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정인

(독서록) 조선왕조실록 04

by 김정인 posted Jan 18,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조선왕조실록 04 세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04. 세종. 문종실록, 황금시대를 열다 2014.1.17. 김정인

1장 임금위의 임금

갑작스레 보위에 오른 세종은 상왕으로 물러앉은 아버지 태종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두려워하였다. 태종은 세종이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군사는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강상인 이라는 공신은 패를 잘못 전달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경상도 유배되어 보내졌다. 그렇게 사건은 종료된 듯 했으나 두어 달 뒤 태종은 강상인 사건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는 강상인 을 고문하였고 강상인은 심온과 그 외 사람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말해버렸다. 그것은 태종이 원하던 답이었고 그는 심온에게 사약을 내렸다. 민 씨 가와 똑같이 만들려는 것이었다. 심온의 어머니와 자매들은 다 관노로 전락하였다. 태종이 그렇게 처가를 박살내버린 이유는 계모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던 것 때문으로 보인다. 상왕 태종은 여유를 얻었다. 권력은 무한하나 수고와 책임은 매우적은 그런 자리에 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 왜구가 횡포를 부린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태종은 대마도를 쳐서 승리하였다. 이후 100년간 가까이 조선과 중국의 해안가는 왜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후14207월 민 씨가 세상을 떴고 2년 뒤 14225월 태종이 세상을 떴다.

2장 태평성대를 꿈꾸며

태종이 세상을 뜸으로써 세종은 최고 결정권자인 진짜 임금이 되었다. 그는 신하들을 부드럽게 대해 주었고 심온제거에 앞장섰던 그 누구도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그들에게 새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태종이 살아있을 때 세종은 자기 시대를 끌고 나갈 쌍주마차를 마련했는데 그것이 바로 집현전과 황의다. 황희는 태종의 노여움을 사 지방에 쫓겨나 있던 상태였는데 태종이 죽기 전에 복귀해 복귀 4년 만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세종은 유교를 정치철학으로 삼았지만 불교를 내심 신봉했으며 풍수학이나 민간신앙도 그 가치를 인정했다. 세종은 정승을 특히 중시했다. 중요한 일은 반드시 정승과 의논하여 결정했고 정승으로 한번 검증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썼다. 세종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다방면에 걸쳐 최고 전문가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고려사를 새로 정리하는 것에도 힘을 쏟았다. 하지만 세종의 카리스마가 통하지 않는 영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중국과의 외교였다. 사신들이 무리한 요구를 접할 때마다 세종은 분개했으나 늘 들어주었다.

3장 백화만발의 시대

세종의 집현전 사랑은 특별했다. 장서각을 지어 연구 환경을 만들어 주었으며 공급도 아낌없이 했다. 그는 과학자들과 여러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었으며 시계제작도 열심히 하였다. 그러면서 궁중 음악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그런 노력 끝에 왕립 국악단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학문, 과학, 예악 등에 일대혁신을 가져오는 등 문풍을 크게 일으킨 세종은 무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다. 그렇게 그는 두만강 남쪽을 실질적인 조선 땅으로 만드는 것을 성공하였다. 14431230일 그는 인생 최고의 걸작품 훈민정음을 내놓는다.

4장 명군을 도운 명신들

황희는 24년간 정승을 하는 대기록을 세운 사람으로 세종은 그를 아꼈다. 그는 거침없고 분명했지만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이지는 않았다. 장영실은 관노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종3품 대호군까지 올라갔지만 모함을 받아 직첩을 회수 당하였다.

5장 준비된 임금, 문종

세종의 장자 향이 세자에 책봉된 것은 그가 여덟 살 때였다. 그는 세종을 닮아 의젓하고 총명했으며 믿음직하였다. 그는 세자로 30년을 지냈으며 준비된 왕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물여덟의 나이로 어렵게 아이를 얻을 수 있었고 아내 복이 없어 아이를 낳은 부인은 이튿날 죽고 말았다. 세종은 완벽한 성격 때문에 병을 얻었고 자신의 병빼고는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1450217일 병이 도져 눈을 감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문종이 병이 생긴 것이다. 결국 그는 임금이 된지 2년 만에 죽고 말았고 지지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열두 살 단종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느낀 점: 세종이 나와서 재미있었고 다음권이 기대된다

TAG •

?Who's 김정인

profile

재현

조선왕조실록3

by 류재현 posted Jan 17,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조선왕조실록3

2014/1/17/유재현

실록3.jpg

1장 전설이 된 태상왕

태조는 임금에서 태상왕이 되었다. 임금은 태종 이방원이 하고 태조는 태상왕이 된 것 이다. 하지만 태조는 이제 이빨빠진 호랑이가 되었다. 옛 신하들은 인사조차 오지 않고, 나라의 중대사들이 자신과는 의논 한마디 없이 결정된다. 물러나 6개월 남짓 지났을 때였다. 수도를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천도를 하는 것 이였다. 그래서 태조는 권력을 잃은 허탈감이나 옛신하들의 배신감보다. 더견디기 힘든 건 역시 슬픔이였다. 마음을 달래려 틈나는 대로 절을 찾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는지, 견디기 힘든 슬픔을 분노로 바뀌어 갔다. 그렇게 태조는 정종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명령을 듣고 움직여줄 부하 한 사람 없는 신세. 그러나 뜻밖에 변화가 있었으니, 태상왕에게 비판적으로 여론이 바뀌기 시작한 것 이였다. 한양으로 떠났던 이씨 왕실이 개경으로 돌아 왔을 때 개경 사람들의 반응은 싸는했다. 여론은 태상왕에게로 모아졌다. 그리고 이제 여론은 태종에게 비판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태상왕은 최정예부대를 데리고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관군의 위세를 이기지못하고. 허무하게 패배하였다.

2장 사냥이 끝난 후

태종은 안으로는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밖으로는 명나라와의 사이가 좋아 졌다. 이제 장차 위험이 될 만한 인물은 단연 자신을 도운 공신들이다. 그렇게 공신을 없애려 했다가, 정종은 공신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태종4,제의 나이 열한살 마침내 세자로 책봉되고, 민씨가의 경계심은 더욱 날카로워 졌다. 세자는 안팎의 기대에 별로 부응하지 못했다. 공부를 게을리한 탓에 내시가 대신 종아리를 맞은 적도 있고, 식사예절이 반듯하지 못해서 태종이 혀를 차기도 하였다. 1206, 세자 나이 열세 살. 태종은 왕을 못해먹겠다는 폭탄선언을 하였다.그리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경승 판서에서 말단관리에 이르기까지 난리가 났다. 선위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주정은 다음 날, 그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정종은 왕위를 자신이 계속이어가기로 하였다.

3장 공신의 운명

태종의 삼촌 이화가 민무구,민무질을 탄핵하는 글을 올렸다. 민무구,민무질은 정종의 처남이다. 탄핵하는 글의 내용은 이러하다, 지난번 정종이 왕을 그만한다고 하였을 때, 모두들 슬퍼하였지만 민형제 두명만 기뻐하였고, 그뜻을 거두시자. 그들은 실망한 얼굴을 한 것 이였다. 그리고 정종이 던진 질문에 불경한 것이고. 또 즉위 직루 이무에게 한 말과 구종지에게 한 말에 들어난 불경의 죄이다. 그래서 공신들을 필두로 민씨 형제를 처벌하라는 주정이 쏟아졌다. 하지만 태종은 가벼운 처벌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왕의 본심이 아니라고 여긴 신하들은 계속해서 처벌을 청했다. 하지만 태종은 거절하였고 신하들은 그것마저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계속 처벌을 요청하였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조정에선 오늘도 백관의 아우성이 이어졌다. 급기야 세자까지 나섰다. 그래서 결국은 민씨형제를 참수시켰다.

4장 현실주의자 태종의 개혁

태종은 맨날 사냥을 나갔다. 그래서 대간과는 시종일관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다. 태종은 변명도 해보고 솔직한 고백도해보고, 사과도 곧잘 했다. 그래놓고 며칠 후엔 또 사냥을 떠날 만큼 드의 사냥병은 심각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유학자인 하륜을 중심으로 이숙번을 비롯한 청년 유학자들을 앞세워 개혁을 밀고 나갔는데, 왕권강화라는 면을 제외하곤 정도전의 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유학으로 무장한 신진관료들을 충원하고, 관료제도도 유교 정치의 구현과 중앙집권의 필요의 맞게 개편하였다. 그리고 사그라들지 않는 왜구의 노략질의 대응하기 위해 병선을 건조하고 성능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무과제도를 정착시키고, 진법훈련을 다시 실시하였다. 그리고 장교의 질을 높였다,

5장 양년과 충년

태종은 얻던 신하도 어떤 정치 세력도 두렵지 낳았다. 그런 그다 처가를 몰락시키고, 공신들을 유배보낸 이유는 오직 하나, 세자 때문이였다. 유핟자들은 세자를 훌륭한 임금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빡빡한 생활을 요구했다. 그런데 세자는 공부체질이 아니였다. 나이를 먹어 가도 세자는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세자는 탈선행위를 하였다. 그러자 태종은 세자에게 경고를 하였다. 그리고 신하들이 세자의 만행을 고하고 세자는 눈물을 고해서 태종은 마음을 풀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세자를 폐하기를 원했다. 그러자 결국에는 태종은 세자를 폐하였다. 그리고 태종은 충년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충년대군은 세자가 된지 2달만에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자가 조선의 제4대왕 세종대왕이다.

느낀점: 재미있었다.

Atachment
첨부파일 '1'

정우

조선왕조실록3

by 명화 posted Jan 17,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조선왕조실록(태종실록)

지은이:벅사뱍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태종인 이방원은 결국 왕이 되었다. 그렇지만 태종에게는 정통성이라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태종이 왕이 되면서 태조를 몰아내고 형제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에 태종은 태조한태 용서를 구해야 했지만 어떠한 짓을 해도 채조는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태종은 더욱더 태조한태 미움을 살 짓을 한다. 그것은 바로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기는 것인데 그 일로 인해서 태종은 더더욱 마음을 풀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민심이 태종한태 않좋은 쪽으로 쏠리자 태조는 자신감이 생겼다. 태조는 금강산이나 오대산등 개경으로 내려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태조는 분노를 식히지 않았고 결국에는 1402년 금강산에서 최정예 부대인 별시위와 같이 동북면으로 가서 동북면 사람들과 같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태조는 이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반란이 실패하자 태조는 평양에서 있다가 태종의 부름으로 다시 개경으로 갔다. 그러다가 태조는 1408514일에 죽었다. 태조가 죽자 태종은 140510월에 다시 한양을 도읍으로 삼고 창덕궁을 지었다. 원경왕후인 민씨는 질투가 심해서 태종이 다른 여자들을 만나면 다거 잔소리를 많이 해서 결국에는 태종이 즉우한지 한 달도 않되서 경영청으로 거처를 옮겻다. 원경왕후의 질투에서 상관없이 태종은 아홉 명의 후궁을 들였다. 1404년 태종은 아들인 이제는 열한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동된다. 그러나 세자는 부응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가 1406년 태종은 세자한태 왕위를 물려준다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에 다시 옥세를 세자궁으로 갖다 놓았다. 또다시 세자가 다시 옥세를 인정전에 갖다 놓는등 이런 일을 몆번이나 계속하다가 열흘만에 이일을 멈추었다. 태종은 세자을 결혼시킬려고 하고 있다가 김한로라는 태종의 과거 동기의 딸을 골랐다. 그러나 공부와 이현이라는 사람들이 명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하지는 이야기를 원경왕후의 아버지인 민제와 이야기를 했는데 이 이야기가 태종한태 보고 되면서 공부와 이현을 벌하고 사건은 끝났것 같았다. 그러나 태종은 이 사건에서 민제가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민제의 아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혐의를 씌어서 유배 시켰다. 그러다가 민무구와 민무질을 죽게 하였다. 태조는 사냥을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 때문에 대신들과의 논란이 많았다. 그 이유는 왕이 사냥 행차를 하면 엄청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사냥 지역이 결정되면 그 해당지역은 빨리 가을 걷이를 끝내야 했고 야산의 덤블이나 높은 풀들도 정리해야 했다. 왕을 호송하는 신하들과 갑사들고 수천 명에 달했고 사냥을 위한 몰이꾼은 오천명 정도 필요했다. 태종은 이러한 일 때문에 대신들을 벌하거나 유배도 많이 보냈지만 청년 유한자인 언관들을 좀처럼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유학자들은 세자인 양녕대군은 훌륭한 임금으로 준비시키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요구했지만 세자는 공부 체질이 아니였다. 세자는 나이를 먹어도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대신 활쏘기나 사냥을 즐겨했다. 그러다가 세자가 열일곱살이 됫을 때 잔치에서 봉지련이라는 여자를 만나자 태종은 봉지련을 가두어서 처반에 버릇을 고칠려고 했지만 세자는 금식투쟁을 해서 결국에는 봉지련을 풀어 주었다. 그 뒤에도 세자는 계속 공부를 게흘리 하고 장안에 있는 건달들을 궁 안으로 불러들여 어울렸다. 태종한태는 네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제는 양녕대군이고 둘째인 효령대군은 말수가 적고 웃음이 많았다. 나중에는 불교로 귀의 했다. 넷째인 성녕은 단정한 용모와 총명하고 반듯해서 왕과 왕비의 귀여움을 얻엇다. 셋째인 충녕대군은 1397년 생으로 이름은 이도이고 양녕과 달리 영특했고 공부를 좋아했다. 태종은 이도의 재주를 아까워해서 하고싶어하는 것을 마음껏 하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이도는 양녕대군한태 도발적인 행동을 몇 번 했다. 그러다가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이도를 세자로 올렸다가 세자가 된지 두달만인 1418810일에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되었다.

느낀점:이번에는 전편인 태조.정종실록보다는 재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재미 있었다. 다음편이 세종실록인데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대된다

TAG •

?Who's 명화

profile

정우

조선왕조실록2

by 명화 posted Jan 17,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조선왕조실록[태조 정종실록]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이성계는 왕이 되고 나서도 민심을 잡기 위해 나라이름을 바꾸지 않고 고려라고 계속하고 조심시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나서 왕족이였던 왕씨들을 거의 모두다 거제도와 강화도에서 살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나라이름을 고쳤는데 조선이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남은 정몽주의 사람들을 죽일려고 했다. 그러나 태조는 용서해 주자고 했고 결국 곤장형으로 하자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곤장 100대를 맞은 사람이 살아있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정몽주 세력인 이숭인은 곤장이 허리를 쳐서 곤장을 맞다가 죽는다. 그렇게 하여서 죽은 사람은 8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난다음에는 태조는 개국 공신들을 선정하였다. 그런데 아무런 한일이 없는 사람들을 1등 공신으로 책봉을 한 일이 있었느데 이것은 태조가 조선은 자신의 편들만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엿다. 그런데 태조가 왕이 되는 것을 도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한태는 별다른 보상이 없었다. 태조는 부인이 두명이 있었는데 첮째 부인인 한씨는 이방원을 비롯해서 62녀를 낳았지만 태조가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두 번째 부인인 강씨인 신덕왕후는 21녀를 낳았다. 그녀는 왕비로 살았지만 욕심이 많아서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려고 했다. 신덕왕후는 태조를 설득해서 어린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었다. 그러던중 박위라는 사람이 점쟁이한태 왕씨들의 운세를 물어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사건은 박위가 왕조 교체를 할려는 사건으로 간주되어서 신하들을 왕씨들을 죽이라고 태조한태 권하였다. 태조는 투표를 통해서 사건을 해결할려고 했지만 왕씨들을 제거하자는 의견들이 너무 많아서 결국 왕씨들을 강화나루나 거제도 앞바다서 죽었다. 그리고 나서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죽였다. 이 사건으로 전국에는 왕씨들을 찾아서 죽이는 수색 작업이 시작되었고 살아남은 왕씨들은 성을 전씨나 옥씨로 바꾸어서 살아갔다. 왕씨들의 도읍인 개경이 싫어진 태조는 도읍을 옮기는 일을 시작하였다. 중간에 하륜이란 신하가 반대를 하여서 잠시 중단 되었다가 1394년에 다시 도읍을 옮기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서 새로운 도읍은 한양이 되었고 공사한지 1년만에 종묘와 경복궁이 완성되었다. 경복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완공 축하연에서 즉석으로 낸 이름이다. 그러던중 명나라의 황제인 홍무제가 황제를 알현하로 간 신하를 거의 죽도록 맞은 일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조선 조정은 분노하였지만 홍무제는 다시 조선인 쳔여 명이 명나라 군사시설을 불태워서 조선의 왕자들이 와서 직접 해명하라는 억지 주장을 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인 방우는 술을 좋아하다가 개국한 이듬해에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태조는 생각한 끝에 이방원은 당나라로 보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이방원은 명나라에 가서 국빈으로서의 최상의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1398524일에 홈무제가 죽었다. 홍무제가 죽기 전부터 요동을 칠려고 생각하고 있던 태조는 진법훈련을 강화하였고 왕자들이나 종친, 공신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모든 사병들을 관군으로 편입시켜버리고 무기를 빼앗았다. 이 사건으로 이방원은 더욱더 불리한 입장이 되었다. 1398826일 이방원은 정도전이 반역을 할려고 했다는 것을 빌미로 사람들을 모아서 정도전을 죽이고 다른 정도전 편에 있엇던 사람들도 죽였다. 그리고 나서 방원의 형인 이방과를 세자로 새우자고 했다. 그리고 나서 방원은 패세자인 방석과 그의 형인 방번을 죽엿다. 이방원이 정종인 이방과를 왕으로 세운 이유는 자신이 왕이 되면 반란이지만 방과가 왕이 되면 적장자가 왕이 된다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종도 이런 이방원이 뜻을 알았는지 나라의 중대사는 방원과 대신들한태 맡기고 자신은 격구를 하면서 왕위를 이여갔다. 그러다가 넷째 아들인 이방간은 자신이 왕이 될려고 1400129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그러나 방간은 쉽게 잡혀서 유배를 당했다. 그리고 셋째인 이방의는 권력욕이 없어서 조용히 살았다. 이리하여 정종은 이방원을 세자로 삼고 왕이 된지 22개월만에 방원하태 왕위를 물려 주었다. 그리하여서 이방원은 조선의 3대왕인 태종이 된다.

느낀점: 이번에 한 요약은 너무 빨리 쓴겄 같다. 다음인 3권은 좀더 재대로 써야될 것 같다.  

TAG •

?Who's 명화

profile

정우

조선왕조실록1권

by 명화 posted Jan 17,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조선 왕조 실록[01개국]

지은이:박시백

출판사:휴머니스트

내용:고려 후기인 1250년대 전라도 전주에 있는 스무 살 이안사는 자시 밑에 있던 사람들을 대리고 동쪽 끝인 오늘의 삼척시로 간다. 그 이유는 이안사는 한 관기를 사랑했는데 그 사실을 고을 수령이 알자 도망간 것이다. 그래서 삼척시에서 잘 살고 있던중 전주의 수령이 삼척시 신임 사또로 부임해 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려시대의 북쪽 끝인 동북면으로 간다. 당시 동북면은 여진족들이 들어와서 살았던 곳이라서 매우 위험한 지역 이였지만 이안사는 자신을 따라온 170여 가구와 같이 갔다. 동북면에 자리를 잡은 이안사는 오래있지 않아 천여 호의 수장이 되었다. 그 당시 그 일대에는 몽고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몽고 군대가 이안사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이안사는 싸우기 보다는 항복을 택했고 동북면에서 실력자로 성장했다. 그리고 100년이 흐르자 이안사의 증손이고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은 원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아들 이성계와 함께 개경으로 간다. 개경에서 공민왕을 만난 이자춘은 공민왕에게 임무를 받는데 그 임무는 고려가 원 나라가 뺐어간 동북면을 되찾기 위해서 고려군의 공격에 내응하는 것이였다. 이 임무는 성공하였고 이자춘과 이성계는 고려로 돌아가서 벼슬을 얻게 된다. 공민왕은 원 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고 나라를 부강하개 만들려고 했으나 홍건적이 쳐들어오고 여진과 원 나라 그리고 왜구들이 고려를 침범해 오자 자연스럽게 개혁을 포기한다. 1361년 이자춘이 갑자기 죽는다. 이자춘이 죽자 이성게는 가병 2000을 이끌고 홍건적에게 빼앗긴 개경을 되찾으러 가는 군사 20여 만에 합새한다. 병사수로는 100분의1이지만 가장 먼저 동대문을 돌파하고 홍건적의 수장을 비롯한 여러명의 장수를 죽였다. 홍건적을 물리치자 몇 달뒤 원 나라 장수였던 나하추가 고려에 쳐들어 왓다. 이성계는 이버에도 나가서 싸웠는데 나하추의 선발대를 유인해서 전멸하고 야영하는 본진을 기습공격하거나 이름난 장수를 죽이는등 전적을 올렸다. 이성계는 다른 전쟁애서도 출전을 하면 무조건 이기고 돌아오는 등 엄청난 활약을 했다. 공민왕은 즉위 이전부터 원의 지배를 물리치고 나라안으로는 구문세족을 제압하여 양인의 수를 늘려서 나라 국방을 튼튼히 할려고 했으나 전쟁을 계속되고 권문세족과 신하들의 반란이 이러나는등 매우 힘들어 하고 있었던 도중에 왕비인 노국공주가 죽고만다. 그후로 아무런 의욕이 없자 신돈이라는 스님에게 나랏일을 맏겻다. 신돈은 새로운 인물들을 관리로 등용했고 힘이 있는 대신들을 정리하고 억울하게 빼앗긴 땅을 백성들한태 돌려주는등 개혁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다가 1371년 신돈은 역모 사건에 휘말려서 죽고 말았다. 신돈이 죽으면서 공민왕도 매우 크게 변했다. 오랫동안 해왔던 고려 개혁을 그만두고 방탕하게 삶을 지낸다. 그러다가 자제위들한태 죽음을 당한다. 공민왕이 죽자 이안임이 정국 주도권을 가져간다. 공민왕을 뒤를 이여서 어린나이인 우왕이 왕이 되었다. 그러나 우왕이 아직 어려서 모든 주도권은 이인임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중 중국에서는 주원장이 원 나라를 쫓아내고 명 나라를 새웠다. 그러던중 명나라가 고려가 원 나라와도 외교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아인임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대신을 암살하였다. 그리고는 원 나라와 다시 외교를 할려고 하는데 공민왕을 따르던 대신들이 반대를 하자 그중 하나인 정도전을 원 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일을 시킨다. 정도전은 다른 사람들한태 그 원 나라 사신을 죽여버리자고 하자 그 사실이 이인임한태 들어가서 전라도로 유배를 보낸다. 유배를 간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만나서 손을 잡았다. 그 시절 왕권에서는 이인임과 그의 세력들의 전횡은 갈수록 심해저 갔다. 그러던중 우왕이 사춘기에 접어들자 탈선 행위를 한다. 이런 우왕의 탈선 행위에 이인임 세력들은 좋아했지만 최영만이 우왕을 막았다. 최영의 말이 점점 마음에 가자 우왕은 최영과 같이 이인임을 죽이자고 한다. 평소에 최영은 부정부패를 좋아하던 이인임을 싫어했지만 인간적으로 싫어한 것은 아니였다. 자신 혼자만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한 최영은 이성계와 같이 이인임일당을 죽이고 그들의 아내와 딸들은 관비로 삼고 어린 아들들은 임진강에 던져버렸다. 이인임은 최영이 변호해 줌으로써 이인임과 그의 자식들은 살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권력의 외곽에만 있었던 이성계는 권력의 핵심부로 들어갈수 있게 되었다. 우왕은 최영도 자신을 배신할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에 최영의 여식과 결혼을해서 최영을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그러던중 명나라의 홍무제가 공민왕 때 되찾은 쌍성총관부 관할지역이 자신의 땅이라면서 상의도 없이 가져갔다. 이에 분노한 최영은 요동을 치자고 우왕한태 말했으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말하면서 반대했다. 그러나 말거나 최영은 우왕을 설득해서 이성계와 이인임 계열의 보수파인 조민수와 같이 요동으로 갈려고 했으나 우왕의 반대로 최영은 요동으로 가지 않고 왕과 같이 있었다. 위화도에 온 요동 정벌군은 장마가 오자 회군을 한다는 글을 올렸지만 최영이 반대를 했다. 간신 최영을 죽인다는 이유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최영은 남아있는 군사로 싸웠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최영은 유배지인 고봉현에서 죽고만다. 자신의 편인 최영이 죽자 왕은 밤에 내시80여 명을 무장시켜서 이성계의 집을 급습했지만 실패하여서 강화로 유배된다. 월래는 이성계가 조민수한태 왕의 아들을 왕으로 새우면 않된다고 말했지만 욕심이 생긴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왕으로 세웠다. 조민수를 도와서 창왕을 왕으로 세운 이색은 이성계가 왕이 될려는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막을려고 한다. 그 방법은 정통성을 굳건히 할려고 창왕과 같이 홍무제를 알현하여 가는 것이였는데 창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재비가 완강하게 반대하자 이색은 이성계의 다섯쨰 아들인 이방원과 같이 홍무제를 만나로 간다. 그 사이 이성계편인 조준은 상소 하나로 조민수를 유배보낸다. 그후 최영의 친척인 김저와 정둑후라는 사람이 강화로 가서 우왕을 만나고 우왕이 믿고 있었던 곽충보와 같이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햇으나 곽충보의 배신으로 정득후는 자살하고 김저는 자백을 받다가 죽는다. 김저가 한 자백으로 창왕이 패위되고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다. 그후 이성계는 토지개혁을 실시해서 다시 백성들의 지지을 받는다. 이성계와 그의 측근들이 세력을 펼칠려고 할 때 정몽주가 이들을 막아서 이성계가 왕이 되는 것의 걸림돌이 생겻다. 그러던중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서 다치는 사건이 있었다. 정몽주는 이때를 기회로 생각해서 이성계의 부하들인 조준 남은 등을 유배보냈다. 이 일로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은 이성계한태 정몽주을 죽여야 한다고 하지만 이성계는 끝까지 반대한다. 그러나 이런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방원은 13924월에 개경에 있는 선죽교에서 죽는다. 정몽죽자 가지 편이 없어진 공민왕은 1392716일에 왕위에서 내려온다. 공민왕이 패위하자 다른 백관들을 이성계의 집으로 가서 이성계한태 옥세를 넘겼다. 그리고 다음날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느낀점: 내가 좋아하는 역사책 이여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독후감을 쓸 시간이 적어서 시간이 좀 오래 걸린 것 같았다.

 

TAG •

?Who's 명화

profile

지호

조선왕조실록8 지은이-박시백 2013년 1월 17일 유지호

by 고백 posted Jan 17,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조선왕조실록8 지은이-박시백 2013113일 유지호

 

연산이 쫒겨나자 백성은 기대와 희망으로 들떳고 반정의 주역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무오 사회로 죄입거나 연좌된 이들을 석방하고 총문관, 사간원이 복구되고 동물원도 헤체 되었으며 서총대도 철거하였다. 하지만 연산의 협력자들을 청산하는 일은 미루었다. 반전의 주역들은 또다른 쿠데타를 막기 위해 공신들을 무분별하게 채택했다. 그리고 유자광을 유베시켰다. 역시나 예상대로 박경과 김공저가 반란을 일으킬려다 실패했다. ㅈㅇ은 연산 뒤에서 낯추며 살았기에 왕이 된게 떨떠름 했다. 그래서 연산과 반대로 행동하였고 신하들에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그러던 중종 5년에 왜구들이 군사 4000명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다. 이게 바로 3포 왜란이었다. 중종은 왜구를 토벌하는데 성공했고 비변사라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었다. 반정 3대장인 박원종,유순정,성희안은 3공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이름난 창기들을 많이 차지하여 별실을 짓고 살게 하였으나 수명이 다되어서 곧 3명다 죽고 말았다. 어느날 김정이 폐비를 복귀시키고 박원종을 죄주라는 상소를 올려서 죄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조광조라는 새내기 대산이 거절을 하면 되지 왜 죄를 주느냐고 왕을 나무랐다. 이 말은 세를 키웠고 신진 유망주로 조야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3대장을 잃어서 불안했던 왕은 이 젊은 선비에게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광조에 말이라면 무조건 들었고 대간들도 조광조를 지지했다. 하지만 임금은 조광조의 세력이 너무 세지자 일을 꾸며서 조광조와 그의 세력의 핵심 인물을 죽이고 나머지는 유베를 보냈다. 그리고 영의정 남곤이 김한로라는 자를 유베 보낸적이 있었는데 그가 돌아왔다. 김한로는 예조판서로 임명되고 자신을 유베 보냈던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였다. 그리고 권력이 그에게로 쏠리기 시작했고 왕 못지 않은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종은 조광조 때처럼 일을 꾸며서 김한로도 죽였다. 중종은 단지 성실 했을뿐이었고 왕좌 유지 외의 목표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제자리 걸을만 했고 재위 39년에 이르러서 57살에 나이로 죽었다.

 

느낀점-조광조가 죽은게 안타깝다.중종실록.jpg

Atachment
첨부파일 '1'

재현

조선왕조실록2

by 류재현 posted Jan 16,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조선왕조실록 2

2014/1/16/유재현

 조선왕조실록2.jpg

1장 개국과 역성의 세월

이성계가 왕이 되고 민심은 우호적이지 않아싿. 왜냐하면 500년 동안 왕씨의 나라 였는데 이성계가 왕이 되면서 이씨가 왕이 돼서 였다. 그래서 이성계는 왕씨들을 섬으로 격리 시켰다.그리고 이성계는 자신의 편이 아니고 고려의 편인 사람들도 모두다 죽였다. 그리고 자신의 편의 사람들과 중간파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고 그 벼슬에 맞게 땅과 노비를 포상으로 주었다. 하지만 왕자들에겐 아무런 포상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세자를 결정하는데 이방원이 세자가 될 듯 하였다. 하지만 태조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방번이가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더니 태조는 세자를 방번으로 하였다. 태조는 섬으로 격리된 왕씨들이 반란을 하지 않아서 점차 자신감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섬으로 격리된 왕씨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왕씨들을 모두다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하들은 왕씨를 모두 죽여야 한다고 청하고 태조는 불허하고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투표를 하였다. 그러자 제거 찬성에 과반수가 몰려서 피바람이 불었다. 그렇게 왕씨는 모두 죽었다.

2장 새술은 새 부대에

태조는 개국 초부터 마음속으로 다짐한 일이 있었다. 바로 도읍을 옮기는 일이였다. 먼저 계룡산이 도읍지 후보지로 떠올랐다. 태조는 신하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계룡산에 이르러 산수와 형세를 관찰했고. 신하들이 그려 바친 설계도를 검토한 다음, 도읍 건설을 명했다. 그렇게 10개월이 지났을 때이다. 태조는 화가 났다. 왜냐하면 누구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잘아는 정도전마저 천도를 반대하고 나선다. 그리고 다음날은 현재의 경복궁 근처를 찾았다. 고려 숙종때 여러번 천도할 목적으로 기반공사를 했던 곳 이다. 그리고 태조는 이곳으로 천도할 것을 정하였다. 그리고 이방원은 방번이 세자가 된 것이 화가 났지만 그것을 잘 다스렸다. 그리고 하륜이 찾아왔다. 그러자 아방원과 하륜은 두야심가가 왕자와 대신이 아닌, 동지로 새로이 만났다.

3장 제3의 변수 홍무제

명나라 황제 홍무제는 세자를 왕위에 않칠려고 하는데 세자는 너무 착해 빠졌다. 그래서 홍무제는 신하들이 세자를 구박할 것 같아서 1천명의 신하들을 죽였다. 하지만 세자도 죽어 버렸다. 그러자 세자의 아들을 왕위에 않칠려고 했는데 또 신하들이 구박할 것 같아서 1만여명의 신하들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선에게 엉뚱한 시비를 건다. 왜구로 가장한 조선인 천여명이 명나라의 들어와 군사시설을 불태우고 난동을 피우는 등 난동을 피우다. 진압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요동을 칠려 했지만 하지 않았다.

4장 왕자의 난

아방원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광화문에서 대기하다가 정도전이 술을 마시고 있는 곳에 찾아가 불을 질르고 정도전을 죽였다. 그리고 정도전에겐 아들이 넷있는데. 두아들은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구하러가다가 거리에서 죽고, 한아들은 집에서 자결하였다. 그리고 이방원은 하룻밤만에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래서 태조는 하룻밤만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었다.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 평생을 걸쳐 이루어 놓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자부심까지.

5

임시군주 정종

난이 있고 나서 여드레 만에 태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는다. 조선의 왕이된 영안군 방과 즉 정종은 태조의 둘째아들로 전장을 누빈 무장이다. 강건한 체구에 무인다운 순박함을 지닌 사내. 하지만 그는 아우 방원처럼 생사를 걸고 싸울 의사도, 권력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어느쪽에도 휘말리기 싫었던 그는 성밖에 김인귀라는 자의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세자가 되고 꿈조차 꾸어본 적이 없는 최고의 자리 임금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이방원의 압박이 심해지자 정종은 이방원에게 군통수권을 완전히 넘겨주고 세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방원은 임금의 자리의 올랐다.

느낀점: 재미있었다.

Atachment
첨부파일 '1'

지호

조선왕조실록7 지은이-박시백 2013년 1월 16일 유지호

by 고백 posted Jan 16,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조선왕조실록7 지은이-박시백 2013116일 유지호

 

세자시절의 연산은 양녕대군같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버지 성종같은 모범생도 아니었다. 연산은 성종과는 달라서 비판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고집이 셌다. 대간들은 임금이 결정을 할때마다 반대를 했다. 그래도 꿈적 않자 대간은 예의 집단 사직에 들어갔고 임금은 이들을 다시 복직시켰다. 복직,사직의 지루한 반복이었다. 이렇듯 연산은 반대가 아무리 드세도 작정한 일을 하는 뚝심이 있었다. 연산은 대신들을 존중하고 나라의 중대사로 맡겼다. 그리고 최고지도자로서의 판단력도 괜찮았다. 백성들은 성종기에 이은 태평성대를 누릴수 있었다. 하지만 하고싶은 것을 가리지 않고 해서 궁궐안에서 매와 개를 키웠다. 궐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철저히 단속해서 어린 아이들이 산에 올라가 궁궐을 쳐다본 일이 있었는데 큰 벌을 내렸다. 연산 99월 양로연이 열렸다. 예조 판서 이세좌는 술을 마시다 왕의 곤룡표에 술을 흘렸다. 그는 연산에 어머니에게 사약을 들고간 장본인이었다. 연산은 그를 유배시켜버렸다. 그리고 연산에게 복수의 떄가 왔다. 엄숙의,정소용을 때려 죽인뒤 폐비의 추승을 다시하고 왕비를 폐할떄 가담한 이들을 죽였다. 그리고 자신을 비판한 사람들을 죽이고 능지하고 효수 한것도 모자라서 해골을 빻아 날려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편의 시를 써서 바치라고 했는데 두편의 시를 쓴 신화와 중국의 수박을 먹고 싶어하자 말리던 신하들까지도 죽였다. 온갖 죄를 씌웠고 그래서 감옥은 모자랐고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는 그치지 않았으며 날마다 새얼굴이 장대에 걸렸다. 신하들은 요령을 터득했다. 죽은 동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 자신의 죽지 않고 곤장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연산은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잔치를 배풀고 선물을 주었다. 신하들은 연산의 의중을 이해했고 적응해갔다. 삐끗하면 긑장나는 살얼음판 같은 환경이기는 했지만 연산은 하급 문신은 물론 대간들까지 가마를 지게했고 사냥을 하러 가는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민가를 허물었고 논밭을 사냥터로 바꾸고 분묘들을 허물었다. 그리고 금표를 세워 민간인은 출입을 못하게 하였고 잔치를 위해 천명에 여인을 뽑게 했다. 그리고 중소형 연회를 위해 서총대를 만들고 2천명이 앉을 수 있는 정자도 만들고 호랑이나 곰같은 동물들을 잡아다가 우리에 가둔체로 사냥하였다. 그후 박원종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고 거사는 성공해서 중종을 왕으로 세우고 세자와 왕자들을 죽이고 연산도 죽었다.

 

느낀점-재미있었다.

 

세자시절의 연산은 양녕대군같은 문제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버지 성종같은 모범생도 아니었다. 연산은 성종과는 달라서 비판을 두려워 하지 않고 고집이 셌다. 대간들은 임금이 결정을 할때마다 반대를 했다. 그래도 꿈적 않자 대간은 예의 집단 사직에 들어갔고 임금은 이들을 다시 복직시켰다. 복직,사직의 지루한 반복이었다. 이렇듯 연산은 반대가 아무리 드세도 작정한 일을 하는 뚝심이 있었다. 연산은 대신들을 존중하고 나라의 중대사로 맡겼다. 그리고 최고지도자로서의 판단력도 괜찮았다. 백성들은 성종기에 이은 태평성대를 누릴수 있었다. 하지만 하고싶은 것을 가리지 않고 해서 궁궐안에서 매와 개를 키웠다. 궐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철저히 단속해서 어린 아이들이 산에 올라가 궁궐을 쳐다본 일이 있었는데 큰 벌을 내렸다. 연산 99월 양로연이 열렸다. 예조 판서 이세좌는 술을 마시다 왕의 곤룡표에 술을 흘렸다. 그는 연산에 어머니에게 사약을 들고간 장본인이었다. 연산은 그를 유배시켜버렸다. 그리고 연산에게 복수의 떄가 왔다. 엄숙의,정소용을 때려 죽인뒤 폐비의 추승을 다시하고 왕비를 폐할떄 가담한 이들을 죽였다. 그리고 자신을 비판한 사람들을 죽이고 능지하고 효수 한것도 모자라서 해골을 빻아 날려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편의 시를 써서 바치라고 했는데 두편의 시를 쓴 신화와 중국의 수박을 먹고 싶어하자 말리던 신하들까지도 죽였다. 온갖 죄를 씌웠고 그래서 감옥은 모자랐고 고문으로 인한 비명소리는 그치지 않았으며 날마다 새얼굴이 장대에 걸렸다. 신하들은 요령을 터득했다. 죽은 동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 자신의 죽지 않고 곤장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연산은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잔치를 배풀고 선물을 주었다. 신하들은 연산의 의중을 이해했고 적응해갔다. 삐끗하면 긑장나는 살얼음판 같은 환경이기는 했지만 연산은 하급 문신은 물론 대간들까지 가마를 지게했고 사냥을 하러 가는데 불편하다는 이유로 민가를 허물었고 논밭을 사냥터로 바꾸고 분묘들을 허물었다. 그리고 금표를 세워 민간인은 출입을 못하게 하였고 잔치를 위해 천명에 여인을 뽑게 했다. 그리고 중소형 연회를 위해 서총대를 만들고 2천명이 앉을 수 있는 정자도 만들고 호랑이나 곰같은 동물들을 잡아다가 우리에 가둔체로 사냥하였다. 그후 박원종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고 거사는 성공해서 중종을 왕으로 세우고 세자와 왕자들을 죽이고 연산도 죽었다.

 

느낀점-재미있었다.


재현

조선왕조실록

by 류재현 posted Jan 15,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1

2014/1/15/유재현

 조선왕조실록1.jpg

이안사

이안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데리고 동북면에 갔다. 그리고 동북면에 자리를 잡고 주변의 고려인들과 합하였다. 당시 이일대엔 몽고 군대가 진을 세웠는데 이안사에게 항복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안사는 항복을 하였다 그리고 몽고에서 벼슬을 받고 몽고에서 살았다. 이 사람이 이성계의 고조이다.

이자춘

이자춘은 이안사의 증손이자 이성계의 아비이다. 이자춘은 원의 세력이 약해지고 황실이 부폐하는 것을 알고 이성계를 데리고 고려에 갔다. 그리고 고려에서 원과 싸워서 뺏긴 땅을 되 찾았다.

공민왕

충숙왕의 둘째아들로 11세에 불모가 되어 원나라로 가서 10년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총명한데다 처신 또한 신중하여서 원황실의 총애를 받았다. 원은 충정왕을 끌어내리고 공민왕을 세웠는데. 공민왕은 즉위하자마자 몽고의 관한 모든 것을 철폐 시켰다.

이성계

이성계는 전쟁에 참여하였다. 드는 가병 2000을 끌고서 그의 몇십배다 되는 홍건정과 싸워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계속 크고작은 전쟁이 이어져 고려를 괴롭혔지만, 이성계가 출전하고 이겨서 돌아왔다.

공민왕은 고려개혁의 실패하고 노국공주가 죽어서 거의 미쳐갔다. 그래서 정치는 안하고 후궁과 놀기만 하였다. 그래서 신하들은 공민왕을 죽였다. 그리고 우왕을 왕으로 세웠는데 우왕의 나이는 10세였다.

정도전

이사람은 유배를 가게된다. 정도전은 유배에가서 관리들의 횡포와 백성들읭 굶주림을 보고 개혁을 실시한다. 그렇게 인재를 양성하고 뭐든지 다 해봐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정도전은 칼을 집어든다.

왜구들은 내륙까지 들어와서 곳곳을 약탈과 횡포를 하였다. 왜구의 횡포가 점점 심해지자 백성들은 공포와 분노로 떨었다. 그래도 다행이 고려엔 두명장이 있었는데 최영과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고향에서 왜구를 박멸할려고 군대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찾아왔다. 그둘은 둘의 야심과 속마음을 열어 보였다. 이성계47세 정도전41세 무력과 사상이 손을 잡은 것 이다. 우왕은 10세에 즉위하자 몇해가 지나고

사춘기에 접어든다. 그는 7세에 아버지가 참수되시고 10세에 공민왕이 살해되고 어머니가 임진강에 던져 졌다. 그 모든 아픔을 딛고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그는 빛나가기로 하였다. 이어지는 그의 탈선행위는 마치 자신의 권력이 허용되는 정도를 테스트 하는 듯이 보인다. 좁다란 도성 골목안에서 개,닭 사냥을 즐기고, 길거리에서 미녀를 만나면 욕보이고, 결혼을 앞둔 처자를 뻇든등 비행의 10대를 보냈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게 뭐라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영은 그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하엿다. 우왕은 최영의 말이 신경이 쓰여서 결국엔 스물을 넘기면서 그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한다. 그리고 왕은 최영과 손을 잡고 당대의 실권자들을 다 죽였다. 그래서 부정부패한 신하들을 죽이고 최영은 권력의 정점의 섯고 이성계는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갔다. 왕은 원하던 바를 이루었지만 불안하였다. 왜냐하면 어제의 동지도 의심하게 만드는 권력의 생리때문이였다. 그래서 우왕은 최영의 여식과 결혼을 하였고, 최영만은 믿고 싶었다.원은 고려를 칠려고 하였다. 그래서 최영은 요동을 쳐야한다고 했다. 왕은 이성계를 불러서 요동정벌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성계는 4불가론을 말하면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성계의 말은 듣지 않고 요동정벌을 보냈다. 그런데 왕은 최영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이성계가 4만 정벌군을 데리고 요동으로 갔다. 그런데 위화도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성계는 정벌군을 데리고 다시 계경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회군을 해서 권력을 잡고 최영을 참수시키고 우왕을 폐위시켰다. 그리고 공양왕을 즉위 시켰다. 그리고 정몽주가 있었다. 정몽주는 충신이였는데 공양왕의 편에 섯다. 그래서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가 정몽주에게 이성계의 편에 서지않겠냐고 했지만 정몸주는 거절하였다. 그리고 선죽교에서 이방원네가 정몽주를 죽였다. 그리고 공양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이성계가 왕위에 즉위하였고 조선이 계국되었다.

느낀점: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Atachment
첨부파일 '1'

정우

글로벌한군사5

by 명화 posted Jan 15,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글로벌 한국사5

지은이:강은천

출판사:플빛

내용: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났다. 1945822일에는 소련군이 와서 북위38도에 선을 긋고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정했던 것처럼 북쪽은 소련이 신탁 통치를 하고 남쪽은 미국이 신탁 통치를 했다. 그러던 중 1946년부터 미국과 소련이 냉전 체재로 들어서자 1948510일에 남한만 총선거가 실시되고 815일에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초대대통령은 이승만이 되었다. 북한도 19469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50625일 새벽에 북한군 21연대 병력이 38선을 넘어 오면서 6.25가 시작 되었다.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들어온 북한군 21연대는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인민군 절반과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정예 병력인 조선족 군대였다. 인민군들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까지 점령해서 국군은 그곳을 최후 방어선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때 유엔은 예상보다 빨리 반응을 했다. 전쟁이 일어난 그날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해서 북한의 침략을 비난하고 28선 밖으로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인민군의 진격이 계속되자 627일에는 남한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915일에는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애서 인민군을 막았다. 인천에 들어간 유엔군과 국군은 928일에 서울을 다시 되찾고 38선을 넘어서 10월에는 압록강까지 인민군을 밀어 붙였다. 그러자 이미 공산화 되어 있었던 중국은 불안해 지자 인민 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을 도와 6.35전쟁에 투입되었다. 인민 지원군이 전쟁에 참여하자 195114일에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 미국은 다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해서 중국을 비난하고 즉각 철수를 요청하려고 했으나 소련이 반대를 해서 못하였다.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는 만주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서 중국 공산당을 몰아내자고 주장했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판단해서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 자리에서 쫓아냈다. 맥아더를 쫓아내고 국군과 유엔군은 경기도 평택과 충청북도 제천을 잇는 선에서 인민군과 중국 인민 지원군의 공격을 막고 진격해서 진격했다. 또다시 서울을 되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28선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힘으로 상대를 재압할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휴전을 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만에 유엔 주재 소련 대사가 휴전을 권했고 극동 연합군 사령관이 리지웨이는 이 의견을 받아서 북한과 중국에 휴전 협상을 제의했다. 1953727일이 되자 드디어 판문점에서 휴전 협상이 끝났다. 6.25전쟁은 유럽에서 시작된 냉전이 아시아에서 열전으로 번진 대규모 국제전이었다. 이 전쟁으로 죽은 군인은 160만 명이 넘고 민간인은 100만 명에 가깝다. 이 전쟁이 끝나고 다시 이승만은 대통령을 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친일파의 도움을 받아서 권력을 쥔 사람이었다. 그래서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 특위를 못마땅해 했고 결국 해체에 으르는 것까지 방조 했다. 나라가 문단을 되었어도 아직까지는 대한민국에는 이승만을 반대하는 진보적 인사들이나 민족주의 적 인사가 많았다. 1952년에는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이승만이 2대 대통령을 하기 위해서 반대를 한 야당 의원 11명을 체포한 사건이다. 결국 이승만은 2대 대통령까지 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한번더 대총령을 하고 싶어했지만 헌법에 한 사람이 세 번 대통령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서 못하고 있던중 19541127일에 초대 대통령에 한해 3선 제한을 철폐한다라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월래 재적 의원의 3분의2가 찬성을 해야 가결되는데 이 개헌안은 딱 한명이 모자랐다. 고로 이 개헌안은 기각되어야 하는 것인데 반올림의 논리에 따라 개헌안이 통과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사사오입 사건이라고 한다. 1960년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승만은 자기의 부하인 이기붕을 부통령의 시키고 싶어했다. 그러기 위해서 전국에 있는 학교를 민주당 후보의 연설을 못듣게 할려고 모두다 학교에 보내개 했고 민주당의 유세장에 모이는 것을 방해했다.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는 315일에 치러졌다. 그런데 이승만정부는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인 명부를 조작해서 없는 사람을 유권자로 등록하고 40%정도의 투표용지에 여당 후보를 찍어서 미리 투표함에 넣기도 했다. 그리고 공무원을 동원해서 유권자들을 협박하고 3인에서 5인씩 조를 짜서 서로를 감시하며 투표를 하게 하는 거의 공개투표를 하기도 하는등 부정을 저질렀다. 이 사건에 대해서 분노한 마산 시민의 시위가 막을수 없어지자 경찰들은 실탄을 발사해서 8명이 사망했다. 그러던중 411일에는 315일에 시위를 하던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되었다. 419일에는 경무대로 시위를 하고 있던 시위대에게 경찰이 실탄을 발사해서 104명이 죽었다. 425일에는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교수들도 시위에 참여했고 그러다가 427일에 이승만은 국회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경무대를 나왔다. 이사건을 4.19혁명이라고 한다, 1961516일새벽에는 박정휘 소장과 지휘관들 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다시 독재국가로 변했다.

느낀점: 이책에서는 내가 재일 좋아하는 현대사가 나와 있어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Who's 명화

profile

정인

(독후감)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by 김정인 posted Jan 15, 2014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최재천 2014.1.13. 김정인

 

꿀벌 사회의 민주주의

꿀벌은 춤으로 말한다. 꿀벌이 추는 춤에는 꿀이 있는 꽃까지의 거리와 방향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예를 들어 꿀벌이 추는 춤의 속도가 느리면 꿀까지의 거리가 멀다는 것이고 춤의 속도가 빠르면 거리가 가깝다는 것이다. 이 같은 벌들의 춤 언어는 매우 정확하여 우리도 그 춤을 알아들을 수 있을뿐더러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걸 수도 있다. 꿀벌들은 보통 성숙한 군락을 이뤄 매일 아침마다 20여 마리의 정찰벌들이 꿀을 찾아 나선다. 그들은 하나 둘씩 돌아와 제각각의 춤을 한꺼번에 추기 시작한다.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벌들은 가장 훌륭한 꿀을 발견한 정찰벌 주변에 모여든다. 이 모든 과정에서 여왕의 입김은 전혀 미치지 않는다. 완벽한 민주주의가 벌어지는 것이다. 정찰벌들은 거짓을 말할 수 없다. 금방 들통이 나 버리기 때문이다.

고래들의 따뜻한 동료애

몇 년 정 일이다. 바삐 걷던 중 어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곤경에 처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어느 커다란 차가 인도를 막고 있어 차도로 내려가 돌아가려 하는데 차들이 계속 경적을 울려대는 것이었다. 나는 곧장 가서 그를 도와주었고 인도로 와 그와 어색한 분위기로 나란히 걷다 빨리 가야 돼서 헤어졌다. 내가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면 그는 조용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연계는 언뜻 보면 늙고 병약한 개체는 포식자의 먹이가 되는 비정한 세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가진 고래들의 사회는 다르다. 거동이 불편한 고래가 있으면 다 같이 가서 도와주고 그물에 친구가 걸리면 그물을 물어뜯기도 한다. 친구가 부상을 당했을 때는 친구가 숨을 쉴 수 있게 친구를 등에 떠받들고 있어준다. 이렇게 결과만 보면 고래들이 우리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동물도 수학을 할까

매미들 중에는 13년 혹은 17년 마다 화려한 외출을 하는 종들이 있다. 이는 포식자를 피하기 위함인데 신기한 것은 13, 17은 다 1과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나누어지는 소수들이라는 것이다. 동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침팬지, 까마귀, 앵무새 등에게는 원시적인 수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한다. 침팬지는 간단한 덧셈, 뺄셈을 할 수 있다. 미국 남서부 사막지대에 사는 꿀단지 개미들은 종종 이웃나라와 전쟁을 한다. 이 전쟁은 수의 대결로 끝이 나는데 모두 일대일로 짝을 짓고 난 후 그래도 병사가 남아도는 나라가 이기는 것이다. 남는 병사들이 후방으로 밀고 들어오면 끝나기 때문이다. 개미들의 전쟁에는 소대장이 있어 수시로 전략을 세운다. 그런데 전략을 세울 때 이들은 적군이 열세인지 아군이 열세인지 알 수 있다. 아마도 남아있는 병사들이 아군이냐 적군이냐에 따라 판단하는 것 같다.

잠자리는 공룡 시대에도 살았다

잠자리는 해충을 잡아먹는 익충이다. 유충 때는 장구벌레를 성충일 때는 모기를 잡아먹는다 하여 모기 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무척이나 얇은 날개를 가졌지만 그물 같은 골격 덕에 잠자리는 한 시간에 40킬로미터를 날 수 있을 만큼의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 몸무게의 3분의 1에서 거의 반이 다 날개 근육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 어렸을 때 잠자리채를 들고 잠자리를 잡으러 뛰어다녀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잠자리 잡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잠자리가 잠자리 채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의 쾌감은 잡아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것이다. 공룡이 다 사라진 오늘날에도 잠자리는 꿋꿋이 살아남아있지만 유충들이 살 수 있는 맑은 물이 없어지고 있어 많은 종들이 절멸의 위기에 놓였다. 알을 낳을 곳이 마땅치 않은 도시 한복판에서 끝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저려 온다.

뻐꾸기의 시간 감각

뻐꾸기는 자기는 둥지를 틀지 않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새이다. 대부분의 경우 뻐꾸기는 자기 자식을 맡길 숙주 새의 알과 비슷한 모양의 알을 낳는다. 뻐꾸기 어미들이 실제로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행동을 보면 그들에게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재빨리 알을 낳고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뻐꾸기의 알은 대체로 다른 새들의 알보다 일찍 부화한다. 그다음 본능적으로 등으로 숙주 새의 알을 둥지 밑으로 떨어뜨린다. 또한 새끼가 자립할 때가 되면 찾아와 새끼를 데리고 간다.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얌체들이지만 시간만큼은 잘 지키는 새들이다.

 

느낀 점: 꿀벌들의 춤을 해석했다는 것이 신기하였고 다친 동료를 돕는 고래들이 참 멋진 것 같다. 뻐꾸기는 참 신기한 새인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동물들이 나오는 책이라 재미있었다

TAG •

?Who's 김정인

profile

Board Pagination ‹ Prev 1 ...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 137 Next ›
/ 13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