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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실록7)

by 류재현 posted Jan 2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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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 2014.1.23. 유재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장 대관권력대 연산

성종은 연산군이 세자시절 때 세자 수업을 느슨하게 시켰다. 하지만 연산군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아버지 성종같은 모범생도 아니였다. 특별히 말썽도 일으키진 않았지만, 칭찬받을 만한 행적도 별로 없다. 소리없이 적당히 하루하루를 보냈을 따름이다. 얼굴의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이 걸리는 잔병사례가 잦았다. 엊잿든 특별해 보이지 않는 세자였다. 하지만 연산군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왜냐하면 세자시절의 충격적인 일 때문이였다. 연산군 세자시절 아버지 성종은 대간들에게 별 것도 아닌일에 쩔쩔매며 해명하시다가, 결국엔 두손을 든다. 그런다음에 스트레스로 괴로워 하는 것 이였다. 그리고 연산군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대간들은 성종과 전혀 다른 군주임을 알았다. 그래서 대간들은 연산군을 길들이기로 한다.하지만 실패하였고, 연산군의 의견은 꺽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간들은 단체로 사직서를 쓰고 복직을 시키고를 반복하였다.

2장 무오사회와 왕권의 회복

조정은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대간들이 장악하고 있고, 대신들은 이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한 상황에서 연산군은 대신들을 예로써 대하면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자극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신이 대산의 공격을 받을 때 에는 확실하게 막아주기도 하였다. 그결과 나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다. 연산군은 공부는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적절하게 자기 주장을 펼 줄도 알았다. 경연에 참석하는 날보다 빠지는 날이 훬신 많았는데, 적어도 세조처럼 아주 폐하지는 않았다. 어찌됬든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지닌 연산.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힘은 강화하기 마련인지라, 제법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것처럼 보였다.

3장 평온속의 불안

노사신. 단종 1년에 급제하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성종 말년에 주공격 대상이 되었으니, 연산과 대간이 부딫일 때면 그는 언제나 연산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대간들은 그를 간신이라 불렀지만, 역사에는 간신이라 남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연산은 경연에도 종종나가 경연관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토론에도 적극 임했다. 그리고 연산은 대간들의 대한 문제도 잘 처리하였고, 민생문제도 나름 신경을 써서 백성들은 성종기의 이은 태평성대를 이을 수 있었다. 연산은 부왕인 성종과 많이 닮았다. 시를 좋아했고 그림 애호가였으며 사냥도 좋아했다. 하지만 성종은 대간들의 말을 잘 따랐으며, 연산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했다. 그리고 궐 밖에선 종종 곤장 소리가 들렸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연산은 자신의 엄마인 폐비 윤씨의 죽음을 슬퍼하고 복수를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연산10320일 저녘이였다. 연산은 성종의 후궁인 엄 숙의와 정소용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쳐서 죽였다. 그리고 장검을 빼어든 후 자순대비의 집에 갔다. 그리고 자순대비를 나오라고 했지만 자순대비는 나오지않았다. 그리고 달려온 중전 신씨의 만류에 발걸음을 돌렷다. 그리고 성종때의 후렴청정이였던 대왕대비를 에게 가서 왜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냐고 묻고 나왔다. 그리고 대왕대비는 한달 뒤에 죽었다. 그리고 연산은 대간들과 신하들이 자신을 위험하게 할수 있을 것 이라며 피바람을 불게 하였다. 그리고 절대 왕권을 위해서 피바람이 불었다.

5장 무너진 절대군주

연산은 유교식 견제장치들을 제거해나갔다.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사간원을 폐지하고, 사헌부도 축소 시켜 조사들에 대한 감찰 기능만 남았다. 홍문관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군신간의 구별을 분명히 하는 제도도 계속 강화 하였다. 급기야 하급문신은 물론 대간들에게 까지 가마를 메게 하였다. 강력한 왕권을 누리는 것이 연산의 목표였다. 연산은 사냥이나 야외 나들이를 즐겨했는데, 한번 움직이면 주변의 민가들울 다비워야 했고 급기야 민가들을 다 철거하고 금표를 세워 민간이은 못 들어오게 하고 사냥을 즐겼다. 그리고 날마다 잔치를 열었는데, 기생을 천명으로 늘리고 악공도 천명으로 늘려서 호화찬란한 잔치를 누렸다. 그리고 급기야는 만원정을 헐고 2천명이 앉을 수 있는 초대형 정자도 만들었고, 중소형 연회장도 만들었다. 그리고 후원에다가 동물원을 꾸몄다. 하지만 이동물원은 구경을 위한 것이 아니고 사냥을 위한 것 이였다. 그래서 결국은 군인과 백성들이 모여서 연산군을 쳤다.그렇게 연산군은 죽고 지성대군에게 왕위가 갔다. 그리고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는데 이가 중종이다.

느낀점:처음에는 연산군이 좋은 군주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연산군이 좋은 군주가 아니라는 걸 알아서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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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성종 실록(6권)

by 류재현 posted Jan 2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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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6 2014.1.22. 유재현

실록6

1장 짧았던 여종의 치세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였다. 그리고 예종이 즉위하고 9명의 대신들을 원상에 임명하였다. 원상이란 승정원에 출근하는 재상을 말한다. 세조는 17명을 원상으로 삼아 승정원을 출근캐 했는데 이떄에 이르러 9명으로 축소되고 2명씩나오게 했다. 그리고 신공신이 있었다. 신공신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면서 급부상안 종친들과 무장 세력을 일컫는 말이다. 말련의 구공신들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그것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공신들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로 인해서, 신공신과 구공신간의 세력갈등이 자라나고 있다. 그리고 남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는 역모를 꾀했다가, 관련된 사람들과 남이는 모두 죽었다. 예종은 세조의 차남. 여덞살 때 세자로 채택되어 그때부터 세자수업을 받았다. 그래서 공부 또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왕이 되었다. 그래서 정치를 하는데 세조가 망쳐논 것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예종1년 예종은 죽고 말았다.

2장 대신권력의 시대

예종의 운명소식을 접하고, 다들 곡을 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견예조판서인 신숙주가 나섰다. 그는 주상을 일찍 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왕대비를 찾아갔다. 후계서열 1위인 원자(제안군)의 나이는 겨우 4살이였다. 그래서 위험부담이 너무 커서 후계서열 3위인 자을산군이 후계자가 되었다. 그리고 즉위식이 열렸다. 개국이래 선왕이 죽고나서 후계자가 즉위한 경우는 문종과 단종. 문종은 세종이 죽고 5일 단종은 문종이 죽고 4일 뒤에 즉위식을 가졌으나, 성종은 예종이 죽은 바로 그날 경복궁에서 즉위하였다. 열두 살 단종은 궁에 혼자 남겨졌지만, 열세 살 성종에겐 막강한 후원자인 대비가 셋이나 있었다. 그중 두명은 예종의 후비와 세자빈이고 한명은 그 둘의 시어머니인 대왕대비이다. 대왕대비는 몇 차례 사양 끝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맡게 되었다. 수렴청정은 임금이 미성년일 경우 대비가 최종결정을 하는 것 이였다. 하지만 대왕대비는 공은 늘 손자에게 돌리고, 과는 자신이 떠맡았다.

3장 왕권을 되찾다.

성종은 명석함과 놀라운 성실성으로 일찌감치 군주수업 전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했지만. 조기 졸업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기다렸다. 그래서 해를 더할수록 훈구 댄신들은 하나 둘 사라진 반면 성종은 점점 더 어른이 되어갔다. 이윽고 성종 7, 스무 살이 되었다. 그러자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중단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왕과 원상들, 대간들이 나서서 거듭 만류했지만, 그녀의 결심은 확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성종은 친정을 선언한다. 그래서 대왕대비는 정사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7년뒤 요양차 온천에 갔다가 66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손자 성종은 최고의 예우로 장사 지냈다. 성종은 한명희의 기세를 꺽는 데 성공한 성종은 이어서 원상제를 폐지한다. 그러나 훈구대신들의 힘은 아직도 막강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그들의 힘을 이겨냈다. 그리고 이제 문제 해결을 토론과 자문을 거쳐 결정을 이루어 진다.

4장 다시 온 태평성대

성종은 즉위와 함께 유교의 생활화를 실시하였다. 유교의 전면화, 생활화를 위한 캠페인도 이어졌는데, 대표적인 방식은 모법 사례 발굴과 표창이었다. 성종을 도락군주로 준비시킨 신하들은 생각하였다. 불교 폐지이다. 친정의 시작과 함께 틈나는 대로 불교 폐지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성종은 불교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없애냐며 천천히 없애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비전이 문제였다. 수렴청정 시기인 대왕대비는 신하들의 불교 비판을 어느정도 수용하였다. 그리고 대왕대비가 직접 나서서 불교를 비호하였다. 하지만 성종은 어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신하들의 의견을 무마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성종23년 왕은 결심을 굳힌다. 도첩제를 폐지하고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는 금승법을 통과해 버린 것 이다. 그렇게 불교는 사라졌다.

5장 성종이 남긴 유산

성종4년 성종은 대왕대비의 말의 따라서 윤기견의 딸과 윤호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다. 윤기견의 딸은 가난한 집 의 딸이였는데, 딸 윤씨는 성장환경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 윤씨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고한다. 그녀는 검소하고 예의바르게 생활하여 성종은 물론, 대비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일이 되려니 임신을 하기 시작하고, 마지막 테스트를 삼아 대왕대비가 중전이 될 마음이 없냐고 하였다. 그러자 윤씨는 거절하였다. 그래서 대왕대비는 윤씨를 중전으로 삼았다. 그레서 윤씨는 기쁨의 취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려 버렸다. 대비들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등에 대해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녀는 후궁들을 저주하는 책자를 성종에게 들키고, 독약을 소지하다가 들켰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결국은 중전을 폐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폐비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성종 251225일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있으면 스무살이 되는 세자가 보위를 이으는데 이자가 폐비의 아들이자 성종의 아들인 연산이다.

느낀점: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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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5

by 류재현 posted Jan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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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5 2014.1.21. 유재현

1장 어린 임금과 장성한 대군

조선 제 6대 임금 단종, 여덟 살이 되던해에 세종30년 세손으로 책봉되고, 2년뒤 문종이 즉위하자마자 세자의 책봉되었다. 그리고 이제 열두살이 되던해에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나라의 주인이자 만백성의 어버이인 임금, 더없이 괴귀하고 막중한 자리아니 그에게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새임금이 미성년일 경우 왕실의 큰어른인 대비가 수렵뒤에서 섭정을 하는게 이 시대의 관례 하지만 단종에게는 어머니도 할머니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형식상 결재만 담당했고, 실제 모든 결정은 의정부에서 이루어 졌다.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 그는 문학,역법,풍수,음악,교양 등 모든 것을 두루 같추었다. 이런 그의 자질을 높게 평가한 세종은 여러 일을 맡겼고, 그의 부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2장 계유정난

수양대군은 거사를 준비하기위해 사람들을 모은다. 황수신,이정옥,이정석,이징규 등등 이렇게 차근차근 내심을 다져 가던 수양 측근들과의 상의도 없이 돌연 고명사은사를 자칭해 나간다. 수양이 명나라로 떠날때는 조정 안팍에서 요란한 전송을 받으며 떠났고, 명나라 조정의 환대를 받은 뒤 돌아왔다. 이행차로 수양은 두 가지 중요한 수확이 있었으니, 중국 조정에 얼굴을 알린 것 과 수양의 대한 조정의 의심을 누그러트린 것 이다. 그리고 수양은 단종에게 자신의 처세와 관련된 의견을 담은 상소를 봉해 올린다. 하지만 그 내용은 뻔한 이야기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단종은 크게 반색하였다. 상소가 매우 알맞고 절절하다며 기뻐하는 것 이였다. 그리고 수양은 공신들을 죽였다.

3장 원통한 한 마리 새

공은 세웠으되 공신 책봉에서 제외되었던 종이나 시녀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이 주어졌다. 죽은자들의 재산을 분배해주는 것 인데, 김종서를 철퇴로 내려친 수양의 종 임어을운은 황보인의 집을 받았고, 시녀 내은은 김종서의집을, 종 막봉은 이보인의 집을 시녀 소근은 조극관의 집을, 사헌부에서 공신 책봉의 대한 문제 제기를 하였지만, 가볍게 해결되었다. 이제 권력은 온전히 수양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수양은 온갖 권력을 휘두르며 단종을 괴롭혔다. 하지만 단종은 잘버텨내고 1년뒤에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모든 내신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한달 뒤 단종은 결심을 하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주었다. 곧이어 즉위식이 열렸다. 차남으로 태어난 수양대군(이하 세조)가 마침내 몽매에도 그리던 임금이 되었다.

4장 세조의 치세

세조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겠지만 피바람을 막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세조는 피바람을 막기위해 왕권강화를 실시한다. 즉위 직후 말하기를 6조의 일을 직접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6조 직계제를 반대하였다. 하지만 세조는 실시하라고 했고, 예조 참판이였던 하위지가 물러서지않고 반대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하위지를 참수시켰다. 그리고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정치방식의 불만이 있었고, 문제가 있으면 토론을 하는 정치방식을 없애버리고, 집현전도 폐지시켜 버렸다. 그리고 경연이 있는날 정인지가 말을 잘못했다. 그래서 세조는 정인지를 감옥에 넣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인지를 풀어줬다. 그래서 왕권은 강화가 되었지만, 올바르게 되지는 않았다.

5장 이루지 못한 꿈

민생안정에 대한 세조의 집년, 수령에대한 고소 허용과 윤대 파견 등 지속적 감찰, 이쯤되면 백성들의 생활이 크게 나아졌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왜그럴까? 말련에 세조가 행궁에 가 있을 때일이다. 한 여인이 세조에게 할 말이 있는 듯 싶었다. 그러자 세조는 말을 하라고 하였다. 그는 나계문이란 자의 아내라 하였다. 고을 출신인 홍윤성이 정승이 되자, 유향소에선 선물로 노비를 두 명을 바쳤다. 그런데 홍윤성은 노비들이 튼튼하지 않다며 담담자인 나계문을 불러서 죽을정도로 곤장을 치는가 하면, 그러고도 분이 안풀린 듯 하여 자신이 수십년간 키운 나무를 베어버리고 길거리에서 집단구타를 하여서 죽게 만든 것 이였다. 하지만 관아에서는 홍윤성이 무서워서, 가담자 세명만 구속하였다. 하지만 관아는 그 세명을 탈옥하게 도와주었고, 오히려 윤덕녕과 그의 가족을 구속하였다. 그래서 세조는 관련자를 모두 불러서, 벌을 주고 직전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자신만의 정치방식으로 나라를 이끌었는데, 할아버지 태종과 비슷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공신을 우대하다가 그힘이 너무 커지면 가차없이 죽였고, 세조는 공신만 우대하였다,

느낀점: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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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7

by 명화 posted Jan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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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 대간권력vs연산

왕은 자신의 경험이나 군주가 되기 전의 경험은 새 임금의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린시절 빠각한 군주수업을 경험했던 성종은 여덟살에 들어가는 성균관은 연산은 열두 살에 들어가게 하고 여름에는 조강만 하게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성종의 군주수어 시절에 모범적인 모습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태도는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은 양녕대군 같은 문제아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종 같은 모범생도 아니었다.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칭찬을 받을 만한 행적도 별로 없었다. 다만 얼굴에 종기가 떨어지지 않았고 입안이 헐거나 눈병이 걸리는등 잔병치레도 잦았다. 연산이 즉위하고 얼마 뒤 성종의 묘지문을 읽고 자신의 친 어머니의 존재와 죽음을 알게 되었고 밥을 먹지 않았다. 성종이 죽자 대간들은 연산군을 길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연산군의 과감없는 행동을 보고 대간들은 성종과는 전혀 다른 군주임을 확인했다. 그러자 대간들은 연산 즉위 후 4년까지 매번 사안이 있을 때마다 사직을 하고 다시 복직을 하는등 연산군을 길들이려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2장 무오사화와 왕권의 회복

성종시절에 무오사화를 일으킨 주연급의 유자광은 김종직을 따르는 대간들의 상소로 소인으로 불리며 귀양을 당햇다. 유자광은 김종직을 무척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전에 함양땅에서 갔다가 시를 짓고는 판자에 새겨 학사루에 걸어두었는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왔을 때 헌판을 떼어서 불살라 버렸다. 그러던중 실록청 당상인 이극돈은 사초를 살피다가 자신에 대한 민망한 기록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후배인 김일손한태 수정을 요구했으나 김일손을 거부했고 그러자 이극돈은 김일손이 쓴 세조를 모욕하는 글을 찾아서 유자광과 같이 연산군한태 말하였다. 이일로 김일손이 체포되었고 유자광이 국문을 계속했다. 이일의 연루자들이 많아졌고 국문을 책임지던 유자광은 김일손의 사초에서 중대한 기록을 발견한다. 그것은 조의제문이라는 글로 김종직이 쓴 글인데 유자광이 연산군한태 이것은 불신의 뜻으로 생각하여서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했고 김일손을 격려하거나 정보를 준 이목과 허반을 참수당했다. 이 일로 유자광은 힘을 얻었다

3장 평온속의 불안

성종과 연산군은 취향이 많이 닮았다. 둘다 시를 좋아했고 그림애호가였고 사냥을 좋아했다. 그러나 모범생 콤플랙스가 있는 성종은 대간들의 말을 들어서 시를 쓰지 못하고 심하들의 시를 감상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연산군은 시를 지어올리게도 하고 지어 내리기도 했다. 송정은 좋아하는 매를 기르는 것까지 대간들의 눈치를 봐야 했지만 연산은 매에다가 사냥개까지 마음것 길렀다. 그리고 연산군은 자신이 하는 일을 밖으로 알리지 않게 할려고 궁궐 주변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고 궁궐을 보는 것을 금지했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연산은 1504320일저녁에 성종의 후궁은 엄숙의와 정소용을 몽둥이질 했고 그들의 아들들을 대려와서 몽둥이질을 하게 했다. 그녀들을 계속 그렇게 맞다가 죽었다. 그리고 연산은 장검을 들고서 자신의 계모인 정현왕후의 침소로 가서 정현왕후를 부루다가 중전인 신씨가 말려서 가고 말았다. 그리고 대왕대비전으로 가서 왜 자신의 어머니를 죽였냐고 따지자 한 달뒤에 죽었다. 이것이 갑자사화의 시작이였다. 연산은 어느날 임사홍의 집으로 가서 임사홍한태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이유를 듣는다. 엄숙의와 정소용을 때려 죽인다음날 연산은 곧바로 폐의 추숭을 다시 제기한다. 대간들의 다수는 반대의견을 냈지만 신하들과 의논후 시호는 제헌왕후, 능호는 회릉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세좌와 윤필상등 많은 대신들을 죽였다. 이런 일로 감옥이 모자라서 잡아온 사람들을 바깥에 두었고 날마다 새로운 얼굴이 장대에 걸렸다.

5장 무너진 절대군주

연산은 유교삭 견제장치를 제거해 나갔다. 임금에게 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사간원을 폐지하고 사헝부도 축소하였고 홍문관도 폐지했다. 성균관과 사학의 활동을 정지시켰고 과거도 경전 대신에 울시로 대체했다. 이런일이 계속되자 박원종과 성희안과 신윤무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신수근과 형제들이 죽었고 임시홍도 죽였다. 점점 이 반란의 가담한 사람들은 많아졋고 결국에는 연산군을 패위시켰다.

느낀점: 독서시간에 좀 자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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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2014.02.03 11:14
    명화야~^*^ 대기명당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왕을 넘어서는 수업을 받고 있는 너가 정말 대단하고 위대하게 보인다~!!! 암기하면서 너의 삶의 새로운 장이 열릴거야~! 앞으로 암기의 왕으로 성장하는 너의 모습이 그려지는걸~!!! 짱이다~^*^

정우

조선왕조실록6

by 명화 posted Jan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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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예종,성종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1장 짧았던 예종의 치세

예종이 즉위했을때에는 구공신들과 신공신들이 있었는데 구공신은 전부터 있었던 공신들이고 신공신들은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사람들 이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구성군인 이준과 남이등이 있다. 이 두새력들은 갈등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남이를 좋게 보지 않았는데 구공신들의 힘으로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좌천시켰다. 그러나 유차광의 모함으로 남이는 죽고만다. 그리고 나서는 예종은 강력한 왕권을 만들려고 했지만 족질이 악화되어서 제위한지 14개월만에 죽고 만다. 예종이 죽는 바로 그날 대왕대비의 뜻으로 3순위자인 자을산군이 성종이 되었다.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이 되자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한다. 어린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전에 반란으로 세조를 왕으로 만든 훈구대신들을 구성군을 주시했다. 구성군의 상황이 세조때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성군은 왕권의 욕심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모함으로 강원도로 유배당한다. 성종은 더 좋은 임금으로 성장할려고 하루에 세 번이가 경연을 했다. 시간이 지나서 권력이 있는 훈구대신들은 거의다 죽고 성종은 20살이 되었다. 그러자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성종의 목표는 조선을 완벽한 유교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였다. 그레서 뷸교를 탄압하기도 했다. 그리고 새조때부터 한 경국대전을 완성시킨다. 성종 세종처럼 부지런하고 온화하며 법과 제도와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하였으나 세종처럼 다 잘하지는 못하였다. 성종은 무보다 문을 좀더 중히 여겼으며 그래서 군대가 약해졌으며 왜구의 약탈도 많아졌다. 장수들은 거의다 무능했다. 성종의 후궁인 윤씨는 가난한 집 선비인 윤기견의 딸로 윤기견이 일찍 죽어서 환경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러던중 대비들의 눈에 띄어서 후궁이 되고 연산군을 낳았다. 그러나 국모가 된뒤 대비들한태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고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여자들을 모함하려 하는 사건이 있는등 일이 많아져서 폐비되었고 그러다가 사약을 받아서 죽는다. 성종은 어린때부터 훌륭한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서 대간들의 비판을 무조건 받아들이다가 대간들의 대한 불만이 쌓여가자 대간들의 말을 않듣기 시작했다. 그러던중 성종은 천식이 있엇다가 배꼽 밑에 종기가 생겼는데 그 종기가 점점 악화되다가 1494년 죽는다.

느낀점: 이번 요약은 좀 많이 잘못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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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4

by 명화 posted Jan 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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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와조실록[단종,세조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단종은 조선의 6대임금으로 열두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아직 왕이 어리자 실질적인 권력은 의정부가 가지고 있었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종은 금세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은 책들을 많이 읽고 풍수도 전문가 수준이였고 음악에도 능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진짜 자랑은 무인적 자질이였다. 힘이 쎄서 강궁을 두루었고 활솜씨도 좋았다. 그러나 둘째라는 이유로 왕이 되지 못했다.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은 수양과는 달리 시와 그림에 능했고 당시의 명필이였다. 자존심도 수양처럼 강해서 둘 사이에는 형재에보다는 경쟁의식이 컸다. 자연스럽게 이 둘한태는 사람들이 붙었고 친 수양파과 친 안평파가 생겻다. 그리고 그 합법적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한 대신들이 있었는데 대군들의 힘이 켜져 가자 그들은 수양보다는 덜 위험한 안평의 손을 잡았다. 그러던중 수양대군한태 한명희라는 권력욕이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한명희는 사람들을 모았고 수양의 힘은 더더욱 커져 갔다, 수양대군은 다른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단종한태 국혼을 주장하고 명나라로 사행길을 가는등 역모를 할 마음이 없는 것 쳐럼 만들었다. 그러던중 단종 1년인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정승인 심종서와 아들인 김승규를 죽이고 한명희가 만든 살생부를 따라서 많은 대신들을 죽이고 안평대군과 그의 다들을 강화도로 유배하였다가 죽인다. 숙부인 수양대군이 많은 대신들을 죽이자 단종은 왕위를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조심스럽게 행보를 넓혀나갔다. 조회 참석하고 윤대를 시작했고 경연도 열심히 참석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이키고 며칠후 단종한태 국혼을 주장했다. 단종은 반대했으나 강제로 부인을 맞게 하였다. 단종이 스스로 왕위를 넘길 기미가 보이지 않자 수양대군은 단종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유배보내거나 죽였다. 더 이상 있으면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을 알고 단종은 수양대군한태 왕위를 넘긴다. 그리하여 수양대군은 1455년 세조가 된다. 단종이 폐왕이 되어도 세조는 가끔씩 문안을 오거나 사냥을 같이 갔다. 그러던중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등이 단종을 다시 왕위로 올릴려고 하였다. 이들은1457년 거사를 할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다음날 거사에 동참하기로한 김질의 고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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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2014.01.21 10:54
    반정도가 날아가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빠른시일내 복귀하갰습니다

지호

제목-조선왕조실록9 지은이-박시백 2014년 1월 20일

by 고백 posted Jan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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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조선왕조실록9 지은이-박시백 2014120

 

강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죽었다. 그래서 아기는 궐밖에 재상가에게서 키워졌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왕비에 책봉된지 17년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문정왕후는 바로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왕이 되었는데 이가 바로 인종이다. 그러나 인종은 부왕이 죽고 밥을 전혀 먹지 않고 미음만 간간히 먹었다. 결국 재위 기간 9개월이 채 안되어 죽었다. 그리하여 별탈없이 대위는 경원대군에게로 넘어왔고 이가 바로 명종이다. 그리고 소윤의 핵심 당원들은 세자 편을 들었던 대윤의 신하들을 유베시켰다. 그리고 이에 반대한 신하들에게도 벌을 내렸다. 그리고 유베 시켰다. 이원형은 손에 피를 묻힌김에 반대세력을 모두 제거 했다. 문정왕후는 전치 투쟁에 매우능해서 뛰어난 상황판단 능력과 그에 따른 대응력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까지 갗추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매우 싫어 했다.여러가지 이유도 있고 여자라는 사실도 중요한 일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불교 되살리기 였다. 성균관은 성균관을 비우고 양사는 집단으로 사직을 청했지만 대비는 꿈적도 하지않았다. 그리고 명종이 스무살이 되던해 명종 87월에 정치를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명종은 20년 대비가 병에 걸려 죽었다. 명종은 자신의 권력이 무척 약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싶었다. 명종은 아버지 중종이 썻던 힘이 커진 신하는 다른 신하를 이용해 제거하는 방법을 써 이량이라는 자에게 권력을 주었다. 하지만 권력을 가졌던 원형과 별 차이가 없었기 떄문에 이량도 몰아낸다. 그리고 이원형은 문정 왕후가 죽고나서 권력이 약해지다가 부인인 문정왕후가 죽고 나서 권력이 약해지다가 부인인 정난정이 세상을 떠난후 그도 죽었다. 명종에게는 아들이 있었지만 열세살 때 죽어버려서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후계자는 아버지에 손자인 하성군으로 뽑았다. 이가 바로 선조이다. 개국공신이래 거듭된 공신 책봉과 권세를 가진자에 탐욕으로 백성들은 점점 더 힘들어했다. 수령들은 자신이 뇌물로 바칠것까지 백성들에게서 걷었고 암행어사가 뜨면 수령끼리 알려주었다. 그래서 이때 임꺽정이 등장했고 3년이상 도적질을 하다 체포되어서 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유명한 학자두명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퇴계이황과 남명조식이다. 이들은 완전 정반대였지만 서로에게 존경심을 표했었다. 하지만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하지는 않아서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이황은 선조 3년에 죽고 두해뒤 조식도 그 뒤를 따랐다.


느낀점- 재미있었다.


재현

조선왕조실록4

by 류재현 posted Jan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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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4 2014/1/20/유재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장 임금위에 임금

급작스레 보위에 올른 젊은 임금 세종은 두려웠다. 준비없이 나라를 맡게 되어서가 아니라, 상왕으로 물러앉은 아버지 태종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 앉았지만 권력은 왕보다 많았다. 그리고 세종이 서른이 되기 전 까지는 군사와 정치를 자신이 맡았다. 그리고 태종은 자신의 처가인 민씨가의 이어 아들 세종의 처가인 심씨가 마저 박살내버렸다. 그는 왜 그리 외척에게 가혹했을까? 아무래도 계모인 신덕왕후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버지 태조를 꼬드겨 개국에 공이 큰 전부인의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자신이 낳은 어린 아들을 세자 자리에 앉였던 그녀다. 그녀에 대한 복수도 잊지 않아서, 태종은 신덕왕후 강씨를 태조의 첩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왜구가 조선의 바다에서 들락날락 거리며 약탈을 일삼았다. 그래서 태종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쳤다. 이후100여년간 조선과 중국 해안가에는 왜구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2장 태평성대를 꿈꾸며

태종이 세상을 뜸으로써 세종은 최고 결정권자인 진짜 임금이 되었다. 세종은 소문난 효자일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아버지 태종을 존경하였다. 세종은 세종의 정치스타일이 있다. 아버지의 일생과 결단력은 존경했지만 피냄새나는 정치방식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았던 것 이다. 세종은 어렵고 먼 길을 택했다. 피를 부르지 않고 조용하게, 그러나 뚜벅뚜벅 황소걸음으로 입지를 다져 나갔다. 태종 생존시에 세종은 자기 시대를 끌고 나갈 쌍두마차를 마련했으니, 진현전과 황희다.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있던 기관으로 유명무실한 상태였는데, 세종1년 자의정 박은의 청을 받아드려, 이듬해 본격 발족 시켰다. 세종은 늘 책을 손에서 때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며 토론을 앞세우는 지도자, 끊임없이 생각하여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고 뚝심있게 밀어 붙이는 임금, 그것이 세종이다. 하지만 그가 부족한 것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명나라에게 이기지 못하는 것 이였다. 명나라는 말을 1만필을 보내라고 했는데 세종은 거절하지 못하고 말을 1만필을 보내주고 금은보화를 보내주는 등 명나라만은 이기지 못하였다. 하지만 명나라의 황제가 바뀌면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

3장 백화만발의 시대

세종은 효과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사가 독서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공부 체질이 아닌 학자들에게는 괴로웠겠지만, 공부돌이들에겐 환상적인 환경이였다. 그리고 저술 작업도 본격화 되었다. 조선식 농업기술서가 나오고, 의원들과 집현전 공동으로 항약집성방이 현찬되고, 뒤에 동양 최대의 의학 백과사전으로 평가 받는 의방유취가 편찬되었다. 그리고 백성교육을 위해 삼강행실도를 퍼냈고, 급기야 훈밍정음을 창제하기에 이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종은 쉽지않은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결심에 선 세종은 두 가지 방향으로 독자역법계획을 진행시켰다. 양 팀의 협력으로 간의,규표,혼천의 등 천문 관측기구가 만들어져서 설치되었다. 그리고 일정성시의 란 천채관측 기구도 만들어 졌으며, 앙구일부를 시작으로 해시계도 만들어 졌다. 강물을 쟤는 수표 바람의 방향을 살피는 풍향계 등도 설치되어 기상 변화를 다양한 측면에서 ㅈㅇ합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기분야에도 많은 진보가 있었다. 더 튼튼하고 더 빠르고 수명이 긴 병선을 제조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고, 특히 화포에 대한 세종의 관심은 재대하여 귾임없이 실험하고 개량을 독려했다. 그리고 북방을 개척하여 영토를 넓였다.

4장 명군을 도운 명신들

황희 정승, 세종시절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 무혀24년간 정승으로 있었고, 이 중 19년간 영의정에 있었다. 황희하면 떠올르는 것은 온화, 청렴, 두루뭉술 이다. 그래서 인지 세종은 황희를 잘 챙겼다. 개간 작업을 추진한 공을 내새워 개간한 땅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가 하면, 교하 수령에세 땅을 받는 대가로 그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비난을 사기도 하였다. 그리고 황희는 사직서를 냈다. 세종은 말렸지만, 영의 정을 물러났다. 그래서 황희는 여든일곱에 영의정에 물러나고 아흔 살에 눈을 감았다.

5장 준비된 임금 문종

세종이 문종을 세자로 책봉한 날은 문종이 8살 때였다, 세자 나이 열둘에 중국 사신들을 위한 하마연을 주관하였다. 세종은 의젓하고 총명한 큰아들이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세자는 아버지의 성품을 이받아 신중하고 차분하고 끈기 있는 세자였다. 성년이된 세자는 근사한 수염에 기품있는 얼굴, 아버지를 닯아 살찐 모습이였다. 세자로 있은지 무려 30, 스물이 넘어서 부터는 세종 곁에서 실무를 배우고, 또 세종을 거들기도 하였다. 타고난 자질, 착실한 세자 수업, 풍부한 행정 경험까지, 문종은 준비된 임금이였다.

느낀점:재미있었다.


정인

(독서록) 조선왕조실록 05

by 김정인 posted Jan 2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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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화전양면술의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5.단종. 세조실록, 반역은 또 다른 반역을 낳고 2014.1.20. 김정인

 

1장 어린 임금과 장성한 대군

조선의 제 6대 임금인 단종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없이 열두 살의 나이로 임금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래서 의정부가 일을 대신 하게 되었지만 곧 그는 대신들의 앵무새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역을 되찾아 갔다. 세종한테는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있었는데 그는 어떤 문사에게도 뒤지지 않을 학문적 소양과 교양 그리고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야심은 문종이 죽은 뒤 점점 커져갔고 그는 자신의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2장 계유정난

그에게는 한명회라는 뜻을 같이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수양대군을 도와 세력을 넓히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들은 거사를 계속하였고 때는 단종 15개월 단종이 즉위한지 1년이 되는 시경이었다. 수양 대군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국혼을 간청하거나 상소를 올리거나 하여 단종을 안심하게 만들었다. 1010일이 되었고 그들은 단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렸다.

 

3장 한 마리 원통한 새

공을 세운 공신과 공신책봉에서 제외되었던 종이나 시녀들에게도 충분한 보상이 주어졌고 권력은 온전히 수양의 것이 되었다. 단종은 임금의 자리만은 지키기로 다짐하여 조심스럽게 행보를 넓혀 나갔다. 조회에 참석하고 윤대를 시작했으며 경연 또한 열심히 참석하였다. 수양은 정난 이후 얼마 안 있어 다시 국혼을 주장하였고 단종은 강제로 부인을 얻게 되었다. 단종은 열다섯 살이 되었고 위험을 느낀 수양은 단종을 따르는 이들을 없애려 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단종은 수양대군한테 왕위를 넘겨주었다. 왕위를 넘겨준 뒤 쓸쓸히 지내던 단종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를 지지하던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려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대를 하였지만 일이 틀어져 버렸고 단종은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그에게는 사약이 전달되었고 그는 사약을 거부하고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4장 세조의 치세

세조는 모든 권력을 한손에 틀어쥔 독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들과 거리가 없었다. 그는 잦은 술자리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인과도 사이가 좋았는데 연회나 온천행, 활쏘기 구경등 어디든 부인을 대동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정승들을 자주 바꾸었는데 오래 두었다가는 힘을 얻어 반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5장 이루지 못한 꿈

공신인 이시애가 난을 일으켰고 그는 공신들의 힘을 통제하기 위해 새로운 공신들을 뽑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조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빨리 세자를 즉위시켰고 그가 조선의 제 8대 임금 예종이다. 예종의 즉위식이 있은 다음날 52세의 나이로 세조는 세상을 떠났다.

 

느낀 점: 단종이 불쌍하고 책 내용이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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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07 연산군일기

by 다솜 posted Jan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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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역사만화 박시백

조선왕조실록 07 연산군일기

2014.1.13.이지원

1장 대간권력 vs 연산

성종은 빡빡한 군주수업을 받은 자신과는 달리 세자에게는 느슨한 세자수업을 받게 하였다. 그 시절 연산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모범생도 아니었다. 연산은 소리 없이 적당히 하루하루를 보냈고, 어느 날 비로소 연산은 친어머니의 존재와 죽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아버지와 신하들에 의해 폐비된 뒤 사약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연산의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게 분명하였다. 또한 아버지가 사사건건 대간의 공격을 받고 해명하다 두 손을 들고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연산의 가슴은 투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신하들은 성종과는 전혀 다른 군주임을 신하들은 알게 되었고, 신하들은 집단 사직을 하며 연산이 복직을 명하면 다시 사직하기를 반복하는 일이 일상화되었고, 결국 연산은 작전상 그들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2장 무오사화와 왕권의 회복

성종의 3년 상이 끝나고 연산은 폐비 윤 씨의 이장에 박차를 가하여 대간들도 어찌할 수 없게 하고는 마침내 이장을 마치고 묘호를 회묘라 하였다. 이렇듯 연산은 성종과는 정반대로 많은 신하들이 반대를 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밀고나갔다. 그는 왕권에 대한 문제의식도 선명했고, 현실적인 힘의 관계도 잘 이해했다. 연산을 대신들에게 예로써 대하면서 때로는 의도적으로 자극하고, 자신을 지지한 대신의 대간의 공격을 받을 때면 확실하게 막아주기도 하며, 대신들은 대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연산은 자기주장을 펼 줄 알았고, 경연은 빠지는 날이 낳았는데 그때마다 다양한 핑계로 둘러댔다. 어쨌든 연산은 상당한 정치적 수완과 판단력, 그리고 뚝심을 지녔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힘은 강화되어서 카리스마 있는 유능한 군주가 될 것처럼 보였다.

3장 평온 속의 불안

노사신은 성종 조에 들어서서는 삼국사절요’, ‘동문선등을 편찬하는 학자였지만 대간의 지나친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대간들의 주 공격대상이 되었지만 연산과 대간이 부딪칠 때면 언제나 연산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서다가 무오사화 때 보여준 뜻밖의 상황 때문에 역사에 간신으로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연산은 민생문제에 대해서도 나름 신경을 써서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고, 신하들도 세조 때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가졌지만 문득문득 불안감도 찾아들고는 했을 것이다. 연산은 성종처럼 시와 그림을 좋아했고, 사냥을 좋아했는데 둘의 기질은 매우 달랐다. 연산은 성종과 달리 시를 짓기도 하고, 매에다 사냥개까지 마음껏 기르는 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 하였다. 그리고 인정전에서 양로연이 열렸을 때 연산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준 예조판서 이세좌는 술은 못했지만 다른 재상들처럼 술을 올렸고, 못하는 답 술을 받았는데, 그 술이 곤룡포에 떨어졌다가 유배당하였고, 그의 아들들은 파직 당하였다.

4장 갑자년의 잔혹사

이세좌의 가족들을 유배조치한 날 저녁에 연산은 성종의 후궁은 엄 숙의와 정 소용을 죽이고는 계모인 자순대비의 침소로 갔지만 중전 신씨의 만류에 발걸음을 돌려 연산의 할머니인 대왕 대비전에 가서 통곡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 그녀는 숨을 거두었고, 그렇게 갑자사화는 막이 올랐다. 연산은 폐비의 추숭을 다시 제기하였고, 이 분위기에서도 대간의 다수는 반대의견을 내었고, 연산은 본격적인 복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세좌는 민가로 들어가 대들보에 목을 매게 하였고, 정창손, 심회, 한명회, 정인지, 그리고 윤필상 등을 죽였다. 그리고 한치형을 부관 능지하였고, 한치형의 아들들을 국문장으로 끌어내었고, 가산을 몰수했으며 이극균도 자진하게 하였다. 이렇게 피바람을 불어오던 연산은 멈출 수도, 계속 할 수도 없는 이 일의 해결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이 가혹한 형벌은 이미 죽은 자와 그의 가족에게만 한정하고, 살아남은 신하들을 향한 피바람은 거두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살얼음판 위 같은 환경이었지만 연산의 의중을 이해했고, 적응해갔다.

5장 무너진 절대군주

연산은 절대 왕권을 위해 유교식 견제장치들을 제거해나갔고, 하급문신들과 급기야 대간들에게까지 가마를 매게 하였다. 그리고 사냥이나 야외 나들이를 즐겨했던 연산은 한 번 움직이면 행차가 지나가는 주변의 민가를 다 비우게 했고, 궁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왕 전용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궁의 기생들을 천 명으로 늘려서 데려오도록 했고, 그 중에서 용모와 재주가 빼어난 자는 흥청이 되었다. 또한 연산은 사냥을 위하 동물원을 만들었고, 날마다 사냥과 연회가 이어졌으며 나라 안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다 결국 박원종이라는 자가 군인들과 백성들을 모아서 군사를 평성하였고, 사태를 파악한 시종이나 내관들, 갑사들은 도망가 버렸고, 연산은 옥새를 진성대군에게 주었고, 그가 경복궁으로 가서 즉위하니 곧 중종이었다. 그 뒤 두 달여 만에 병이 심해져서 죽게 되었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대로 부인 신 씨의 곁에 묻히게 되었다.

느낀 점

재미있었고, 연산이라는 왕은 나쁜 것 같기도 하고, 불쌍한 것 같기도 하였다


정인

(독서록)조선왕조실록 01

by 다솜 posted Jan 1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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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1.개국,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2014.1.14. 김정인

1장 북방의 호랑이

이인사는 관기를 사랑하였고 그 일로 고을 수령의 분노를 사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 고려의 북쪽 끝인 동북면에 도착하였다. 그 때가 고려후기 1250년대이다. 그는 그곳에서 인근 고려인들을 규합해 나갔다. 몽골군한테 협박 문서를 보냈고 그는 항복하여 벼슬을 얻어내었다. 그렇게 백년이 흘렀고 그 사이 몽골은 점점 망해갔다. 그의 후손인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는 다시 고려국적을 되찾았고 옛 땅을 되찾는 작전을 성공시켜 공을 세웠다. 빠이앤티무르는 공민왕의 몽고식 이름이다. 그는 충숙왕의 둘째 이들로 11세에 볼모가 되어 원나라에 갔고 10여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노국공주를 만나 결혼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린 충정왕 대신 왕이 되었다. 원나라가 자신의 부마국인 고려를 안정되게 하기 위해 한 일이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원나라 세력들을 몰아내었다. 그는 기철을 제거하였고 옛 땅까지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왜구들이 끊임없이 침범해오기 시작하였고 국토는 전란에 휩싸였다. 한편 이성계는 아비와 함께 5년을 개경에 머물렀다. 1361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와 동시의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 때 전쟁이 일어났고 그는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그는 싸움을 잘하였고 그는 그 싸움으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자부심은 동료들이 그를 싫어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혼자 나가 싸웠고 이기고 돌아왔다. 그는 그것으로 교훈을 얻고 겸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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