들을 모두 처단하기로 투표로 결정이 났고 그들은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말을 듣고 배에 탔다 죽고 말았다. 요행히 살아남은 왕 씨들은 성을 바꾸고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2장 새 술은 새 부대에

태조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았으며 우유부단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해서 빚어진 것이 바로 한양천도이다. 그는 궁궐을 짓는 공사를 시작하였고 모든 일이 착착 맞춰서 진행되었다. 그는 억울하게 죽은 왕 씨들의 혼령이 가득한 개경을 하루빨리 뜨고 싶어 했다. 궁궐은 1년 만에 다 지어졌고 정도전은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 정도전은 나라를 세운 것은 태조가 아닌 자신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임금의 각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고 나라의 중요한 일들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었다. 한편 이방원은 희망을 가지고 불만세력들과 접촉해 힘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3장 변수 홍무제

조선과 명나라긴 외교 갈등이 생겼고 명나라에서는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을 보내라고 하였다. 태조는 믿음직한 방원을 명나라로 보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명나라 왕인 홍무제는 그에서 매우 잘 대해 주었다. 환대를 받으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신료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명나라는 시비를 걸기 시작했고 정도전을 데려오라 하였다. 때마침 강 씨는 세상을 떠났고 세자는 점점 위태로워졌다. 한편 명나라는 정도전을 막 대하고 이방원을 계속 잘 대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계속 도전을 감싸주었다.

 

4장 왕자의 난

방원은 반란을 일으켰고 정도전을 죽이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성공하였다. 방석, 방번도 죽게 되었다. 결국 태조는 하룻밤 사이에 너무도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5장 임시군주 정종

난이 있은 후 여드레 만에 태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었다. 그런데 방원은 자신이 왕이 되지 않고 방과를 왕으로 내세웠다. 그는 아우의 눈치를 보며 왕 자리를 지켰다. 방원이 왕이 되지 않은 이유는 쿠데타시 내세운 명분 때문이었다. 22개월 후 그는 세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느낀 점: 방원이 세자가 됐더라면 저런 일이 안 일어났어도 됐을 것 같아서 아쉬웠고 태조가 왠지 불쌍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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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by 김정인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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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내 아이를 해치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안병수 2014.1.10. 김정인

 

20세기의 걸작? 라면

라면은 일본인이 개발되어 우리나라로 수출된 것으로 1인당 연간 소비량 80여개 연간 총생산량 약 40억 개로 우리나라가공식품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인스턴트라면 산업은 이미 라면 종주국인 일본인들을 크게 앞질렀다. 이런 라면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전문가들은 라면의 주 구성 원료인 흰 밀가루와 첨가물에 있다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라면을 먹으면 여러 가지의 첨가물을 한꺼번에 섭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이라도 라면을 3주간 계속 먹게 되면 뇌와 정신에 문제 생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라면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표면적인 폐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양의 탈을 쓴 이리,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랑 받는 기호식품이다. 아이스크림은 인기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아이스크림의 원료를 살펴보자면 주원료는 당류와 지방, 물이다. 이 원료의 좋고 나쁨을 생각하기 전에 우리가 가져야 되는 의문은 어떻게 물과 기름을 섞는다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회사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유화제를 사용한다. 아이스크림은 사실 첨가물 덩어리 이다. 맛을 내기 위한 향료, 먹음직스럽게 하기 위해 들어가는 색소 등 여러 가지의 첨가물들이 아이스크림에 들어간다. 요즘 아이스크림이 유제품으로 분류된다고 해서 몸에 좋은 식품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양의 탈은 쓴 이리와 같다.

 

포텐거의 고양이

지금으로부터 양 50여 년 전, 내과 의사 프랜시스 포텐거 박사는 고양이를 2개조로 나누어 실험을 했다. 한 쪽 고양이에게는 정상적인 사료를 주었고 다른 한쪽에게는 영양적으로 다소 결함이 있는 사료를 주었다. 정상적인 사료를 먹고자란 고양이들은 2, 3대 그 이후까지도 건강에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결함이 있는 사료를 먹은 고양이들은 2대에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대에 이르자 건강문제는 더욱 심해졌다. 신체적 장애와 함께 정신적 장애도 함께 나타났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4대째에 나타났다. 영양문제가 건강은 물론 생식에까지 지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실험은 음식물이 건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동물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똑같은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식생활을 건강히 해야 한다.

 

인공조미료, 그것은 퇴보다

일본 도쿄대학의 이케다 기쿠나에 교수는 음식 맛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는 어느 날 두부 국에 다시마를 넣었을 때와 안 넣었을 때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마에 어느 특수한 성분이 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고 그 성분을 추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것은 바로 MSG이다. MSG는 아무리 요리를 못하는 사람도 맛있는 국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MSG시장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천연 양념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 후 새로운 맛을 찾는 인간의 노력은 멈추었다.

 

느낀 점: 요리수업때 배운 MSG에 대한 정보가 이 책에 나와서 더욱 자세히 알게 되어서 좋았고 앞으로는 가공식품을 안 먹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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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중종실록 (조선왕조실록8권)

by 류재현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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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8 2014.1.24. 유재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장 공신천하

백성들에게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연산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위에 올른 것 이다. 연산의 폭정에 고통받았던 사대부와 백성들은 희망에 들떴고, 반정의 주역들은 자신들이 담담해야할 시대적과제가 무엇인지 알았다. 무오사화로 죄입거나 연좌된이들을 석방조치 시켜주고, 홍문관 사간원이 복구되고, 연산 전용 동물원이 해체되었으며, 서총대도 철거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못지 않게 중요한 개혁과제는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바로 연산의 협력자들의 대한 청산 작업이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전국 공신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공신들중엔 연산의 총신들도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극형을 주장하였고, 중종은 반대하였다. 그것을 반복하다가 결국 몇몇을 극형에 처하고 유배를 보냈다.

2장 조광조의 개혁

문과 급제자중 조광조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석 달 뒤 사간원 정원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틀 뒤 정6품 새내기 대간 조광조가 아뢰길 사헌부와 사간원을 파직하자는 것이였다. 그래서 중종은 생각을 하다가 대간을 전원 교체하였다. 그래서 대간들 사이에 또 전해가 갈라져 시끄러웠다. 이번엔 조광조를 지지한 이장곤 등이 교체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왕은 조광조를 따르기 시작했고, 대간들도 조광조지지 세력으로 변모해갔다. 그리고 성균원의 유생들도 조광조처럼 되기를 원하면서 조광조를 따랐다. 그래서 조광조가 소학을 보급해야한다고 하니 소학 보급운동을 펼쳤으며 항약 보급에도 힘 썻다.

3장 조광조의 몰락

신하들은 임금에게 연산의 총신이였던 66여명의 공신들을 개정하기를 바랬고 의견을 냈다. 그러자 조광조도 나섰고, 성균관 유생들도 동참하였다. 그러자 왕은 동의 하였다. 그리고 그날 왕은 생각하였다. 70여명의 공신을 폐하면 2차 쿠데타가 일어날 위험이 크다고 생각한 왕은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조광조의 힘이 자신의 힘보다 큰다는 것을 느끼고 그날 밤 조광조와 그의 세력들을 옥에 잡아서 넣은다. 그러자 신하들과 성균원 유생들이 반대를 하였다. 그래서 결국엔 조광조등의 4인은 교신을 빼앗고 곤장100대를 쳐서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고, 나머지는 곤장100를 속바치게한다는 것이다(속바침이란 대신 해당한 돈을 바치고 형을 면하는 것 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조광조는 극형에 처한다.

4장 권간들의 시대

조광조가 죽고 이질적인 인물로 급격히 성장하고 있는 인물 이 있으니, 바로 김안로이다. 김안로는 임금의 총애가 커져갔다. 승진도 빨라져서 이조판서의 자리의 오른다. 그리고 남곤이란 사람이 있다. 남곤은 조광조 제거로 악명을 얻었지만 , 그리 원칙 없는 사람이 아니다. 뇌물을 멀리 했고, 차림도 수수했다. 뛰어난 문장 덕에 외교문서를 전담했고 영의정으롯서 국정도 무난하게 이끌었다. 그리고 영의정에 오르고 4년뒤 남곤은 죽었다. 그리고 김안로는 권력이 커졌다. 아무 판서나 가도 김안로는 그중 으뜸이였다. 김안로는 경연,언론,외교,교육,인사,검찰,국방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신하들은 김안로를 없애야 한다고 했지만 실패하고 사약을 받았다.

5장 제자리 39

김안로는 그 자신이 수많은 겸직을 통해 나랏일의 대부분을 주관하기도 했지만, 그의 수족들이 대간에서 궐내까지 포진해 있어서 모든 정보가 다 그에게로 들어왔다. 그는 임금을 능가하는 권력자답게 생활도 초호화판이였다. 집에는 단청을 칠해졌고, 옥수동 강변에 화려한 정자를 지어 날마다 고관대작들을 불러다 잔치를 벌였다. 그러자 웝궐한 대신들은 상황을 파악하고는 김안로 탄핵을 가세했다. 그러자 김안로는 우선 유배조치 되었고, 신하들은 김안로의 탄핵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천하를 다 가진 듯했던 권신중의 권신 김안로도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중종은 39년은 참으로 일관된 39년 이였다. 내내 부지런 했고, 비판에 귀 귀울였으며, 반성과 사과를 인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종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리고 여러 사건이 수없이 많아서 옥사를 시킨 것 도 여러번이여서 옥사의 희생된 이가 연산 때를 능가할 정도였다. 중종은 재위 39년에 이르러 급격히 쇠약해졌다. 그리고 1115일에 세상을 떳다.

느낀점:재미있었다.


지원

조선왕조실록 15 경종영조실록 이지원

by 다솜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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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15 경종영조실록

2014.1.24.이지원

1장 거대한 그늘을 남긴 경종 4

30년동안 세자로 살다 마침내 왕이 된 조선 제 20대 임금 경종은 소론에 의해 왕이 되었다. 경종 1, 경종은 노론의 압박으로 영의군을 세제로 삼고, 경종은 세자가 대소국사를 해야 하겠다 하였고, 신하들이 만류해서 왕은 서서히 명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노론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임금다워졌고, 소론은 집권 세력이 되어 한을 풀고자 했다. 그리고 세제는 경종의 궁녀들과 내관들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것을 알기에 정면 돌파를 하여 승리하였고, 경종에게는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주었지만 세자라는 정치적 지위를 각인시켰다. 그리고 경종 4년에 경종은 눈을 감았다.

2장 신원에서 탕평으로

영조는 보위를 이었고, 다시 핵심 요직들은 노론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노론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방지하려 탕평의 길로 가려했지만 노론은 설득되지 않았고, 다시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영조 4년에 이유익 등은 반역을 하였지만 이광좌와 오명항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3장 탕평에서 신원으로

왕은 탕평을 유지하려 애썼고,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고 하며 자신은 왕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영조는 시종 탕평을 내세우며 노력했지만 민심은 영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소론 준론은 사라졌으며 남은 소론은 보전을 빌어야했다. 그리고 영조는 영조 35년에 정순왕후를 맞이하였다.

4장 영조 52

영조는 유학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며, 제사에도 열성을 보이며 검소를 숭상하며 백성의 어려움을 더는 정치를 위해 애썼다. 그리고 영조는 눈물이 많은 왕이었으며 다혈질의 왕이었지만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그는 신하들을 마음대로 다루었고,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5장 사도세자의 비극

영조가 마흔둘일 때 세자가 태어났다. 세자는 몸집도 컸고, 총명했으며 영조는 세자의 칭찬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세자 수업이 시작되고 세자는 공부보다 무예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점에서 영조는 세자에게 실망하였다. 그럴 때 공부도 싫어하지 않고, 총명한 세손이 태어났고, 영조는 세손을 아끼며 칭찬하였다. 세자가 비행하였고, 역모를 꾸몄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었고, 8일 후 세자는 뒤주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그 뒤로도 경연에 열심이고, 백성도 자주 만났으며 세손에게 여러 차례 다짐 받았다.

느낀 점

재미있었다


지호

조선왕조실록12 지은이-박시백 2013년 1월 23일 유지호

by 고백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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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2 지은이-박시백 2013123일 유지호

 

반정의 주역들은 공신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이괄이라는자가 또 반란을 일으켜 왕은 호남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이괄은 부하들에 의해 목이잘리고 말았다. 후금은 조선을 치려고 제대로 마음을 먹어서 중간에 있는 성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채 어느새 황주까지 내려왔다. 그래서 조정은 강화도로 몸을 피했다. 후금은 그후에는 천천히 내려오면서 협상을 하려했다. 그래서 화친이 이루어졌으나 후금군사들은 철수를 하지 않고 백성을 죽이며 악탈했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어서 일정량의 예물을 상납받고 교역도 이루어지지만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우선시 해서 후금을 잘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금은 다시 쳐들어왔고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결국 포위를 당해서 왕은 삼배구고두(세번 절하고 아호번 조아리는)를 하고 세자를 비롯한인질들도 끌려갔다. 세자에게 청나라 사람들은 툭하면 외교적 현안에 대해 따졌지만 세자는 그럴때마다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 능숙하게 답변했다. 하지만 왕은 자기보다 잘난 세자를 싫어하였고 좋아하는 후궁인 조씨도 세자를 헐뜯자 세자에 대한 경계심까지 품었다. 세자는 결국 인조 232월에 돌아왔는데 왕이 위로를 한다거나 연회를 배푼 기록이 없다. 세자는 두어달뒤에 병에 걸렸다. 왕은 자신을 10년 넘게 봐준 주치의를 보내서 침을 놓게 하지만 세자가 사흘 뒤에 죽고 만다. 그후 왕은 며느리를 죽이고 어린친손자를 둘이나 죽게했다.

 

느낀점-이시대에 백성이 불쌍하다.

  • profile
    맑은 2014.02.01 07:20
    지호야~^^너 덕분에 퀴즈정답 수정했다. 자세히 읽어보니 3페이지 오른쪽 하단에 정확한 질문이 있네~^^ 고맙다~♬
  • ?
    고백 2014.02.02 01:02
    네~ 다행이네요 ㅋㅋㅋ

지호

조선왕조실록11 지은이-박시백 2013년 1월 22일 유지호

by 고백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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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1 지은이-박시백 2013122일 유지호

 

광해군을 낳은 공빈김씨는 산후병으로 죽고 왕은 다른 후궁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왜군이 쳐들어왔을때도 광해군은 공을 많이 세웠다. 이에 선조는 세자를 질투하기 시작한다. 전쟁이 끝나고 인구는 줄어들고 토지는 황폐화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전쟁영웅들이 죽어서 정치판에서 무장들은 힘을 쓰지 못하였다. 그리고 선조는 전쟁직후의 의인왕후가 죽었는데 왕이 51세에 나이로 17세인 중전을 맞는다. 그리고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는다. 소북에 리더인 유영경은 왕이 세자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영창을 세조로 바꾸려다 실패해서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이 되고 유영경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형인 임해군도 죽였다. 광해군은 5형 총사도 수락해서 유생들이 크게 기뻐했다. 어느 한고을에서 공문서 위조범이 반역을 하려했다고 거짓말 한 것을 그대로 조정에 일러 바쳤는데 그래서 왕은 직접 국문장에 나와 조사했고 힘든 고문을 못견딘 사람들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이름들을 계속 불러낸다. 결국 7개월이 지나서야 고문이 끝났고 총 340명이 끌려오고 100여 집안이 파멸했다. 그후 영창대군도 섬에 가둬 놓고서 죽였다. 이어첨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과 함께 폐모를 시키기로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허균은 역모를 꾀한죄로 죽여버렸다. 광해군은 마치 신하들의 바다에 외로이 떠있는 섬같은 존재였다. 손발인 신하들은 끝까지 말을 듣지 않았고 이쯤되면 지쳐 떨어질 만도 했으려만 왕은 마지막까지도 포기 하지 않았다. 광해는 전쟁으로 궁이 타버려서 선조가 창덕궁을 재건했지만 광해 2년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창경궁도 재건하고 경운궁도 리모델링 하였으나 인왕상 아래 새 궁궐을 짓게하고 경덕궁도 짓기를 명하였다. 벼슬을 팔아 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서 광해는 물러나고 인조를 왕으로 세웠다. 폐세자와 폐비는 금방 죽었지만 광해군은 오래 살아 인조 19년에 눈을 감았다.

 

느낌점-광해가 영화에 이병헌처럼 멋있는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지호

조선왕조실록10 지은이-박시백 2013년 1월 21일 유지호

by 고백 posted Jan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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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10 지은이-박시백 2013121일 유지호

 

일본은 히데요시에 의해 전국시대가 끝나고 히데요시는 엄청난 자신감과 수십만의 군대를 가지고 세계정복을 하려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조선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지만 조선은 거절하였다. 그리고 조선은 전쟁준비를 전혀하지 않은 채 임진왜란을 맞았다. 일본은 5만명을 세차례로 나누어 쳐들어오면서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그에 비해 조선군은 오합지졸이었다. 상대는 전혀 되지 않았고 그나마 멀쩡한 장수들도 죽임을 당하고 선조는 위협을 느끼고 부랴부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피난을 간다. 피난길은 100명이 안되는 매우 초라한 행렬이였다. 일본은 상륙 20일만에 서울에 무혈입성해 북진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평양을 뜨면서 김명원에게 임진강 방어를 맡긴다. 하지만 일본군에 꾐에 넘어가 군사가 대거로 죽고 수졸 몇몇만 데리고 귀환한다. 한편 침략 도청에서 비껴난 전라도 병력을 비롯해 충청도,경상도 병력까지 합세한 5만대군이 일본 수군의 맹장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1600명에게 와해 되어버린다. 그러자 선조는 의주로 이동한다. 그런데 파죽지세로 북항하던 일본군이 주춤한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하이킥이 솟아 올라 부푼꿈에 젖어있는 나고야의 히데요시에게 작렬했다. 일본군은 조선에 해군을 계산 자체에 넣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이순신이 나타났다. 이순신은 예전부터 전쟁 대비에 총력을 기울리고 있었다. 조선은 성능 좋은 화포와 단단한 판옥선으로 연이어 일본군을 격파 했다. 그후 학익진과 강력한 박치기를 이용해서 적선 100여척 이상을 깨트리는 등 공을 세웠다. 그러자 육지에서도 의령의 선비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서 승리를 거두었고 곽재우의 모범으로 의병들이 일어나 수천명의 규모를 가진 정규군 처럼되었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고 승려들도 싸움에 동참해서 열심히 싸웠다. 의병들의 맹활약과 이순신의 무적 수군으로 일방적이던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도 원군을 보내지만 적을 얕보고 싸우다 전멸당하고 겁을 먹고 싸우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퇴각을 하였다. 하지만 돌변해서 진주성을 공격했고 열심히 싸웠지만 진주성은 함락당해서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조선은 엉망이 되었다. 죽은 시체가 들판마다 널려있고 농토는 황폐화되고 백성들은 굶주렸다. 게다가 명나라가 참견해서 작전권까지 내주자 관군은 점점 힘을 잃어 갔다. 일본은 물러났다가 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수군에는 원균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순신의 공을 빼앗고 모함을 해서 왕이 이순신을 싫어하게 만들었고 잡아와 고문하고 삭탈 관직 시켰다. 이순신이 없는 수군은 허수아비였다. 수군이 완패를 하고 이순신이 다시 복귀하였다. 남은 판옥선 13척으로 싸우기로 했다 일본수군은 이순신을 잡기위해 300척을 동원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일본군의 300척을 격파했다.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철수를 시작했는데 이때 노량 앞바가에서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다. 싸움은 대승이었지만 이순신이 전사했다.

 

느낀점-지금까지 읽은 조선왕조실록중에 가장 재미있었고 이순신이 정말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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