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도원

도원팀 여행기

by 줄기 posted Mar 01, 2019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Atachment
첨부파일 '1'

재현

인도네시아 여행 준비과정

by 아람 posted Feb 27, 2019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준비과정


재현

인도네시아 여행 실행서

by 아람 posted Feb 27, 2019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실행서


재현

대기명당 여행계획 예산

by 아람 posted Feb 27, 2019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도원

검은 감자/수전 캠벨 바톨레티

by 줄기 posted Dec 23, 2018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2018.12.22.이도원

제목: 검은 감자

지은이: 수전 캠벨 바톨레티

 

1845년 아일랜드에 감자역병이 발생해 거의 모든 감자가 다 썩었다. 감자는 아일랜드 농촌 주민의 유일한 식량이었다. 이 역병은 5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 동안 100만 명이 굶어 죽고 200만 명이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1845년 여름철의 날씨는 매우 이상했다. 매일 흐릿하고 3주간 비만 온적도 있었다. 신문에서는 작년같은 감자 대풍년이 에상된다고 했다. 감자는 두 번 수확한다. 감자가 다 자라기 전 5월에 캐먹는 햇감자와 겨울을 나기 위해 11월에 캐먹는 늦감자다. 사람들은 햇감자를 캐먹고 늦감자를 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마을에서 감자가 검게 변하고 악취가 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부랴부랴 감자를 파보았지만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다음날 밭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감자는 다 썩어있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예전에도 감자 역병이 있었지만 한지역만 그랬지 아일랜드 전체가 그렀진 않았다. 오랜 비로 인한 심한 습기와 강한 바람 때문에 역병이 옮겨간 것이다. 주식이 감자인데다 감자만 심은 탓에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졌다. 소작료를 바치려고 키운 밀은 자라자마자 지주 사람들이 가져갔다. 대기근 전 너무 가난해 혼자 먹고 살지 못하는 극빈층은 동냥을 하며 살았는데 너무 힘들면 구빈원에 갔다. 구빈원은 지주와 농민들이 세금으로 만들어 극빈층을 보호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교도소처럼 엄격하고 자유롭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가는 것은 선택이지만 나갈 땐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대기근이 닥치자 농민들까지 구빈원으로 몰리게 되어 자리가 부족했다. 당시 영국의 총리 로버트 필 총리는 이 심각성을 알고 아일랜드 곳곳에 과학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단은 처방을 잘못 내려 썩은 감자도 먹을 수 있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이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복통과 피가 섞인 설사로 고생다가 죽게 되었다. 현대 이 질병은 아일랜드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농민들이 비료로 쓸려고 칠레에서 수입한 구아노에 있던 것이었다. 로버트 필 총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비밀리에 미국에서 옥수수를 수입했다. 총리는 이 작물을 싸게 팔았다. 하지만 산 사람들은 지주와 돈 있는 자들이었고 극빈층은 살 수 없었다. 산 사람들도 먹고 배탈이 났다. 그 동안 먹은 것이 없었고 딱딱한 알갱이를 어떻게 요리하는지도 


도원

우리 음식의 언어/ 한성우

by 줄기 posted Dec 08, 2018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2018.12.8.이도원

제목: 우리 음식의 언어

지은이: 한성우

 

우리나라에서 밥은 쌀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음식 전체를 가르킨다. 밥이 밥상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1942년 한국인의 밥그릇은 550CC였지만 점점 줄면서 현재 밥그릇은 260CC로 반이 줄었다. 예전엔 고기를 먹지 못해 탄수화물인 밥만 먹고 농사할 힘을 내어야 했다. 그렇기에 밥그릇이 그렇게 큰 것이다. 식구는 한 집에서 같이 살며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요즘 시대엔 식구가 성립되지 않는다. 1인가족이 많아지고 집에서 밥을 먹어도 혼자 먹기 때문이다. 비빔밤은 원래 비빈밥이었다. 비벼서 나온 밥인 것이다. 하지만 비빔밥이랑 소리가 같아 비빔밥으로 바뀌게 되었다. 비빔밥은 비비지 않은 채로 나오게 되었고 비빔은 비빔 국수, 비빔 냉면 등으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사용하는 빵이라는 단어는 포르투갈의 팡에서 왔다. 일본과 포르투갈이 교류할 때 일본에 팡이 들어왔고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 팡이 왔는데 팡을 빵으로 듣게 되자 팡과 빵을 둘 다 쓰게 되고 해방 된 후 빵으로 통일되었다. 옛날 시절 국수의 재료인 밀가루는 너무 귀해 진가루라 불렸다. 그런데 밀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자란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심지 않은 이유는 밥을 짓는 쌀과 자라는 시기가 같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귀하다는 진가루는 국수에 사용되었는데 국수의 긴 길이는 생일잔치에선 장수를, 결혼식에선 백년해로를 의미한다. 국수가닥을 뽑는 것은 직접해야 해서 만들기 힘든 고급음식이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기계로 할 수 있게 되고 싸져서 생일잔치나 결혼식에서 국수를 내놓는 것은 돈을 아낀다는 구두쇠 심보를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 밥상에서 숟가락을 사용하는 이유는 국을 떠먹기 위해서다. 국에 밥을 마는 것은 우리만의 특이한 문화이다. 국과 찌개, , 전골은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그러나 대충 국물이 많으면 국, 적으면 찌개이고 음식점에서 크고 비싸면 전골, 작고 싸면 찌개인 것은 알고 있다. 탕은 이 세가지에 모두 쓰인다. 영어로 국은 수프, 찌개는 스튜지만 전골은 비슷한 것이 없어 번역이 안된다. 우리 밥상은 흰색, 초록색, 빨간색으로 나뉘는데 이는 밥, 채소, 고춧가루가 들어간 채소를 의미한다. 우리 밥상에서는 나물이 굉장히 많다. 밥과 국을 제외하고 밥상을 보면 온통 푸른색이라 할 수 있다. 오이는 여름을 대표하는 채소이고 참외는 수박과 같이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이다. 그런데 오이는 원래 외였다. 참외와 같은 종이라는 것이다. 오이의 다른 이름은 물외로 물이 많은 외라는 뜻이고 참외는 진짜 외라는 뜻인데 이는 오이보다 더 달고 맛있는 오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오이가 채소라면 참외도 채소여야하고 참외가 과일이라면 오이도 과일이어야 하지만 쓰이는 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둘은 분류되었다. 고기를 진짜 반찬이라 부르는 이유는 얻기 힘들어서였다. 길러서 먹으려면 사람이 먹을 식물을 내주어야 하고 사냥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돼지는 큰 동물이라 부위별로 맛이 달라서 이름도 다르다. 우리가 자주 즐겨먹는 삼겹살은 삼겹이 아니라 세겹이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삼겹이 되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이름인 갈매기살은 갈매기모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로막이 부르면서 바뀐 것이다. 의문의 부위는 가브리살이다. 등겹살이라 불려야 맞지만 가브리살로 바뀐 것은 부르면서 바뀐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초밥은 이름만 보면 초를 친 밥이라 회가 없어야 하지만 회가 들어있다. 그래서 원래는 초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스시를 먹는다고 해야 한다.

느낀 점: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도원

독수리는 왜 까치에게 쫒겨다닐까?/김기범

by 줄기 posted Nov 24, 2018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2018.11.24.이도원

제목: 독수리는 왜 까치에게 쫓겨다닐까?

지은이: 김기범

 

매년 봄 5월 말에서 6월 초엔 선의로 시작된 새끼 동물 납치극이 일어난다. 등산객들이 새끼 동물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동물보호소에 신고하는 것이다. 이는 구조가 정말 필요한 동물이 아니라 어미가 먹이를 찾으러 새끼를 두고 갔을 때 신고한 것이 다반수이다. 이 때문에 어린 동물은 어미와 강제로 떨어지게 되고 동물의 수는 줄어들게 된다. 그러므로 동물을 보고 신고할 때는 주변에 어미의 사체가 있는지 보고 심각한 부상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사람들은 독수리를 생각하면 용맹하고 사냥에 능숙한 새를 떠올린다. 하지만 독수리는 사냥을 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작은 새에게 쫓겨다닌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는 수릿과가 아니라 맷과이다. 독수리는 매년 겨울에 한반도에 와서 먹이를 먹고 이동하는 철새이다. 독수리는 사냥을 하지 않고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는다. 독수리의 위는 썩은 시체를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몇 일 지난 썩은 고기도 먹을 수 있다. 매도 먹이가 너무 없을 때는 썩은 고기를 먹는데, 위가 독수리만큼 탄탄하지 않아 대부분 죽는다. 우리나라에 황새 한쌍은 1971년을 끝으로 없어졌다. 이 기사는 동아일보가 냈는데 낸지 사흘 만에 밀렵꾼에 의해 수컷이 죽었다. 남은 암컷은 나중에 농약을 먹고 죽어가던 중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져 1991년에 죽었다. 그런데 2014년에 황새가 봉하마을에 다시 나타났다. 이 황새는 일본의 황새연구마을에서 방사한 새인데 한국까지 날아온 것이다. 황새가 돌아왔다는 것은 봉하마을의 자연이 좋다는 증거였다. 황새 한쌍이 살려면 무농약으로 농사짓는 밭이 50만평이 필요한데 봉하마을은 70만평이 무농약농사였다. 봉하마을 주민들은 황새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황새에게 인공 둥지를 만들어 주었다. 원래 황새는 가장 높은 곳에 둥지를 짓는데 가로등보다 긴 나무가 없자 황새를 배려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황새에게 봉하마을을 찾아온 황새라며 봉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는 한국의 황새복원센터에서 탈출한 황새 한 마리와 시베리아에서 온 황새 2마리로 4마리 황새가 살게 되었다. 바다제비는 우리나라 무인도인 칠발도와 구굴도에만 알을 낳는 희귀 철새이다. 그런데 20세기 사람들이 쇠무릎을 키운다고 심어놓은 것이 바다제비를 위협한다. 쇠무릎은 약초로 쓰이는데 사람들이 팔려고 키웠다가 장사가 되지 않자 관리를 하지 않고 떠나면서 칠발도는 쇠무릎 천지가 되었다. 쇠무릎의 열매는 바다제비의 날개에 붙어 바다제비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쇠무릎이 높게 자라면서 바다제비가 둥지를 만드는 식물인 밀사초가 햇빛을 받지 못하게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인근 주민들은 바다제비를 살리기 위해 가는 길이 험한 칠발도에 가서 쇠무릎을 뽑고 밀사초를 심는다. 쇠무릎은 박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주민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바다제비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종곰인 반달가슴곰은 자연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 지리산에서 어떤 무인 카메라에 야생 곰의 모습이 찍혔다. 사람들은 곰을 지리산에 방사하여 수를 늘리고 있다. 그래서 36마리까지 늘어났으며 50마리가 될 때까지 계속 노력하고 있다.

느낀점: 재미있었다.


정안

요리사가 말하는 요리사

by 유카이 posted Nov 02, 2018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요리사가 말하는 요리사

지은이: 장미영, 김소정, 한영용, 우금산, 김광래, 김광오, 심재호, 강병택, 최재석, 임성희, 신비, 김태윤, 우제국, 이오성, 이형근

2018.11.2. 이정안

 

어린 시절 나의 꿈은 베이커리였다. 그 꿈은 하루12시간 노동을 견디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식품가공학과에 진학한 나는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때문에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자주 휴학을 하고 백화점 판매 사원으로 학비를 벌었다. 제빵 학원을 다닐라고 새벽엔 신문 배달, 오전엔 커피숍 알바, 오후엔 소주방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렇게 150만원을 모았는데 부모님 손에 건네져 학원을 다니지 못했다. 제빵사의 꿈은 끝나는 듯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1999년에 전공과무관하게 무역회사를 다니고 2002년 콜센터 상당뭔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 회사를 접고 스물 일곱살 때 들지 제빵사가 되기로 했다. 이곳저곳 학원을 알아보다. 노동부가 지원하는 뚜레쥬르 제빵 훈련원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정부를 얻었다. 학원비도 들지 않고 한 달에 5만원씩 교통비만 나온다. 30명의 훈련생 중 한 사람으로 선택되었다. 뚜레쥬르 선릉점에 제빵사가 되었다. 450분 일어나 가게로 갔다.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마음만은 행복하기에 웃을수 있었다. 가게에서 빵을 만들고 7시에 퇴근을 한다. 그러다 빵200개 주문이 왔다. 비명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주문한 사람이 미수롼 아이들이 기사님이 만든 빵이 제일 맛이다고 한다. 라고 말을 해주었다. 내가 만든 빵이 맛있다는 말에 넘어가 기분 좋게 빵을 만들었다. 나는 쉬는 날이 있으면 다른 빵집에가 빵을 먹고 맛을 그림을 그린다. 왜냐면 손님들이 가게에 와 이 빵이 무슨 맛이 나냐고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무살 북한산 기슭 올림피아호텔에서 초보 요리사로 시작했다. 그리고 휴가를 얻어 유럽 여해을 떠났다. 유럽 7개국을 순회하면서 나는 유독 이탈리아 요리에 빠졌다. 이탈리아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를 맛본 순간 나는 이탈리아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흔히 사람들은 이탈리아 요리를 피자와 파스타를 제외하고는 모른다. 우리나레에 이탈리아 요리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년 전잉서 낯선게 당연하다. 확실히 정의하자면 서양 요리는 곧 유럽요리, 유럽요리가 곧 이탈리아 요리를 뜻한다. 최고의 요리로 알려진 프랑스 요리도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캐서린이 프랑스에 시집 갈 때 데려간 요리사들이 프랑스에 전파시킨 것이다. 이탈리아에 가보지 않고 이탈리아 요리를 하는 건 한번도 한국에 온 적 없는 미국인이 미국 현지에서 한식 식당을 운영 하는 것 과 같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날 때 마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친구 아버지가 경영하는 호텔에서 친구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일을 했다. 일을 하면 할수록 흥미를 가졌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호텔의 특성이 내 성격과 잘 맞았던 것 같다. 호텔 생활이 마음에 들어 호주로 가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친구로부터 스위스 호텔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도전해 보기로 했다. 스위스 호텔은 만만한 곳이 아니였다. 안에서 경쟁이 엄청 심했다. 스위스 호텔을 졸업하고 돌아와 1988녀 밀레니어 서울힐튼 호텔에 입사했다. 내 업무는 모든 음류를 서비스 하는 것이 였다. 나는 음류들 중에 와인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와인 서비스 교육을 받아 와인 마니아에서 소믈리에로 발전했다. 우리나라에서 스믈리에는 흔히 와인 감별사로 풀이되곤 한다. 요리와 와인이 서로 어울리도록 조화롭게 짝찟는 것 또한 소믈리에의 역할이다. 와인 초보라면 무조건 많이 마셔 보기를 권한다. “소믈리에의 실력은 결국 시음한 와인 병수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무리 특별한 감각과 센스가 있다 해도 만히 마셔 본 사람을 당할 수 없다. 느낌점: 재미있었다.


재현

2019 대기명당 인도네시아 여행계획

by 아람 posted Oct 27, 2018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Files

대기명당 여행계획 완성본입니당


정안

놀라운 피부

by 유카이 posted Oct 27, 2018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생각하고 맛보고 감각하는 제3의 뇌 놀라운 피부 지은이: 덴다 미츠히로

2018.10.27. 이정안

 

집신 벌레는 하나의 세포로 이루어진 생명체이고 뇌가 없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판단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피부에 해당하는 곳에 세포막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짚신벌레의 머리에 부딪히는 자극이 발생하면 세포막 안쪽과 바깥족의 전위치가 사라지고, 꼬리부분을 자극하면 안쪽의 전위치가 커진다. 선두가 무언가에 부딪혀 탈분극이 됐을 경우 섬모 막에 있는 칼슘 나트룸 체널 이라는 칼슘 이도만을 통과 시카는 구멍을 통해 칼슘이 들어온다. 그 결과 섬모의 움직임이 빨라져 짚신벌레가 물무에서 무언가에 부딪혔을 때 피할수 있다고 오시카 대학 박사가 설명했다.

생명체에 따라 뇌에도 차이가 있다. 잘 알려진 것이 미소뇌라고 불리는 곤충의 뇌이다. 곤충은 복잡하고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고 사회 구조를 이루고 농경 생확을 하는 종도 있다. 하지만 뇌의 신경세포는 수십만개로 인간 뇌에 있는 신경세포 수의 10만분의 1에 불과한다. 이런 단순한 뇌로 수억년 전부터 번성해 올수 있었던 이유는 생존 전략 덕분이다.

뇌가 여러 장가와 상호작용을 하면서부터 의식과 감정이 생겨나고 비로소 사고가 가능해진다는 거다. 그 중 각질층은 천천히 오랫동안 이어지는 환경변화에도 구조를 변화시키며 적응한다. 1~2회 또는 10회 정도 펜이나 여필 원고를 써도 굳은살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입시 공부 등으로 계속 연필을 사용하면 중지 왼쪽의 각질층이 두꺼워진다. 습도10% 이하인 상태에 피부가 계속 노출되면, 각질층이 두ᄁᅠᆼ지고 세포막 지질의 양도 늘고 장벽 가능이 파괴된 뒤의 회복 속도도 빨라진다. 반면 높은 습도 90%이상의 환경에 1~2주간 피부를 노출시키면 각질픙은 얇아지고 세포 속에서 수분을 유지하기 위한 아미노산의 원료인 필라그린이라는 단백질의 양은 줄어 든다. 세계적으로 아토피성 피부염 환지의 수가 늘고 있다. 특히 선진국에서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이 나오고 있다. 도시화그리고 건물의 구조변화, 에어컨의 보급 등도 원인 중 하나이라고 생각한다.

베토벤에서 시작된 장대한 교향곡이라는 형식에 대해, 말러는 그 표현력을 온갖 방법으로 거대화했다. 말러의 연구자인 드 라 그랑주씨는 말러의 언어를 소개했다. 말러는 오케스트라라는 악기의 한계에 도전한 것처럼 생각된다. 1번부터 제9번까지의 교향곡을 순서대로 듣고 있으면 차례대로 기존의 형식, 악기 구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말러가 최초로 만든 교향곡 제1<거인>의 피날레에서 갑자기 호른 연주자가 일어나서 연주를 한다. 이는 말러 자신이 악보에 써 넣은 지시이다. 실제로 본 파보 예르비 지휘교향악단의 연주에서는 갑자기 여덟 명이 벌떡 일어섰습니다. 이야기와 관계는 없지만, 실제로 보면 당당하고 화려한 피날레의 기분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느낌점: 재미있었따.


도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by 줄기 posted Oct 27, 2018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

단축키

Prev

Next

+ - Up Down Comment Print

2018.10.27.이도원

제목: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지은이: 조세희

 

공장 마을에는 난장이 한 명이 사는데 그는 키가 117센티미터여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하게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난장이의 몸이 안 좋아지면서 아이들은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했다. 공장에서는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시끄러운 소음을 들으며 일했고 점심시간은 30분을 주면서 10분안에 밥을 먹고 20분 동안 공을 차라 했다. 공장에서는 모두 가까이 친해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로 어색했다. 그런 상황에 막내딸인 영희는 아무말 없이 가출했다. 시에서 아파트를 짓는다고 1달 안에 짐싸서 나가라고 했다. 아파트는 50만원이 넘게 있어야 들어갈 수 있지만 난장이의 집을 팔면 20만원도 안나왔다. 1달 안에 안나가면 집이 부셔지는 것이었다. 그 때 지섭이라는 청년을 만났는데 대학을 다니다 이 사회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해보려고 노동운동을 하게 된 사람이었다. 지섭은 아무 것도 할 수없었다. 집이 팔리고 난장이 가족은 영희를 찾지 못하고 은강으로 이사갔다. 영희는 자기 집을 산 사람을 찾아가 몸을 대줘서 입주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미 집은 철거되어 있었다. 영희도 은강으로 갔다. 난장이는 몸이 점점 안좋아지다가 죽었다. 세 자식들은 공장에 취직했다. 셋이 열심히 일해 번 돈은 모두 생활비로 다 쓰였다. 기본임금이 너무 짰기 때문이다. 셋은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해야 했고 영희는 엄청난 소음으로 청각장애가 생겼다. 두 번째 월급을 탄 영수는 노조 지부장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사용자가 어기는 조약이 너무 많다며 항의했다. 노조 지부장은 회사에서 보내 뽑은 것이었다. 지부장은 영수의 말을 다 돌리고 무시했다. 은강은 주변의 생명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공장의 폐수, 폐유는 모두 바다로 떠내려가고 그 주변을 흐르는 시냇물은 엄청난 고무냄새가 나고 탁해서 코를 막고 넘어가야 했다. 은강에 사는 모든 노동자들은 모두 이런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공장의 본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유하고 다른 삶을 살았다. 노사간의 회의에선 사용자가 노동자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고 사용자 측에서만 이익을 보려했다. 결국 사용자의 마음대로밖에 할 수 없었다. 영수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냈지만 바뀌는 것이 많지 않았다. 결국 노동자들이 피폐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은강 산업 회사의 회장 때문이라 생각하게 되어 회장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회장이 아니라 회장의 동생이었다. 비슷하게 생겨 잘못 죽은 것이었다. 영수는 법정으로 나오게 되었다. 죽은 사람의 조카 입장에서는 더럽고 미개한 노동자 하나가 자기 숙부를 죽인 것에 화가 났고 피고자의 아버지가 난장이라는 것을 알아 조롱하고 난장이가 독재적이고 나쁜 성격 때문에 아들이 저꼴이 났다 생각했다. 조카는 노동자 입장을 생각해 볼수가 없었다. 매일매일을 부유하게 살았고 학교도 제대로 다녔기 때문이다. 영수는 재판에서 증인으로 지섭을 내세웠다. 지섭은 이 노동자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하려고 가계부를 내보였고 가계부에는 월세와 식비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죄가 살인이었고 피해자가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영수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느낀점: 전태일 평전의 다른 이야기 같다.


Board Pagination ‹ Prev 1 2 3 4 5 6 7 8 9 10 ... 137 Next ›
/ 13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