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미하일 엔데
2019.6.15.이도원
제목: 모모
지은이:미하일 엔데
모모는 자기의 부모님도 모르고 집도 없는 고아다. 모모는 매를맞는 고아원에서 도망쳤고 옛 원형극장에서 산다. 이웃주민들에 의해 가구들이 생기고 아늑한 방도 생겼다. 모모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을 아주 잘했는데 그러면 말하는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깨닫게 됬다. 그래서 매일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모모는 언제나 들어줬다. 시간이 넘쳐낙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모모를 좋아했다. 모모가 있으면 언제나 기발한 놀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모의 가장 친한 친구는 기기와 베포였는데 기기는 젊고 말을 잘하는 몽상가였으며 베포는 자신의 청소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주민들 곁에 쟂빛양복을 입고 서류가방을 들고 중절모자를 쓰며 매번 시가를 피우는 쟂빛신사가 나타나 수첩에 생활을 기록했다. 쟂빛신사들은 자신을 잊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해 아무도 그들을 기억해낼수 없게 만들고 생각만 심어줬다. 그랬더니 온 도시가 모두 바빠졌고 1초라도 아끼려고 살아서 신경질적이고 사랑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쟂빛신사가 모모를 찾아왔고 모모는 그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가 있으니 추웠고 가슴이 아팠다. 모모가 그의 말을 열심히 듣자 쟂빛신사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들이 시간을 뺏어 살아가고 주민들을 바쁘게 했다는 진실을 말해버렸다. 그는 잊으라 했지만 모모는 기억했고 그 이야기를 기기와 베포에게 해주었다. 바쁘게 살지 않는 것은 아이들 뿐이었는데 부모들이 자기를 안챙겨주자 아이들은 원형극장으로 다 몰려들게 되었다. 기기는 아이들과 함께 시위를 해 진실을 말하자고 했지만 베포는 위험할 것 같다며 하지 말자고 했다. 기기는 아이들을 이끌고 시위해 청명이 모였지만 어른들은 아무도 보지 않고 무시했다. 쟂빛신사가 손을 미리 써두었기 때문이다. 쟂빛신사는 모모를 위험인물이라고 생가해 잡으려 했다. 히지만 모모는 등딱지로 말하는 거북을 따라가서 없어진 후였다. 모모는 거북을 따라 시간의 중심에 가게 되었고 시간의 관리자인 호라박사를 만났다. 호라는 자신이 너를 이곳에 오게 했고 시간의 꽃을 보여줬다. 시간의 꽃은 호라박사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시간이었다 쟂빛신사들은 그 시간의 꽃은 사람에게서 빼앗아 사는 존재였다. 시간의 꽃은 아름다웠고 좋은 소리가 났으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호라박사는 모모를 원형극장으로 돌려보냈다. 모모는 아무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너무 배고프자 직접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1년이 지나있었다. 마을주민들은 쟂빛신사들에 의해서 모두 바빠졌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모모는 거북이 카시오페아와 함께 다시 호라박사에게 갔다. 호라박사의 집은 들통나 쟂빛신사에게 포위당했는데 쟂빛신사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데 쟂빛신사들이 피우는 시가 연기가 시간의 꽃을 오염시켜 사람들이 쟂빛신사로 변할 위기에 처했다. 호라박사는 모모에게 시간의 꽃 한 송이를 쥐어주고 자서 모든 시간을 멈추었다. 이제 세상엔 쟂빛신사와 모모만이 움직일 수 있었고 모모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뿐이었다. 모모는 쟂빛신사의 거처를 따라갔다. 쟂빛신사들은 시가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수를 6명까지 줄였다. 모모는 시간의 꽃으로 창고를 열었고 쟂빛신사로부터 도망쳤다. 도망치는 도중 신사 5명이 시가를 놓쳐 없어지고 마지막 신사도 없어졌다. 모모는 시간의 꽃으로 창고에 얼었던 곷들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시간이 많아져 사랑하고 좋아하고 사소한 것에도 기뻐하게 되었더. 그리고 모모의 옛 친구들도 다시 원형극장으로 모모를 찾아왔다.
느낀 점: 재미있었다.
영화보기와 영화읽기-조셉 보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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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위한 스테이크/프리드리히 콜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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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혁-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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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팀 여행기
검은 감자/수전 캠벨 바톨레티
2018.12.22.이도원
제목: 검은 감자
지은이: 수전 캠벨 바톨레티
1845년 아일랜드에 감자역병이 발생해 거의 모든 감자가 다 썩었다. 감자는 아일랜드 농촌 주민의 유일한 식량이었다. 이 역병은 5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 동안 100만 명이 굶어 죽고 200만 명이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1845년 여름철의 날씨는 매우 이상했다. 매일 흐릿하고 3주간 비만 온적도 있었다. 신문에서는 작년같은 감자 대풍년이 에상된다고 했다. 감자는 두 번 수확한다. 감자가 다 자라기 전 5월에 캐먹는 햇감자와 겨울을 나기 위해 11월에 캐먹는 늦감자다. 사람들은 햇감자를 캐먹고 늦감자를 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마을에서 감자가 검게 변하고 악취가 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부랴부랴 감자를 파보았지만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다음날 밭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감자는 다 썩어있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예전에도 감자 역병이 있었지만 한지역만 그랬지 아일랜드 전체가 그렀진 않았다. 오랜 비로 인한 심한 습기와 강한 바람 때문에 역병이 옮겨간 것이다. 주식이 감자인데다 감자만 심은 탓에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졌다. 소작료를 바치려고 키운 밀은 자라자마자 지주 사람들이 가져갔다. 대기근 전 너무 가난해 혼자 먹고 살지 못하는 극빈층은 동냥을 하며 살았는데 너무 힘들면 구빈원에 갔다. 구빈원은 지주와 농민들이 세금으로 만들어 극빈층을 보호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교도소처럼 엄격하고 자유롭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가는 것은 선택이지만 나갈 땐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대기근이 닥치자 농민들까지 구빈원으로 몰리게 되어 자리가 부족했다. 당시 영국의 총리 로버트 필 총리는 이 심각성을 알고 아일랜드 곳곳에 과학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단은 처방을 잘못 내려 썩은 감자도 먹을 수 있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이 말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복통과 피가 섞인 설사로 고생다가 죽게 되었다. 현대 이 질병은 아일랜드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농민들이 비료로 쓸려고 칠레에서 수입한 구아노에 있던 것이었다. 로버트 필 총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비밀리에 미국에서 옥수수를 수입했다. 총리는 이 작물을 싸게 팔았다. 하지만 산 사람들은 지주와 돈 있는 자들이었고 극빈층은 살 수 없었다. 산 사람들도 먹고 배탈이 났다. 그 동안 먹은 것이 없었고 딱딱한 알갱이를 어떻게 요리하는지도
우리 음식의 언어/ 한성우
2018.12.8.이도원
제목: 우리 음식의 언어
지은이: 한성우
우리나라에서 밥은 쌀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음식 전체를 가르킨다. 밥이 밥상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1942년 한국인의 밥그릇은 550CC였지만 점점 줄면서 현재 밥그릇은 260CC로 반이 줄었다. 예전엔 고기를 먹지 못해 탄수화물인 밥만 먹고 농사할 힘을 내어야 했다. 그렇기에 밥그릇이 그렇게 큰 것이다. 식구는 한 집에서 같이 살며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요즘 시대엔 식구가 성립되지 않는다. 1인가족이 많아지고 집에서 밥을 먹어도 혼자 먹기 때문이다. 비빔밤은 원래 비빈밥이었다. 비벼서 나온 밥인 것이다. 하지만 비빔밥이랑 소리가 같아 비빔밥으로 바뀌게 되었다. 비빔밥은 비비지 않은 채로 나오게 되었고 비빔은 비빔 국수, 비빔 냉면 등으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사용하는 빵이라는 단어는 포르투갈의 팡에서 왔다. 일본과 포르투갈이 교류할 때 일본에 팡이 들어왔고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에 팡이 왔는데 팡을 빵으로 듣게 되자 팡과 빵을 둘 다 쓰게 되고 해방 된 후 빵으로 통일되었다. 옛날 시절 국수의 재료인 밀가루는 너무 귀해 진가루라 불렸다. 그런데 밀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자란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심지 않은 이유는 밥을 짓는 쌀과 자라는 시기가 같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귀하다는 진가루는 국수에 사용되었는데 국수의 긴 길이는 생일잔치에선 장수를, 결혼식에선 백년해로를 의미한다. 국수가닥을 뽑는 것은 직접해야 해서 만들기 힘든 고급음식이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기계로 할 수 있게 되고 싸져서 생일잔치나 결혼식에서 국수를 내놓는 것은 돈을 아낀다는 구두쇠 심보를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 밥상에서 숟가락을 사용하는 이유는 국을 떠먹기 위해서다. 국에 밥을 마는 것은 우리만의 특이한 문화이다. 국과 찌개, 탕, 전골은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그러나 대충 국물이 많으면 국, 적으면 찌개이고 음식점에서 크고 비싸면 전골, 작고 싸면 찌개인 것은 알고 있다. 탕은 이 세가지에 모두 쓰인다. 영어로 국은 수프, 찌개는 스튜지만 전골은 비슷한 것이 없어 번역이 안된다. 우리 밥상은 흰색, 초록색, 빨간색으로 나뉘는데 이는 밥, 채소, 고춧가루가 들어간 채소를 의미한다. 우리 밥상에서는 나물이 굉장히 많다. 밥과 국을 제외하고 밥상을 보면 온통 푸른색이라 할 수 있다. 오이는 여름을 대표하는 채소이고 참외는 수박과 같이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이다. 그런데 오이는 원래 외였다. 참외와 같은 종이라는 것이다. 오이의 다른 이름은 물외로 물이 많은 외라는 뜻이고 참외는 진짜 외라는 뜻인데 이는 오이보다 더 달고 맛있는 오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오이가 채소라면 참외도 채소여야하고 참외가 과일이라면 오이도 과일이어야 하지만 쓰이는 용도가 다르기 때문에 둘은 분류되었다. 고기를 진짜 반찬이라 부르는 이유는 얻기 힘들어서였다. 길러서 먹으려면 사람이 먹을 식물을 내주어야 하고 사냥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돼지는 큰 동물이라 부위별로 맛이 달라서 이름도 다르다. 우리가 자주 즐겨먹는 삼겹살은 삼겹이 아니라 세겹이 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삼겹이 되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이름인 갈매기살은 갈매기모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가로막이 부르면서 바뀐 것이다. 의문의 부위는 가브리살이다. 등겹살이라 불려야 맞지만 가브리살로 바뀐 것은 부르면서 바뀐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초밥은 이름만 보면 초를 친 밥이라 회가 없어야 하지만 회가 들어있다. 그래서 원래는 초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스시를 먹는다고 해야 한다.
느낀 점: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독수리는 왜 까치에게 쫒겨다닐까?/김기범
2018.11.24.이도원
제목: 독수리는 왜 까치에게 쫓겨다닐까?
지은이: 김기범
매년 봄 5월 말에서 6월 초엔 선의로 시작된 새끼 동물 납치극이 일어난다. 등산객들이 새끼 동물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동물보호소에 신고하는 것이다. 이는 구조가 정말 필요한 동물이 아니라 어미가 먹이를 찾으러 새끼를 두고 갔을 때 신고한 것이 다반수이다. 이 때문에 어린 동물은 어미와 강제로 떨어지게 되고 동물의 수는 줄어들게 된다. 그러므로 동물을 보고 신고할 때는 주변에 어미의 사체가 있는지 보고 심각한 부상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사람들은 독수리를 생각하면 용맹하고 사냥에 능숙한 새를 떠올린다. 하지만 독수리는 사냥을 하지 못하고 자기보다 작은 새에게 쫓겨다닌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는 수릿과가 아니라 맷과이다. 독수리는 매년 겨울에 한반도에 와서 먹이를 먹고 이동하는 철새이다. 독수리는 사냥을 하지 않고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는다. 독수리의 위는 썩은 시체를 소화할 수 있기 때문에 몇 일 지난 썩은 고기도 먹을 수 있다. 매도 먹이가 너무 없을 때는 썩은 고기를 먹는데, 위가 독수리만큼 탄탄하지 않아 대부분 죽는다. 우리나라에 황새 한쌍은 1971년을 끝으로 없어졌다. 이 기사는 동아일보가 냈는데 낸지 사흘 만에 밀렵꾼에 의해 수컷이 죽었다. 남은 암컷은 나중에 농약을 먹고 죽어가던 중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져 1991년에 죽었다. 그런데 2014년에 황새가 봉하마을에 다시 나타났다. 이 황새는 일본의 황새연구마을에서 방사한 새인데 한국까지 날아온 것이다. 황새가 돌아왔다는 것은 봉하마을의 자연이 좋다는 증거였다. 황새 한쌍이 살려면 무농약으로 농사짓는 밭이 50만평이 필요한데 봉하마을은 70만평이 무농약농사였다. 봉하마을 주민들은 황새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황새에게 인공 둥지를 만들어 주었다. 원래 황새는 가장 높은 곳에 둥지를 짓는데 가로등보다 긴 나무가 없자 황새를 배려하여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황새에게 봉하마을을 찾아온 황새라며 봉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 마을에는 한국의 황새복원센터에서 탈출한 황새 한 마리와 시베리아에서 온 황새 2마리로 4마리 황새가 살게 되었다. 바다제비는 우리나라 무인도인 칠발도와 구굴도에만 알을 낳는 희귀 철새이다. 그런데 20세기 사람들이 쇠무릎을 키운다고 심어놓은 것이 바다제비를 위협한다. 쇠무릎은 약초로 쓰이는데 사람들이 팔려고 키웠다가 장사가 되지 않자 관리를 하지 않고 떠나면서 칠발도는 쇠무릎 천지가 되었다. 쇠무릎의 열매는 바다제비의 날개에 붙어 바다제비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고 쇠무릎이 높게 자라면서 바다제비가 둥지를 만드는 식물인 밀사초가 햇빛을 받지 못하게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인근 주민들은 바다제비를 살리기 위해 가는 길이 험한 칠발도에 가서 쇠무릎을 뽑고 밀사초를 심는다. 쇠무릎은 박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주민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면 바다제비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토종곰인 반달가슴곰은 자연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2000년 지리산에서 어떤 무인 카메라에 야생 곰의 모습이 찍혔다. 사람들은 곰을 지리산에 방사하여 수를 늘리고 있다. 그래서 36마리까지 늘어났으며 50마리가 될 때까지 계속 노력하고 있다.
느낀점: 재미있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2018.10.27.이도원
제목: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지은이: 조세희
공장 마을에는 난장이 한 명이 사는데 그는 키가 117센티미터여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가난하게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난장이의 몸이 안 좋아지면서 아이들은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했다. 공장에서는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 쓰고 시끄러운 소음을 들으며 일했고 점심시간은 30분을 주면서 10분안에 밥을 먹고 20분 동안 공을 차라 했다. 공장에서는 모두 가까이 친해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서로 어색했다. 그런 상황에 막내딸인 영희는 아무말 없이 가출했다. 시에서 아파트를 짓는다고 1달 안에 짐싸서 나가라고 했다. 아파트는 50만원이 넘게 있어야 들어갈 수 있지만 난장이의 집을 팔면 20만원도 안나왔다. 1달 안에 안나가면 집이 부셔지는 것이었다. 그 때 지섭이라는 청년을 만났는데 대학을 다니다 이 사회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해결해보려고 노동운동을 하게 된 사람이었다. 지섭은 아무 것도 할 수없었다. 집이 팔리고 난장이 가족은 영희를 찾지 못하고 은강으로 이사갔다. 영희는 자기 집을 산 사람을 찾아가 몸을 대줘서 입주권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미 집은 철거되어 있었다. 영희도 은강으로 갔다. 난장이는 몸이 점점 안좋아지다가 죽었다. 세 자식들은 공장에 취직했다. 셋이 열심히 일해 번 돈은 모두 생활비로 다 쓰였다. 기본임금이 너무 짰기 때문이다. 셋은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해야 했고 영희는 엄청난 소음으로 청각장애가 생겼다. 두 번째 월급을 탄 영수는 노조 지부장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사용자가 어기는 조약이 너무 많다며 항의했다. 노조 지부장은 회사에서 보내 뽑은 것이었다. 지부장은 영수의 말을 다 돌리고 무시했다. 은강은 주변의 생명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공장의 폐수, 폐유는 모두 바다로 떠내려가고 그 주변을 흐르는 시냇물은 엄청난 고무냄새가 나고 탁해서 코를 막고 넘어가야 했다. 은강에 사는 모든 노동자들은 모두 이런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공장의 본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부유하고 다른 삶을 살았다. 노사간의 회의에선 사용자가 노동자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고 사용자 측에서만 이익을 보려했다. 결국 사용자의 마음대로밖에 할 수 없었다. 영수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냈지만 바뀌는 것이 많지 않았다. 결국 노동자들이 피폐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은강 산업 회사의 회장 때문이라 생각하게 되어 회장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회장이 아니라 회장의 동생이었다. 비슷하게 생겨 잘못 죽은 것이었다. 영수는 법정으로 나오게 되었다. 죽은 사람의 조카 입장에서는 더럽고 미개한 노동자 하나가 자기 숙부를 죽인 것에 화가 났고 피고자의 아버지가 난장이라는 것을 알아 조롱하고 난장이가 독재적이고 나쁜 성격 때문에 아들이 저꼴이 났다 생각했다. 조카는 노동자 입장을 생각해 볼수가 없었다. 매일매일을 부유하게 살았고 학교도 제대로 다녔기 때문이다. 영수는 재판에서 증인으로 지섭을 내세웠다. 지섭은 이 노동자 가족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하려고 가계부를 내보였고 가계부에는 월세와 식비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죄가 살인이었고 피해자가 높은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영수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느낀점: 전태일 평전의 다른 이야기 같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가토 요코
의자놀이/공지영
2018.9.8.이도원
제목: 의자놀이
지은이: 공지영
2009년 정리해고 발표가 나고 임성준 씨는 노조원들과 함께 파업에 동참했다. 그리고 2년 후 파업이 끝나고 돌아왔고 무급휴직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매일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며 늦게 돌아왔다. 전에 쌍용자동차를 다니던 시절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빛이 쌓여가는 것이었다. 어느 날 고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남편이 자러 방으로 간 사이 아내는 아무 두려움도 못느끼고 바로 베란다에서 뛰어내렸다. 아내가 죽고 1년 후에는 남편이 과로사로 죽었다. 두 아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150만원의 빛이였다. 그것이 쌍용자동차 사고 이후 14번 째 죽음이었다. 2009년 정리해고가 일어났을 때 공장은 산자와 죽은자라는 말이 생겼다. 해고된 자와 해고되지 않고 공장에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정리해고가 결정되고 노조 지부장과 비정규직 지회 사람 3이 공장 옥상에 올라가 파업 반대를 외치고 김진숙 씨가 크래인에 올라 시위를 했는데 86일만에 내려오고 처음의 약속과는 달리 구속되었다. 그 후 노조와 조합원들은 파업에다 참여했다. 그중 산자도 몇 있었다. 해고자들이 다시 공장에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죽은 자들은 공장에 들어가서 비터기로 했다. 회사에선 한명 당 1000원이 넘는 돈을 포기하라 했는데 무급휴직자에게 2개월 치 밀린 월급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정리해고 발표 한 달 후 스트레스성 뇌출혈부터 시작해 자살로 5명이 죽었다. 1000원을 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공장에서는 용역들과 첫 충돌이 있었다. 그런데 용역들 앞에 해고되지 않은 동료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앞장서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당황해하며 어쩔줄 몰랐다. 노조장인 한상균 지부장이 폭력은 쓰지 말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상균 지부장은 후회했다. 싸움 중에는 부상이 심한 사람들을 태우고 병원에 이송할 지부장과 운전기사가 있었는데 지부장이 부상자를 데리고 차로 가는 중에 용역들이 뛰어와 지부장과 운전기사를 집단 폭행한 것이다. 조합원들은 그것을 보고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다. 32시간의 충돌에서 93명이 부상당하고 23명이 연행당하고 2명이 구속되었다. 그 후 경찰청장은 조합원들이 공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보고 두 번째 충격 때 중무장한 용역들과 수면가스와 테이저건을 보낸다. 그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헬기를 띄어 잠을 방해하고 가족들이 음식과 물을 보내주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장 전체를 고립시켰다. 그리고 헬기에서는 최루액을 매일 뿌렸다. 이 최루액은 플라스틱과 스트료폼을 녹이고 시멘트 바닥을 상하게 하는 독성이 있었으며 피부에 닿으면 피부가 벗겨지고 발암물질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찰에서는 이 최루액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거짓말을 들어놓았다. 게다가 이 최루액들은 비닐포장에 되어있는데 유통이 된지 10년이나 지나있었다. 조합원들은 에어컨 냉각수에 밥을 지어먹고 먹고 난 후 남은 수증기로 밥을 해먹었는데 마실 물이 굉장히 부족해 경찰에 물이라도 달라 했다. 그러나 경찰은 나와서 먹어라라는 식으로 말했다. 조합원들은 전기가 끊긴 상황에서도 공장이 다시 가동될 수 있도록 비상전기를 도료를 보존하는데에 썼다. 도료가 굳으면 피해손실액이 엄청나게 나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공장을 사랑했다. 힘든 상황에서 몇 일이 지나고 민주노총에서 전화가 왔다. 곧 무서운 사태가 벌어지니 자기들도 책임을 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경찰에서 진압이 일어난다는 경고도 없이 그냥 부시고 들어왔다. 용역과 경찰들은 노조원들을 사냥하듯이 때려잡았고 조합원들은 도망쳤다. 그 때 기자들도 있었는데 경찰들은 기자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으면 헬멧을 벗기고 여럿이서 집단폭행했다. 이를 어쩌다 찍은 기자들도 있었다. 8월 5일 한상균 지도부장은 이제 포기하자고 했고 다음날 모두 나왔다, 지도부장은 구속되었고 조합원들은 폭폭력으로 남은 상처들이 수두룩했다. 정신과 의사는 이 조합원들 257명 중 정상은 7%밖에 없고 71%가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세를 보이며 4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자료는 인명사고를 경험한 지하철 기관사나 성폭력 등 각종 폭력에 노출된 서비스노동자보다 6~7배나 높다고 했다. 그리고 자살율은 일반인의 3.74배, 심근경색 사망률은 18.3배가 된다고 하였다. 정리해고 발표 후 2012년까지 죽은 사람들은 22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빨갱이 취급을 받게 되었고 취업도 되지 않았다.
느낀 점: 너무 무섭고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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